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바쁘다는 이유로 페이퍼 거리들을 묵혀두었더니 어떤 것부터 다루어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다. 밀린 일들이 줄어든 건 아니지만 '서재일'도 나름 일인지라 자꾸 신경을 쓰게 되는데, 여건이 되는 대로 하나둘씩 올려놓도록 한다(인문학과 정치철학에 관련된 몇 가지 아이템을 페이퍼로 적어놓으려고 하지만 조만간 시간을 낼 수 있을지는 장담하지 못하겠다). 그 중 하나는 부르디외의 하이데거론에 대한 것이다. 이 하이데거론의 원제는 <하이데거의 정치적 존재론>이지만 <나는 철학자다>(이매진, 2005)라는 다소 엉뚱한 제목으로 소개되었고, 제목을 바꿔단 보람도 없이 거의 묻혀버린 책이다.

  

 

 

 

책을 손에 든 건 개인적인 필요 때문에 부르디외의 몇몇 책들, 가령 <실천이성>(동문선, 2005), <사회학의 문제들>(동문선, 2004), <파스칼적 명상>(동문선, 2001)을 들추게 되면서 덩달아 눈길이 갔기 때문인데(모두 영역본과 같이 읽는다), 최근에는 이 책에 대한 '촌평'을 비판하는 글도 접한 터라 예전에 무얼 어떻게 읽고 촌평을 단 것인지 확인해보려는 뜻도 있다. '하이데거와 함께 철학을!'(http://blog.aladin.co.kr/mramor/1039607)이란 페이퍼에서 나는 이렇게 적었다.

(...) 그리고 부르디외의 하이데거 비판서 <나는 철학자다>(이매진, 2005)도 (원제인) '하이데거의 정치적 존재론' 비판으로 읽어봄 직하다. 한데, 번역서는 읽기에 좀 팍팍하다. 

이 페이퍼 자체는 하이데거의 <철학입문>(까치글방, 2006)이 출간된 걸 계기로 그의 책들과 같이 읽어볼 만한 책들을 꼽아본 것이었고 '최근에 나온 책들'에 대한 소개와 마찬가지로 책에 대한 정보와 간단한 인상 정도를 나열하고 있다. 그런 '인상'이나 '판단'의 근거를 자세하게 밝혀놓지 않은 점이 불만스럽다는 의견도 가능은 하겠지만 전공자들도 하지 않는 유형의 '책소개'를 내가 이런 자리에서 떠안아야 하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spec님의 비판은 이렇다(강조는 내가 해놓았다).  

"관심의 대상이 될 만하다", "매혹적"이다, "하이데거에 대한 상식을 뒤흔들어 놓는다" "차근차근 따라가도 팍팍하거나 멀미나지 않는다" 등등, 느낌들이 이어지지만 이런 느낌을 주게 한 이유, 즉 느낌을 뒷받침하는 알맹이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어 심히 유감입니다. '의견'도 아닌, 그야말로 '인상'인 셈이지요. 더구나 이런 식의 느낌 전달은 독자들에게 훨씬 직접적으로 다가가는 만큼 더 위험하고 심지어 폭력이 될 때도 있습니다.

가령, 부르디외의 <나는 철학자다>에 대한 촌평은 이런 제 생각을 뒷받침해주는군요. 이 "번역서는 읽기에 좀 팍팍하다"! 다행히 제가 이 책만은 불어판과 번역서를 다 읽어보았기 때문에, 과연 불어판을 조금이라도 보시고 하시는 말씀인지 정당하게 여쭐 수 있을 것 같군요. 일단 번역서만 보자면, 제가 보기엔 반대로 가독성이 상당히 높았고 더구나 지금까지 나온 부르디외 번역 중 가장 자연스러운 번역이었습니다. 물론 그래도 여전히 '팍팍하다'라고 '느낄' 수 있겠죠. 그러나 이걸 불어판과 대조해 보십시오. 첫 페이지부터 엄청난 만연체의 글이 시작되며, 이건 그냥 '팍팍한' 정도가 아닙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부르디외의 이 글을 높이 평가하죠. '정신에 대하여'를 쓴 데리다와 더불어 최고의 하이데거론이라고.

