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언 깅거리치(깅그리치)의 <아무도 읽지 않은 책>(지식의숲, 2008)과 관련하여 마이리스트만 만들어두었는데(http://blog.aladin.co.kr/mramor/2058799), 마침 적당한 리뷰도 있기에 옮겨놓는다. 한 서평대로 '책에 관한 책에 관한 책'이라지만 저자의 품이 상당히 많이 든 책이라는 걸 알 수 있다(가끔씩 만나게 되는 일급 학자들의 전문성과 대중성이 경탄스럽다). ‘위대한 책에 관한 집요한 책에 관한 매혹적인 책’이란 평도 무색하지 않다. 우리 과학사와 관련해서도 이런 책들이 나왔으면 싶다...  

경향신문(08. 04. 26) ‘태양중심설’ 논문에 누가 주석 달았을까

과학비평가 아서 케스틀러는 초기 천문학의 역사를 다룬 베스트셀러 ‘몽유병자들’에서 16세기의 한 논문에 대해 “아무도 읽지 않은 책”이자 “역사상 가장 판매가 신통치 않은 책”이라는 혹평을 남겼다. 이 논문의 이름은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코페르니쿠스가 지구중심설에 의문을 제기하며 태양중심설을 정교하게 설명해놓은 기록이다.

1970년 가을, 근대과학혁명을 불러온 코페르니쿠스의 탄생 500주년 기념행사 준비에 참여하게 된 저자는 문제의 논문이 출간 당시보다 20세기 이후에 더 많이 읽혔을 것이라 추정한다. 태양중심 우주론을 다룬 첫 5%는 “지적으로 즐길 수 있게” 쓰였지만 나머지 95%는 “무시무시할 정도로 전문적”이었기 때문이다. “구입해서 읽고 활용하시기 바랍니다”라는 선전문구가 무색하게도, 당시의 독자로 추정할 수 있는 사람은 케플러·튀코 브라헤·갈릴레이 등 천문학자와 출판업자 9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중 일부는 이 책을 읽지도 않았을 것이 확실했다.

그러던 중 저자는 에든버러 왕립천문대에서 충격적인 책 한권을 만난다. 희귀도서들을 둘러보던 중 그가 발견한 ‘회전…’ 초판본에는 여백 가득히 그림과 글이 적혀있었다. 너무 어려워서 아무도 읽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과 달리 가장 전문적인 뒷부분에 집중적으로 적힌 주석의 주인공은 1540년대 유명 천문학자 에라스무스 라인홀트로 밝혀진다. 이 특별한 책 한권에 홀린 그는 오르후스에서 베이징, 코임브라에서 더블린, 멜버른에서 모스크바, 장크트갈렌에서 샌디에이고까지 수십만 ㎞를 여행하며 도서관을 뒤진다. 성인, 이단자, 불량배, 음악가, 영화배우, 의사, 장서광들이 소유했던 수백권의 초판·재판본들 속의 필체와 제본방식은 그를 미궁에 빠지게도 하고 불타는 연구경쟁 속에 던져넣기도 한다. 결국 그는 놀라운 결론에 도달한다. “아서 케스틀러는 완전히 틀렸다”는 것이었다.



저자인 하버드대 과학사 교수 오언 깅거리치는 자신의 이름이 붙은 소행성을 갖고 있을 정도로 저명한 천문학자다. 그는 30년 동안 600여권의 ‘회전’ 초판·재판본을 찾아냈고 그 결과를 “코페르니쿠스의 ‘회전에 관하여’의 주석에 관한 조사”라는 책으로 펴냈다. ‘아무도 읽지 않은 책’은 이 ‘주석’을 펴내는 과정에 대한 흥미로운 회고록이다. 표지나 여백에 남겨진 필체와 흔적을 통해 책의 원주인과 이동경로를 찾아내는 집요한 조사과정이 박진감 넘치게 그려진다. ‘천문학사 저널’에 실린 서평의 “책에 관한 책에 관한 책”이라는 표현에서 더 나아가 ‘위대한 책에 관한 집요한 책에 관한 매혹적인 책’이라 말해도 될 것 같다.



책 한권에 대한 이 완벽한 연구는 이제 종종 경매에 나온 희귀본이 도난본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데 사용되곤 한다. 책 말미에 ‘회전…’ 초판과 재판본을 소장하고 있는 나라 목록이 나오는데 아쉽게도 우리나라에는 한권도 없다. 이웃나라 일본에는 8권, 중국에 1권이 있다하니 속이 쓰려온다.

08. 04. 26.

P.S. 기사의 서두에서 인용된 아서 케스틀러(Arthur Koestler, 1905-1983)의 얘기는 책의 '들어가는 글'에 들어있다. 국내엔 '아서 케슬러'로 소개되었고 소설 <한낮의 어둠>(한길사, 1982), 과학에세이 <야뉴스>(범양사, 1993) 등이 번역되었다. 그 케슬러가 쓴 "초기 천문학의 역사"가 <몽유병자(The Sleepwalkers)>(1959)라는 것이고, 찾아보니 623쪽의 방대한 분량이다. 그렇다고 해서 한물 간 베스트셀러는 아니고 지난 1990년에 재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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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4-27 01:37   좋아요 0 | URL
케스틀러가 천문학에 관한 책도 썼군요.저는 한낮의 어둠의 작가로만 알았는데...일본인들은 천문학에 관심이 많아서 일본이름이 붙은 별이름도 꽤 된다고 하던데요.그래서 천문학에 관한 희귀본이 많나보죠.

로쟈 2008-04-27 18:38   좋아요 0 | URL
자연과학쪽도 일본은 노벨상 수상자가 여럿 되니까요...

네모선장 2008-04-29 12:32   좋아요 0 | URL
수학분야도 뛰어납니다.
수학의 노벨상 격인 필즈상도 동남아시아권에서는 일본이 세번 중국이 한 번 수상했습니다^^

로쟈 2008-04-29 13:49   좋아요 0 | URL
저도 생각납니다. 일본의 수상자 한 사람이 <학문의 즐거움> 저자였죠...

네모선장 2008-05-01 13:23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히로나카 헤이스케 현재 서울대 수학과에 초빙되어 수업하고 계신걸로 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