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 대학원신문의 서평기사를 담비에서 옮겨온다(http://www.dambee.net/news/read.php?section=S1N5&rsec=&idxno=10644). 아주 두툼한 책 <The left, 1848~2000: 미완의 기획, 유럽 좌파의 역사>(뿌리와이파리, 2008)에 대한 리뷰이다. 전국민적인 촛불집회 덕분에 우리는 현단계 민주주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볼 기회도 얻게 되었는데, 그러한 성찰/상상에 요긴한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담비(08. 06. 07) [구양봉의 橫書竪說] 민주주의의 확장을 상상하기 위한 필독서

무려 1천28쪽에 달하는 <The left, 1848~2000: 미완의 기획, 유럽 좌파의 역사>(2002)는 영국의 역사가 제프 일리가 20여 년에 걸쳐 집필한 역작이다. 20여 년에 걸쳐 유럽 좌파의 150여 년을 정리한 이 책을 10여 개월에 걸쳐 전문 번역가 유강은씨가 깔끔히 번역해냈고, 이런 노고가 빛을 발했는지 5만 원의 고가인데도 불구하고 벌써 3쇄(총 발행부수 3천500 부)까지 찍었다고 한다.

현재 미국의 미시건대학 칼 포트 석좌교수로 재직 중인 일리는 원래 독일사 전문가이다. 일리가 먼저 유명세를 타게 된 것도 독일사 부문으로서, 동료인 데이비드 블랙번과 공저한 <독일 역사기록의 신화>(1984)는 독일이 여타 유럽 국가들과는 다르게 발전해왔다고 주장하는 독일 역사계의 이른바 ‘특수한 길’(Sonderweg) 테제를 정면으로 비판한 ‘숨겨진 걸작’ 이다. 이 책은 같은 해에 <독일사의 특수성(The Peculiarities of German History)>이라는 제목으로 영역됐고, 국내에도 작년에 <독일 역사학의 신화 깨트리기> 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물론 이 책은 적어도 지금까지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했고, 그래서 유독 ‘한국에서만’ 숨겨진 걸작이 되어 버렸다.



일리의 정치적 성향을 굳이 추적하자면 정통 맑스주의자는 아니지만 넓은 의미에서 좌파이고, 좀 더 한정해서 말하자면 그람시주의자에 가깝다. 일리의 이런 성향은 이처럼 자칫 헛발을 내딛기 쉬운 거대한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동력의 하나가 된 듯하다. 일례로 일리는 좌파 역사가들이 좌파가 밟아온 지난날의 영광과 오욕을 다루면서 종종 누락하고 있는 여성운동과 환경운동 등을 정당하게 복권하고 있는데, 이 점은 일리의 이 책에 버금갈 만한 유일한 책인 도널드 사순의 <사회주의 1백 년: 20세기의 서유럽 좌파>(1988)가 상대적으로 여성운동과 환경운동에 지면을 아끼고 있는 점과 비교해 볼 때 더욱 더 빛을 발한다.



이런 점에서 일리가 자신의 책에 원래 “민주주의 벼리기”(Forging Democracy)라는 제목을 단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셈이다. 일리가 좌파의 역사를 기록하게 된 이유가 바로 “모름지기 좌파의 역사는 인간의 잠재력을 제한하고 왜곡하며, 공격하고 억압하고, 때로는 심지어 완전히 없애버리려고 하는 불평등의 체제에 맞서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좌파가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싸움에 별반 기여하지 않았다면 일리는 좌파의 역사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일리가 유럽 좌파의 역사를 뒤바꿔놓은 분기점 중의 하나로 꼽는 1968년의 유산을, 그리고 그 유산에 기대어 등장한 정체성의 정치학(특히 동성애 운동과 성애의 정치학 등), 혹은 말 그대로 새로운 정치학(반문화 운동과 빈집점거 운동 등)을 비교적 호의적으로 평가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즉, 일리가 보기에 이 새로운 운동‘들’은 “민주적 실천의 새로운 영토들을 지도상에 기입”함으로써 “민주주의가 가질 수 있는 의미 역시 변화”시켰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이런 점에서 이 책은 J. 호머먼의 재기발랄한 책 <붉은 아틀란티스: 공산주의가 부재한 공산주의 문화>와 겹쳐 읽을 만하다. 공산주의를 ‘20세기 최대의 미학적 프로젝트’로 해석하는 이 책은 공산주의가 열어놨지만 우리가 간과해 왔던 ‘새로운 영토들’을 보여주고 있다.)

앞표지

물론 이 책에서 굳이 아쉬운 점을 찾으면 없는 것도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일리가 스페인, 더 나아가 세계 곳곳의 아나키즘에 별반 주목하지 않은 게 못마땅하다. 일리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성과는 오직 혁명을 통해서만, 또는 적어도 내가 유럽 근대사회의 위대한 헌법제정 국면들이라고 부르는 몇몇 집중적인 변화의 시기를 통해서만 획득될 수 있었다”고. 그렇다. 일리의 이 말을 되받아 말하면 나는 아나키스트들이야말로 이런 혁명, 이런 국면들을 앞장서 열어젖힌 인물들 중의 하나라고 말하련다. 어떤 점에서 사회주의자들(공산주의자들)은 아나키스트들이 맺어놓은 열매를 받아먹거나 망쳐오지 않았을까? 1848년, 1871년, 1917년, 1968년이 모두 그랬다.