그러므로 로쟈님이 말씀하신 '팍팍함'의 정체가 더욱 궁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제 생각에 '팍팍함'은 어떤 책을 평가하는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만일 이게 단지 번역에 해당되는 평가라면, 이 평가는 전혀 정당하지 않습니다. 확신컨데, 이 번역은 오히려 '유려합니다'! (다만 "하이데거의 정치적 존재론"이라는 좋은 제목 놔두고, "나는 철학자다"라는 이상한 한글 제목을 단 것만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아마도 이는 출판부수를 늘리려는 출판사의 농간일 것 같은데, 대중성이라는 미명하에 결국 좋은 책을 사장시키는 작태라 생각됩니다).

먼저, 책소개를 하면서 별다른 근거 없이 주관적인 느낌, 인상들만을 나열하는 것은 "독자들에게 훨씬 직접적으로 다가가는 만큼 더 위험하고 심지어 폭력이 될 때도 있"다는 것. <철학입문>의 경우 ""하이데거가 1928~29년 겨울 학기에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강의한 내용을 수록한 강의록"으로서 지난 1996년 하이데거의 전집 제27권으로 출간되었다는 이 책은 충분히 관심의 대상이 될 만하다(아직 영역본은 나오지 않은 듯하다). '하이데거의 모든 책'이기도 하지만, 게다가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철학 입문' 아닌가?"라고 나는 적었다.

거기서 '관심의 대상이 될 만하다'는 판단의 근거(?)로 내가 제시한 건 첫째, '하이데거의 모든 책'이라는 것, 즉 그의 모든 책이 관심의 대상이 될 만하기에 <철학 입문> 또한 예외가 아니라는 것과 둘째, 게다가 '철학 입문서'라는 것, 그렇기에 하이데거 입문서도 겸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 이 두 가지이다. 이런 근거가 '알맹이'가 아니어서 유감스러울지는 모르겠지만, 과연 '더 위험하고 심지어 폭력'적이기까지 한 것인지? 기껏해야 하이데거의 책이 나왔다는 정보와 함께 읽어볼 만하겠다는 기대를 표시한 게 왜 위험하며 폭력적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독자에게 훨씬 직접적으로 다가가"기 때문에? '하이데거에 대한 상식을 뒤흔들어놓는다'는 어떤가? 

라캉주의자가 되기 이전에 하이데거 전공자였던 지젝의 <까다로운 주체>(도서출판b, 2005). 책의 1장은 '칸트 독자로서의 마르틴 하이데거'를 다루고 있는데, 주로 <존재와 시간>에서의 곤궁을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한길사, 2001)에서 어떻게 극복/회피하려고 했는가를 다루고 있다. 하이데거에 대한 '상식'을 상당 부분 뒤흔들어놓는다.

풀어서 얘기하면 (1)지젝의 하이데거론은 <까다로운 주체>에서 읽을 수 있다. (2)거기서 지젝은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의 곤궁을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를 통해서 어떻게 극복/회피하려고 했는가를 다루고 있다. (3)이는 하이데거에 대한 '상식'을 상당 부분 뒤흔들어놓는다, 정도가 되겠다. 내가 덧붙여 설명하지 않은 것은 '하이데거에 대한 상식'일 텐데, <존재와 시간>이 하이데거의 대표작이면서 철학사의 한 걸작이라는 것 정도가 내가 염두에 둔 것이다(보통은 완벽한 작품을 걸작이라고 일컫는 거 아닌가?). 그런데, 지젝이 말하는 건 '<존재와 시간>의 곤궁'이기에 그러한 상식을 뒤흔든다고 적은 것이고. 물론 더 자세하게 적을 수도 있겠지만,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건 아닐 테다. 하지만 이만큼만 적으면 과연 위험하고도 폭력적인 촌평이 되는 것인지?

