한국일보의 '오늘의 책(7월 21일)'이 마샬 맥루한의 <미디어의 이해>를 다루고 있다. 그가 태어난 날이 1911년 오늘이어서이다. 한데, 두 종의 국역본 가운데, 커뮤니케이션북스판의 이미지를 올려놓고 있어서 예전 교수신문의 고전번역비평을 떠올리게 됐다. 내 기억에는 민음사판이 더 추천할 만한 번역이라고 제시됐었기 때문이다. 다시 찾아보니 그렇다. 참고삼아 챙겨놓는다(<최고의 고전 번역을 찾아서2>(생각의나무, 2007)에 수록돼 있다).

한국일보(08. 07. 21) 미디어의 이해

1911년 7월 21일 캐나다의 미디어 이론가이자 문명비평가인 마샬 맥루한이 태어났다. 1980년 69세로 몰. 맥루한은 마니토바대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다가 영문학으로 전공을 바꿨고, 캠브리지대에서 엘리자베스 시대의 시인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그는 영문학 교수로 미국과 캐나다의 대학에서 20여년간 대중문화를 강의했다. 지금은 일상 용어가 된 ‘지구촌’이나 ‘정보시대’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미디어의 이해>는 맥루한의 이런 공부의 배경-테크놀로지와 문학과 문화비평-이 없었다면 탄생할 수 없었던 책이다.

<미디어의 이해>가 출간된 것은 1964년이다. 반향은 대단했고 맥루한은 스타 대접을 받았다. 이듬해 뉴욕헤럴드트리뷴은 맥루한을 “뉴턴, 다윈, 프로이트, 아인슈타인, 파블로프 이후 가장 중요한 사상가”로 꼽았다. 1967년 뉴스위크는 학자로는 드물게 그를 표지인물로 선정하기도 했다.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맥루한의 유명한 명제는 이 책의 서론 제1장이다. 그는 이어 나르시스 신화를 빌어 미디어 시대 인간의 운명을 말한다. “나르시스는 혼수상태나 감각 마비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narcosis’에서 파생된 말이다… 이 신화가 말하려는 핵심은 인간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신을 확장한 것(나르시스에게는 거울 같은 물)에 갑자기 사로잡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미디어의 이해>의 부제가 바로 ‘인간의 확장’이다. 맥루한은 음성언어부터 돈, 시계, 사진, 신문, 자동차, 광고, 게임, 텔레비전, 무기 등 26가지 미디어를 인간의 확장물로 보고 독특한 예언적 표현과 비유, 고전 문학과 현대 대중문화를 종횡하는 현란한 인용과 분석으로 해석한다. 그것은 미디어로 본 문명사이기도 하다. 이 책이 미디어 전공학과의 필독서를 넘어 현대의 고전으로 읽혀야 하는 이유다. 영화 ‘매트릭스’의 광고카피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다”였던가.맥루한은 40년 전에 이미 그것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는 말했다. “우리는 우리가 보는 대로 된다.”(하종오기자)

교수신문(06. 11. 24) 고전번역비평(53) 마셜 맥루한의 『미디어의 이해』

맥루한의 『미디어의 이해』 국역본은 두 종류가 있다. 박정규 역(커뮤니케이션북스. 1997)과 김성기·이한우 공역(민음사, 2002)이 그것이다. 그 외 완역이 아닌 초역이 있었으나 지금은 절판돼 찾을 수 없다. 이글을 위해 사용한 영어 원본은 『Understanding Media』(MIT Press, 1994. 초판 1964년)이다. 박정규 역과 김성기·이한우 역 사이에는 상당한 시차가 있고 그래서 우리는 후자가 전자에 비해 보다 발전된 번역본일 것이라는 기대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논리적인 추론일 뿐 반드시 그런 건 아니다. 



먼저 이 책의 번역과 관련해 특별한 성격 한 가지를 짚고 넘어가야겠다. 그것은 ‘미디어의 이해’의 원저자의 글이 난삽하고 의미가 애매모호한 부분이 많다는 사실이다. 이런 글을 번역하는 경우 원천적으로 옮긴 글 또한 난삽하고 그 의미가 애매해질 수밖에 없다.