올해는 “잃어버린 10년”에 분통을 터트리던 보수 우파들이 승리의 샴페인을 터트린 해이다. “잃어버린 10년” 운운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해방 이후 50여 년을 도둑맞았다”라고 비웃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손쉬운 일일지도 모른다. 일리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20세기의 좌파가 추구했던 미래의 일부를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여기에 덧붙이자면, 우리는 미래의 나머지를 살아가야 할 것이다. 이 ‘나머지 미래’에 뭔가를 변화시키려면, 우리는 20세기 좌파의 유산 속에서 “실행 가능한 형태의 민주주의의 확장을 다시 상상하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것이 이 책이 갖고 있을지 모를 단점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일독을 강력히 권하고 싶은 이유이기도 하다.

08. 06. 11.

P.S. 리뷰를 읽다가 개인적으로 일리의 <민주주의 벼리기>보다 더 관심을 갖게 된 책은 호버만의 <붉은 아틀란티스>다(도서관에 없길래 해외주문을 넣었다). 찾아보니 LRB에 피터 울른(웰렌)의 리뷰가 지난 1999년에 실린 바 있다(http://www.lrb.co.uk/v21/n23/woll01_.html). 울른은 언젠가 언급한 적이 있는데, <영화의 기호와 의미>(영화진흥공사, 1990)의 저자이다. 리뷰의 제목이 'Stalin at the Movies'인 것으로 보아 책은 스탈린시대를 다루고 있는 듯하다. 궁금하고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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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akim 2008-06-11 22:04   좋아요 0 | URL
피터 월렌은 작가-구조주의를 표방한 이론가로 바쟁의 리얼리즘을 비판하죠.^^ 근데 저 책의 번역은 좀 그래요^^ 워낙 월렌의 글이 명료해서 그나마 의미가 통한다고 해야하나....

로쟈 2008-06-12 08:07   좋아요 0 | URL
그래서 영어본까지 구했던 기억이 나네요...

노이에자이트 2008-06-12 23:22   좋아요 0 | URL
돕 -스위지 논쟁이 자본주의 이행논쟁의 전부인줄 아는 이들에게 일리-블랙번의 주장을 들어보라고 하고 싶어요.저는 독일 역사논쟁 중 두번째로 흥미로왔어요(가장 흥미로운 논쟁은 하버마스_놀테 논쟁).
독일은 시민계급이 약해서 절대주의에 가까운 프로이센,제 2제국,나치 등의 독재가 생겼다는 기존의 주장에 맞서 독일도 이미 자본주의의 길은 걸었으며 독일의 특수한 길과 반대되는 정상적인 그런 자본주의 발전이라는 게 있느냐...영국 자본주의라고 순탄했는줄 아느냐고 일갈했는데 어쩐지 이진경이 사과방에서 식민지 반봉건론자를 비판할 때 내세운 주장과 비슷하다고 여겼어요.외국인이 도발적인 문제제기를 했기에 독일역사학계에서 대단한 논쟁이 일어났다는데...우리나라에선 진짜 조용하네요.

로쟈 2008-06-12 23:54   좋아요 0 | URL
그런 대목들을 짚어주는 글을 한번 써보시죠.^^

노이에자이트 2008-06-18 23:52   좋아요 0 | URL
사회사학파(빌레펠트 대학학파)의 구조적 연속론(독일의 시민계급이 약해서 제2제국,나치가 생겼다는 이론)에 대항해서 싸우던 독일 보수파(기민-기사당 지지자)들은 일리ㅡ블랙번의 이론을 대대적으로 환영합니다.진보파(사민당 지지자)인 사회사학파들은 난데없이 같은 편인줄 알았던 좌파에게 얻어맞죠.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너 자이퉁의 문화부장이던 요아힘 페스트는 1982년경 이 신문에 일리-블랙번을 호의적으로 소개합니다.이어 후속편은 1986년 역사논쟁.여기서는 페스트,놀테에게 콜 수상이 편들어 주면서 하버마스와 사회사학파의 거물들을 난타합니다.이때 페스트,놀테는 <나치는 볼세비키를 방어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주장을 내세웁니다.당연히 반공색채가 강한 미국 레이건 정부까지 독일 보수파의 손을 들어주죠.결국 독일 통일로 보수파 승리.역사논쟁은 당파성이 강하다는 걸 증명해주는 사건입니다.

로쟈 2008-06-18 23:58   좋아요 0 | URL
놀테와 역사논쟁은 지젝도 자주 언급하기 때문에 익숙한데, 사회사학파 얘기는 처음 듣습니다. 해서, 댓글로 읽기에는 아까운데요.^^

노이에자이트 2008-06-19 23:26   좋아요 0 | URL
사회사학파의 대표인 한스 울리히 벨러와 위르겐 코카의 책은 국역도 되어 있고 요즘 신문에 글 자주 쓰는 김호기 씨가 빌레펠트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어요.역사가 논쟁 때 벨러는 당연히 하버마스 편에 섰고 보수파인 미하엘 슈티르머(당시 콜 수상 브레인)는 놀테 편에 섰습니다.벨러와 슈티르머는 똑같이 비스마르크 전공인데 벨러는 독재자로 그리고 슈티르머는 사회주의 탄압법을 옹호하는 등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