이제 부르디외로 돌아와서, "한데, 번역서는 읽기에 좀 팍팍하다."고 나는 적었다. 물론 오해의 소지를 줄이기 위해서 왜 팍팍한지를 적었으면 좋았겠다(이건 나중에 역자도 시간이 좀 지나서 내게 요구했던 사항이었지만 따로 시간을 내질 못했다. 그땐 책도 못 찾았었고). '팍팍하다'는 표현은 '진도가 더디 나간다' 혹은 '읽기가 힘들다'는 뜻으로 적었던 듯한데, spec님의 의견으로는 이 번역서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못된다. 왜냐하면 번역본은 부르디외 번역서들 가운데 가장 자연스러우면서 유려한 번역이기 때문에. 게다가 "이걸 불어판과 대조해 보십시오. 첫 페이지부터 엄청난 만연체의 글이 시작되며, 이건 그냥 '팍팍한' 정도가 아닙니다."(번역본은 어떻게 하여 이 '팍팍한' 책을 유려하게 옮긴 것일까?) 

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부르디외의 이 글을 높이 평가하죠."라고 spec님은 적었다. 요컨대, 부르디외의 하이데거론은 무진장 팍팍한 책이지만 그럼에도 데리다의 <정신에 대하여>와 함께 최고의 하이데거론이라는 것. 여기엔 '팍팍하다'는 평가가, 즉 읽기 힘들다는 느낌이 책 자체의 가치와는 별개의 문제라는 판단이 전제돼 있다. spec님이 읽기에 부르디외의 불어본 하이데거론은 국역본보다 훨씬 더 팍팍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최고의 하이데거론이다, 라는 것이니까. 같은 맥락에서 말하자면 '팍팍하다'는 평 자체는 번역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이나 폄하가 아니다. 좋은 책이지만 읽기는 힘들다는 평가도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불어본을 직접 대조해보지 않았기에 나로선 불어본에 비해서 더 팍팍하다거나 덜 팍팍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고, 단지 "번역서는 읽기에 좀 팍팍하다"고 적었다. 이 또한 위험하며 폭력적일까? 불어본이 어떤 편제로 돼 있는지 모르겠지만, 국역본은 매 페이지마다 각주가 달려 있어서(어떤 경우엔 페이지의 3/4이 각주로 돼 있다) 책이라기보다는 '학술논문'이란 인상을 '팍팍' 준다. 거기에 부르디외가 독어로 인용한 단어들은 모두 우리말 번역 옆에 독어가 병기돼 있고, 불어와 한자어의 병기도 빈번하게 나온다. 어떤 텍스트가 잘 읽히느냐 마느냐는 상대적일 수밖에 없지만 이런 체제의 텍스트를 자연스럽고 유려하게 읽을 수 있다면 상대적으로 나보다 뛰어난 독해력을 갖고 계신 것. 어떤 이에게 수월하게 읽힌다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수월하게 읽히는 건 아니다. 초반부의 한 대목만 다시 읽어본다.    

"장의 효과, 철학적 소우주의 특수한 강제가 철학적 담론 생산에 미치는 효과는 역설적으로 절대적 자율성이라는 가상에 객관적 토대를 마련해준다. 이 가상은 철학 - 즉 철학이라는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장 - 의 보수혁명가인 하이데거의 저작을 좀바르트나 슈판 같은 경제학자들의 저작이나, 슈펭글러나 융거 같은 문필가들의 저작과 비교하는 일을 선험적으로 금지하거나 거부하는 데 활용될 수 있다 -- 흔히들 하이데거를 이 자들과 매우 가까이 놓고 언급하려 들곤 했겠지만, 이것은 오직 '다른 모든 조건이 같다면'이라는 식의 추론이 불가능하지 않은 한에서이다."(12쪽, 강조는 원문)