맥루한의 글은 구술적이다. 즉 명석하고 분명함과는 거리가 먼 反개념적, 反분석적, 反기계론적인 것이 그의 글이다. 맥루한이 말한 것처럼 번역을 기계론적 작업이라고 한다면 그의 이야기는 번역에 적합한 대상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번역문은 그의 원문을 읽는데 도움을 주는 참고서로서의 역할이 더 어울릴 수 있다. 번역본만으로는 원본의 의미전달이 제대로 안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맥루한의 저서의 경우는 역자의 적절한 해석과 의역이 불가피한 부분이 꽤나 많다. ‘미디어의 이해’는 꽤 두꺼운 책이다. 이를 모두 언급하기는 힘들다. 몇 가지 주된  주제를 중심으로 비교 평가하고자 한다.



꽤나 난삽하고 애매한 책
‘미디어는 메시지다’(The medium is the message)는 맥루한의 가장 유명한 메타포 중의 하나다. 이 말은 책 ‘미디어의 이해’ 첫 장에 등장한다. 그 첫 구절을 박정규는 이렇게 옮겼다. “우리의 문화는 모든 사물을 관리하기 위해 이들을 분할하고 구분하는데 숙달되어 있으므로 이제 실제로 ‘미디어가 메시지다’라는 것을 납득하게 되면 다소 충격이 될 것이다.”(23쪽) 김성기 등의 번역은 이렇다. “모든 사물들을 통제의 수단으로 분리해서 보는데 오랫동안 익숙해져 있는 서구와 같은 문화 내에서는 작용면에서나 실제적인 면에서 미디어가 곧 메시지라는 주장이 종종 충격으로 여겨진다.”(35쪽) 

이 문장의 원문은 “In a culture like ours, long accustomed to splitting and dividing all things as a means of control, it is sometimes a bit of a shock to be reminded that in operational and practical fact, the medium is the message.”(7쪽)이다. 이 문장(원문)의 전언(傳言)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우리 시대의 사물이해 방식은 이분법 혹은 분절적인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사물을 지배 통제하기 위한 것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말은 이분 혹은 분절이 아니라 통합적인 인식으로 이것은 우리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충격적인 주장이다”하는 것이다.

원문의 내용을 이렇게 정리하고 보면 박정규와 김성기·이한우 번역에 빠진 부분은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원문의 의미를 보다 쉽게 전달하는 데는 후자가 더 나은 것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두 번역문 모두 원문 없이 번역문만을 읽을 때 원문의 전언을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데는 상당한 의문이 제기된다.

개념 번역, 암묵적 의미 살려야
다른 예를 보자. 여기서도 유사한 문제가 발견된다. 다시 말해 번역문만을 갖고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 말이다. “That technologies are ways of translating one kind of knowledge into another mode has been expressed by Lyman Bryson in the phrase ‘technology is explicitness.’ Translation is thus a ‘spelling-out’ of forms of knowing. What we call ‘mechanization’ is a translation of nature, and of our own natures, into amplified and specialized forms.”(56쪽)

박정규는 이를 다음과 같이 옮겼다. “테크놀로지라는 것은 한 종류의 지식을 또 다른 양식으로 번역하는 방법이라고 라이먼 브라이슨(Lyman Bryson)은 말하면서 ‘테크놀로지는 명료함이다’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따라서 번역(translation)은 앎의 형태를 ‘분명하게 하는’것이다. 한편 우리가 ‘기계화’라는 부르는 것은 자연을, 또한 우리 자신의 속성을 증폭되고 전문 분화된 형태로 바꾸는 것이다.(93쪽)

한편 김성기·이한우 역은 이렇다. “기술이 한 종류의 지식을 다른 양식으로 번역하는 방식이라는 점을 라이먼 브라이슨 Lyman Bryson은 ‘기술은 명료화이다’라고 표현한바 있다. 따라서 번역이란 인식의 형식들을 ‘하나하나 판독하는 것’이다. 우리가 ‘기계화’라고 부르는 것은, 자연과 우리인간들의 본성을 증폭되고 특수화된 형태들로 번역하는 것이다.”(102쪽)

이들 사이에 다른 것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박정규가 “앎의 형태를 분명하게 하는” 것으로 옮긴 ‘a spelling-out of forms of knowing’을 김성기 본은 ‘인식의 형식들을 하나하나 판독하는 것’으로 옮기고 있다. 다른 하나는 ‘specialized form’을 ‘전문 분화’와 ‘특수화’로 옮긴 부분이다. 이들 두 가지 번역의 경우는 박정규 역이 김성기 역보다는 쉽게 그리고 보다 원문의 뜻을 충실히 옮기고 있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양자 모두에게서 흠이 발견된다. 위 문장의 경우 ‘…nature, and of our own natures’의 경우 이를 단순히 ‘자연을, 또한 우리 자신의 속성을’으로 옮기는 경우 원문과 대조 없이는 거의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 보다는 ‘사물의 원래 자연적인 상태의 것을, 그리고 우리 자신의 본래적인 속성들’ 정도의 의역이 옳다고 생각된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번역은 오역이나 불충분한 번역이 될 위험이 있다.

