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북리뷰들을 보니 다행히도 관심도서가 많지 않아서 부담이 덜하다. 한꺼번에 두 권의 책이 나온 빌 헤이스 정도만 챙겨놓으려고 한다. 피와 잠에 대한 책들이다.

문화일보(08. 06. 20) 피 에 대한 인류의 오해와 진실

“두 시체의 머리를 곧바로 절단하고, 거기서 쏟아져 나오는 피를 모조리 받아냈다. 머리는 물론이고 몸에서도 피가 웬만큼 쏟아져 나왔다 싶으면 이번에는 시체를 눌러서 더 짜냈다. 더 이상 피가 나오지 않으면 이번에는 시체를 더 작은 조각으로 토막냈고 나중에는 거의 다진 고기 수준으로 만들어서 피를 걸러내고 빨아내고 짜냈다. 그 과정에서 물이 추가될 경우에는 그 양을 일일이 기록했다….”

이 끔찍한 장면은 괴기영화나 스릴러 드라마에 나오는 내용이 아니다. 실제로 19세기에 진행됐던 ‘2인 동시 해부’의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이 실험을 통해 의학계는 인간의 붉은 액체 ‘피’의 양이 약 5ℓ라는 것을 알게 된다.



책은, ‘피’에 대한 것이다. 저자는 역사와 문학, 신화와 과학을 넘나들며 피의 모든 것을 들려 준다. 거기다 동성애자(게이)인 저자 자신의 개인적 삶의 내밀한 구석까지도 곁들이고 있다. 저자의 해박한 지식은 인류 역사상 피에 관해 얼마나 많은 오해와 상상이 흘러넘쳤는지를 상세하게 보여준다. 상대방의 피를 마심으로써 그 힘과 용기를 자기 것으로 만들려 했던 고대 로마 검투사들의 시대부터 혈액 검사를 통해 에이즈와 같은 난치병을 밝혀내고 복잡하기 그지없는 치료법을 개발해낸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의·과학사를 다채롭게 펼쳐 보인다.

피를 뽑는 게 만병통치의 치료법이라고 믿었던 로마시대 의사 갈레노스, 혈액의 순환을 발견한 윌리엄 하비, 현미경으로 미시 세계를 발견한 레벤후크, 면역학으로 노벨상을 수상한 파울 에를리히, 에이즈 바이러스를 발견한 제이 레비 등 ‘피의 역사’에 중요한 족적을 남겼던 과학자들이 등장한다. 또 오늘날의 우리가 보기엔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한 위인들의 면면도 드러난다. 예를 들어, 치밀한 신체 해부도를 남긴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실은 ‘사랑 정맥’이나 ‘모유 정맥’ 같은 있지도 않은 혈관을 그려 넣었다.

저자는 피와 관련된 다양한 문학작품들, 이를테면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 ‘흡혈귀와의 인터뷰’를 비롯해 아리스토텔레스와 갈레노스의 고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헌 속에 표현돼 있는 피에 대한 사람들의 욕망과 감정, 사상을 읽어낸다.

책에는 또 저자의 자전적 경험도 녹아 있다. 저자의 파트너 스티브는 에이즈로 고통받으며 자신의 피가 저자에게 닿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한다. 이를 안타깝게 바라보면서도 어쩔 도리가 없는 저자의 애틋한 심정이 손에 잡힐 듯 그려진다. 이와 더불어 에이즈 환자의 혈액을 부주의하게 취급하는 미국 의료계의 참혹한 상황에서부터 에이즈의 유행으로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한 미국 동성애 공동체가 참담하게 무너지는 모습, 성 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혼란에 혼란을 거듭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한 글은 이 책을 과학적 논픽션물에서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인문학적 저작물로 탈바꿈시킨다. 예를 들어, 책의 12장 ‘피와 정욕’에서는 남녀 성기와 피의 관계를 상세하게 살피면서도 문학적 향기까지 곁들이고 있다. 이 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피는 거의 암흑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살아간다. 피는 몸속에 있는 뼈와 살과 피부 사이로 뻗은 혈관을 따라 수천 킬로미터의 거리를 움직인다. 예외가 있다면 가끔 눈 속으로 여행을 갈 때뿐이다. 매일 아침마다 내 눈의 흰자위에 생기는 이 붉은 핏발은 사실 정맥이 아니라 동맥이다. 그러니, 생각해 보면 그 색깔이 그토록 붉은 것도 다 이유가 있다. 동맥을 흐르는 피는 한껏 산소를 머금은 상태니까.”



이 책과 함께 저자의 또다른 저작물 ‘불면증과의 동침’도 이번에 같이 출간됐다. ‘불면증과의 동침’엔 저자의 자전적 기록이 더욱 진하게 녹아 있다. 두 책을 통해 읽을 수 있는 저자의 개인사는 파란만장하기 그지없다.

저자의 아버지는 한국 전쟁 참전 상이군인 출신이자 미국 지방 코카콜라 병입공장 경영자로 예술과 문학에 재능을 가진 어머니와의 사이에 5녀1남의 자식을 두었다. 유일한 아들로 태어난 저자는 자신이 어떻게 성장해 왔는지와 성 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을 발견해 커밍아웃을 하게 된 과정, 남다른 사랑과 작가로 입지를 다지게 되기까지의 우여곡절을 상세하게 털어놓고 있다.

5명이나 되는 누이들 사이에서 성장하면서 겪었던 독특한 경험들, 가톨릭 교리를 강요하는 아버지에게 겉으로는 복종하는 척하지만 속으로는 종교에 대한 회의를 키워나갔던 반항적인 사춘기 시절, 동성에 대한 욕망을 처음 느꼈던 어린 시절과 그와 함께 시작됐던 수면 장애, 마리화나를 피우며 동성 상대를 찾아 샌프란시스코를 방황하던 청년기의 괴로운 추억, 에이즈에 걸린 파트너를 만나 방황을 마감하고 새로운 인생을 걸어가게 된 과정이 잔잔하면서도 감동적으로 그려진다.

두 책을 통해 우리가 충분히 알고 있다고 여겼던 ‘피’와 ‘잠’에 얼마나 무수한 진실이 숨겨져 있었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의·과학사와 문화사를 넘나들며 저자의 자전적 경험까지 녹아 있는 새로운 형식의 논픽션은 읽는 이에게 ‘아, 글을 이렇게 쓸 수도 있구나’ 하는 신선한 깨달음을 선사한다.(김영번기자)

08. 0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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