보통은 이런 대목을 만나면 내용이 머릿속에 정확하게 그려지지 않기 때문에 나는 영어본도 같이 참조한다(이 책은 러시아어로도 번역돼 있지만 아쉽게도 나는 구입해두지 않았다). 이 대목은 이렇게 영역돼 있다: "Paradoxically, the 'field' effect, that is the effect operated on the production of philosophical discourse by the specific constraints of the philosophical microcosm, is just what gives an objective basis to the illusion of absolute autonomy. This effect can be invoked to prohibit or reject a priori any comparison of the work of Heidegger, a conservative revolutionary in philosophy (that is, in the relatively autonomous field of philosophy), with the works of economists like Sombart and Spann or political essayists like Spengler or Junger, who would appear to be temptingly similar to Heidegger, if this were not precisely the kind of case where it is impossible to argue in terms of 'other things being equal'."(강조는 나의 것)  

'장(champ, field)'이란 건 부르디외 고유의 용어다. 상대적 자율성을 갖고 있는 영역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철학 또한 하나의 '장'이다. 때문에 장의 효과, 장으로서의 효과를 갖는다. 그 효과란 철학은 외부(사회)로부터 자율적이라는 환상, 곧 '절대적 자율성'이란 환상에 객관적 토대를 부여해주는 것이다. 그런 내용을 나대로 옮기면, "'장'의 효과, 즉 철학이란 소우주의 특수한 제약들이 철학 담론의 생산에 미치는 효과는 역설적으로, 철학이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영역이라는 환상에 객관적인 토대를 마련해준다."

이어지는 문장의 주어를 국역본은 '이 가상'으로 봤는데, 영역본에 따르면 '이 효과(this effect)'이다(의미상 큰 차이가 벌어지는 건 아니지만). 두번째 문장을 옮기면, "이 효과는 철학, 곧 철학이라는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장에서 '보수혁명가'인 하이데거의 저작들을 좀바르트나 슈판 같은 경제학자들의 저작들과 비교하거나, 다른 조건들이 같다는 조건하에 슈펭글러나 윙어(융거)와 같은 정치 에세이스트들이 하이데거와 유사하다고 말하는 걸 선험적으로 금지하거나 거부하게끔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보통 우리는 철학자의 저작을 경제학자나 에세이스트의 저작과 동급에 놓고 비교하는 걸 금지하거나 거부하는데, 그럴 경우에 철학이란 장이 갖는 '자율성'이 침해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부르디외가 보기에 이건 '환상'이다. 이러한 판단에서 부르디외는 자신의 하이데거 읽기의 방법론을 '이중의 거부' 위에 구축한다(부르디외 사회학의 기본적인 방법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적절한 분석은 이중의 거부 위에 구축된다. 그것은 우선 텍스트를 그것이 생산된 가장 일반적인 상황으로 곧바로 환원해버리려는 시도를 거부한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철학적 텍스트가 절대적 자율성을 지니고 있다는 주장, 또 이 주장과 상관적으로 모든 외적인 참조를 거부하려는 방식 역시 거부한다."(12-13쪽)

"Any adequate analysis must accommodate a dual refusal, rejecting not only any claim of the philosophical text to absolute autonomy, with its concomitant rejection of all external reference, but also any direct reduction of the text to the most general conditions of its production." 

영역본으로 미루어 보아 원문은 한 문장으로 돼 있을 텐데, 역자는 두 문장으로 나누었다. 그건 독자의 가독성은 어느 정도는 고려했다는 의미다. 결과적으로 덜 팍팍하게 읽힌다. 그런 고려를 조금 더 밀고나가면 이렇게 옮길 수도 있을 것이다(영역본의 중역인 만큼 다소간의 편차는 있을 것이다).

"모든 적합한 분석은 이중의 거부를 잘 조화시켜야만 한다. 즉 철학 텍스트를 그 생산의 일반적인 조건들로 막바로 환원시키는 시도를 거부해야 할 뿐만 아니라 철학 텍스트가 절대적 자율성을 갖기 때문에 그 외부와는 전혀 무관하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거부해야 한다." 