한 가지 더 작지만 큰 문제이기도 한 것이 있다. 그것은 “technology is explicitness.” 문장의 ‘explicitness’ 이다. 이를 두 번역본은 모두 ‘명료함’이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여기서의 ‘explict’는 ‘tacit’의 반대되는 그래서 ‘암묵적’과 대칭적인 ‘명시적’-보이게 밖으로 드러낸다는 의미의-이라는 용어가 더 적합할 것이다. 맥루한이 부단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이 근대적 시각 문화라고 이해할 때 그렇다는 것이다.

암묵적 의미가 다르기 때문에 번역에 좀 더 세심해야할 이런 종류의 단어들이 있다. 예를 들면 ‘Synesthesia or unified sense.’(315쪽)를 두 번역은 모두 ‘통일된 감각’(451쪽, 437쪽)으로 옮기고 있는데 이는 ‘통 감각 또는 통합감각’이 보다 적절할 것으로 보인다. 특별히 오역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의미전달이 왜곡되거나 전달이 잘 안되는 용어들은 많이 발견된다.

원서 대신하기 위한 노력
두 번역본을 비교하면서 얻게 된 결론은 원문의 번역내용에 있어서는 양자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큰 차이가 없게 된 이유는 아마도 김성기·이한우의 번역이 앞서 나온 박정규의 번역을 참조했고 그 보다는 두 번역 모두가 일본어 번역본-박정규는 언급하지 않고 있지만 김성기·이한우는 참조했음을 언급하고 있다-에 의존한 부분이 많았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결과적으로 두 번역에는 모두 직·간접으로 일본어 번역이 많이 참조됐기 때문에 유사할 수밖에 없다고 추측된다.

이런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두 번역본 가운데 어느 것 하나를 추천한다면 그것은 김성기·이한우의 번역이다. 그 이유는 번역 책으로서의 격식을 보다 충실하게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이지만 박정규 역에는 없는 원본의 이름이나 참조서적, 번역과정 등에 관한 내용을 김성기·이한우의 역은 밝히고 있고 또 욕심에 차진 않지만 역자 주 그리고 L. H. Lapham의 해제용 서론 등이 첨가돼 독자에게 도움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추천을 하면서도 맥루한 사상을 이해하는데 번역본이 원서를 대신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 되기 위해서는 아직 상당한 보완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번역자가 전공이 다르기 때문인지 주석이 필요한 사항의 선택이나 용어 해석 등에 있어서 단절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다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런 점들이 훗날 보완되기를 기대해 본다.(임상원/ 고려대 명예교수·언론사상) 

08. 07. 21.

P.S. 요는 두 종의 번역본 모두 원서를 대신할 수 있는 수준은 아직 못된다는 것이겠다(유감스럽지만, 현재로선 다수 고전 번역서들의 현실이 그러하다). 내가 알기에 맥루한의 책은 <미디어의 이해> 외에 <미디어는 맛사지다>(열화당, 1988; 커뮤니케이션북스, 2001), <구텐베르크의 은하계>(커뮤니케이션북스, 2005), <지구촌>(커뮤니케이션북스, 2005) 등이 더 소개돼 있다. 그리고 해설서로는 조너선 밀러의 <맥루안>(시공사, 2001), 필립 마샨드의 <마셜 맥루언>(소피아, 2006), 그리고 데이비드 스테인즈 등이 엮은 <매클루언의 이해>(커뮤니케이션북스, 2007)가 눈에 띈다. 언젠가 적은 적이 있지만 맥루한의 책을 연달아 낸 출판사에서 그 강연과 대담을 묶은 책은 '매클루언의 이해'라고 내는 건 매우 엉뚱하면서도 기이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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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22 09: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7-22 10:32   좋아요 0 | URL
사실 대단히 미디어 친화적 한국사회에서 새로운 미디어론이 나와야 하는 게 아닌가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정보화사회론 같은 것도 그렇구요...

노이에자이트 2008-07-23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어 어렵네요...

로쟈 2008-07-24 22:06   좋아요 0 | URL
사실 어렵기로는 우리말이 더 어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