이러한 전제하에 부르디외가 제안하는 독해 방법은 이렇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모호성에 따라 규정되는 글, 말하자면 두 정신적 공간에 대응하는 두 사회적 공간에 준거하여 규정되는 글에 대해서는, 철학적 독해와 정치적 독해라는 대립적 구도를 포기하고 이중적 독해, 곧 정치적이면서도 철학적인 독해를 해야만 한다."(13쪽, 강조 원문)

이러한 '이중적 독해'를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가? "나치와 가깝다는 이유로 하이데거 철학을 비난하는 비방자든, 나치참여와 하이데거 철학을 분리시키는 찬양자든 다음과 같은 점을 무시한다는 점에서는 서로 일치한다. 곧 하이데거의 철학이란 철학적 생산장이 강요하는 특수한 검열 때문에, 하이데거를 나치즘에 밀착하게 했던 정치적 윤리적 원리들을 철학적으로 승화시킨 것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는 점 말이다."(14-15쪽, 강조 원문)

여기에 부르디외 하이데거론의 요체가 정리돼 있다. 나치와의 연루를 이유로 그를 거부하는 하이데거 반대자들이나 그의 나치 동조와 철학을 분리키시는 하이데거 옹호자들이 모두 놓치고 있는 점을 자신이 이 책에서 입증해 보이겠다는 것. 그것은 "철학이란 철학적 생산장이 강요하는 특수한 검열 때문에, 하이데거를 나치즘에 밀착하게 했던 정치적 윤리적 원리들을 철학적으로 승화시킨 것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는 점"이다. '불과할 수도 있었다'? 영역은 이렇다: "Heidegger's philosophy might be only a sublimated philosophical version, imposed by the forms of censorship specific to the field of philosophical production, of the political or ethical principles which determined the philosopher's support for Nazism."

부르디외의 입장을 정리하면 이렇다. (1)하이데거의 정치적 혹은 윤리적 원칙은 그를 나치즘에 대한 지지로 이끌었다. 즉, 그의 나치 연루는 우연적인 것이 아니다. (2)하지만 그러한 입장을 철학 담론으로 전개할 수는 없었다. 철학 장의 검열 때문에(프로이트가 말하는 '꿈의 작업'과 마찬가지다. 여기서는 부르디외가 직접 프로이트의 용어를 쓰고 있기도 하고). (3)이러한 곤궁의 타개책으로 하이데거는 자신의 정치적 윤리적 원칙들을 철학적으로 '승화'시켰다. 그렇게 해서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정치적 존재론'으로 재해명된다. 그것이 부르디외가 의도하는 바이다. 다 따라 읽지는 못하더라도 이 정도는 '상식'으로 챙겨둘 만하다...

08. 04. 20.








P.S. 하이데거와 나치즘에 대한 상세한 분석/해명은 박찬국 교수의 연구서를 더불어 참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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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나무 2008-04-21 09:14   좋아요 0 | URL
쏟아져 나오는 책들을 최대한 읽겠다는 읽고 싶다는 읽어야 한다는 욕구나 희망 부담감 따위 전혀 없이 가끔은 심장이 가렵도록 읽고 싶은 책들을 봅니다.이를테면 에밀 시오랑처럼 말입니다. 몇 권의 책을 함께 주문했는데 이번에도 모두 흡족하진 못할지도 모릅니다. 사실 제겐 로쟈님의 페이퍼 이상이 아닌 책들도 많습니다. 저는 가끔 로쟈님의 페이퍼를 옮겨적으며 봅니다. 치매 예방에 좋은 훈련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뀐 그림이 썩 좋네요. 그런데 사진이 아니라 그림인가요? 언제나 그림이 아주 잠깐 비치고 페이퍼로 덮여서 볼 수 없는데 바탕그림을 보는 방법은 없나요? 몹시 헝클어진 새둥우리 같은 남자의 뒷통수를 좀 오래 보고 싶어서요.ㅎㅎ

로쟈 2008-04-21 10:10   좋아요 0 | URL
독일 풍경화가 카스파 프리드리히의 가장 유명한 그림입니다. 국내에 화집도 나와있고요.^^ 수즈달 풍경사진이 가을 것이어서 교체한 것인데, 사이즈들이 다들 안 맞아서 결국 이 그림으로 가게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