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중에 읽어보려고 했던 기사를 시간을 내 옮겨놓는다. 안톤 체홉의 희곡 <세자매> 공연에 대한 리뷰인데, 이번 작품은 특히 이윤택 연출이어서 눈길을 끈다. 공연을 직접 관람할 여유는 없지만 리뷰만으로도 감은 잡아볼 수 있겠다(http://www.culturenews.net/read.asp?title_up_code=004&title_down_code=002&article_num=9160).
컬처뉴스(08. 04. 16) 희망과 절망을 담아낸 통속성
19세기 사실주의 연극의 거장 안톤 체홉은 반복되는 일상에 무기력하게 매몰되어가는 인생의 모습을 특유의 연민어린 시선으로 그려낸 것으로 유명하다. 일면 비극적인 작품으로 ‘오독’되곤 하는 그의 희곡들은, 사소한 것들에 집착해 결국 생의 진수를 놓쳐 버리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폭로한다는 측면에서 일종의 블랙코미디와 같은 강한 희극성을 지니고 있다. 오는 4월20일까지 게릴라 극장에서 공연되는 <세자매>는 선이 굵은 중견 연출가로 이름난 이윤택 씨가, 이러한 원작의 희극성을 증폭시켜 ‘대중통속극’의 맥락으로 재해석한 이색적인 작품이다.
어린 시절을 모스크바에서 보낸 올가, 마샤, 이리나는 장교인 아버지를 따라 러시아 변방에 위치한 작은 소도시로 내려왔다. 예기치 않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더 이상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없었던 이들 자매는, 원치 않은 현실을 견디며 늘 아름다웠던 도시 ‘모스크바’를 꿈꾸며 살아간다. 자신에게 맞지 않은 직장 때문에 늘 갈등하는 맏딸 올가, 결혼하면서 처음 품었던 기대와 너무나 다른 남편의 모습으로 인해 불행해 하는 마샤, 그리고 암울한 현실 가운데서도 꿈꾸기를 단념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막내 이리나의 모습은 실상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다지 낯설지 않은 청춘의 모습이다. 사방이 가로 막혀 있는 갑갑한 현실의 벽 앞에서,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세 자매는 그녀들의 구원으로서 ‘모스크바’를 외친다. 하지만 꿈꾸는 것과,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결단하고 실천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꿈을 꾼다. 견디기 힘든 현실을 견디기 위해서, 혹은 정말 그런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자신이 원하는 삶을 꿈으로 그리며 살아간다. 하지만 거기까지이다. 비루할지언정 너무나 안정되어 버린 일상을 걷어차고,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불안한 미래의 꿈을 이루기 위해 미지의 시간 속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선택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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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한 시간은 흐르고, 1막에서 ‘모스크바’를 외치던 세 자매는 2막과 3막 그리고 4막에서도 여전히 그 곳에 머물러 있다. 교사직을 그만두려고 하던 올가는 교장이 되고, 마샤는 마찬가지로 불행한 결혼 생활로 고통스러워하는 ‘베르시닌’ 중령과 동병상련의 힘겨운 사랑에 빠지며, 이리나는 무의미한 직장 생활에 어떻게든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리고 세 자매에게 희망과 같았던 남동생 ‘안드레이’는 동물적인 본능에 충실한 ‘나타샤’의 유혹에 빠져, 너무 쉽게 교수가 되려던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현실에 안주하고 만다.
그렇게 멈추어 서 있는 세 자매의 삶은 점점 더 감당할 길 없는 가혹한 현실에 질식당해 간다. 오직 자신이 낳은 아이들의 안녕 밖에는 관심이 없는 나타샤에 의해 자신의 방을 빼앗기는 순간, 이리나는 깨닫게 된다. 이제 더 이상 ‘모스크바’를 꿈꿀 수 없다. 정말 그 곳에 갈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렇듯 체홉은 그저 멈추어 서 있었기에 좌절된 꿈을 읊조릴 수밖에 없었던 세 자매의 모습을 통해 역설적으로 말한다. 갔어야 했다. 떠났어야 했다. 더 늦기 전에 결단했어야 했다. 하지만 늘 대개의 인생이 그러하듯 깨달음은 뒤늦게 찾아오고, 일과 기회 그리고 사랑은 어느 덧 희미한 자취만을 남긴 채 추억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꿈이 사라져 버린 공간에 무엇이 남을 수 있을까? 군대의 이동과 함께 텅 비어버린 도시에 남겨진 세 자매 곁에는 속물스런 시의회 의원이 된 안드레이와 이기적인 욕망의 화신으로 변해 버린 그의 아내 나타샤 만 남아있을 뿐이다. 생존 본능을 위한 이해타산에 밝은 나타샤의 세계는 점차 꿈의 흔적을 부여잡고 위태롭게 서 있는 세 자매의 세계를 거침없이 침식해 들어온다. 이런 이유로 서로를 힘겹게 의지한 채 삶의 의미와 미래의 희망을 애써 부르짖는 세 자매의 마지막 모습은 보는 이들의 마음을 더욱 안쓰럽게 만든다.
간다, 간다 하면서도 결국에는 가지 못하고 현실을 맴돌고 주저앉고 마는 허다한 인생의 모습을 섬세한 시선으로 포착해 그린 체홉의 <세자매>에서, 이윤택 연출은 그 이면에서 꿈틀대고 있는 격렬한 욕망을 포착한다. 그리고 그는 원작에 대한 전통적인 접근방식으로서 은유와 절제의 방식을 파하고, 도리어 노골적인 표현 방식으로 등장인물들의 본심을 폭로한다.
당시 사회 통념상 은밀한 방식으로 묘사되었던 나타샤의 유혹은 안드레이를 거의 덮치는 식의 본능에 충실한 모습으로 형상화 되고, 원작에서 서로에 대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고통스러워하는 마샤와 베르시닌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격렬한 키스와 포옹을 주저하지 않는다. 군의 이동으로 인해 무기력하게 떠나는 베르시닌의 등에 뛰어 올라 머리채를 움켜쥐는 마샤의 파격적인 모습은 이전의 어떠한 <세자매> 공연에서도 볼 수 없는 ‘통속적인’ 동시에 한국적인 정한의 표현 방식이었다.
사실 이전의 전통적인 방식의 공연들에서 <세자매>의 등장인물들은 비록 내면에는 인생의 고뇌와 욕망이 꿈틀대고 있을지언정, 겉으로는 세련되고 예의바른 태도로 각자의 진심을 감추곤 했다. 하지만 이윤택 연출은 이런 등장인물들의 모습이 지극히 ‘속물적인’ 보통 사람들의 그것에 다름 아니라고 해석한다. 베르시닌은 불행한 결혼 생활을 감추기 위해 늘 인류나 조국의 미래에 관한 멋진 장광설을 늘어놓는 한심한 사람이며, 그런 베르시닌의 번지르르한 겉모습에 빠진 마샤는 그와 헤어지는 마당에도 자신의 신발을 챙기는, 말 그대로 ‘아줌마’다.
안드레이는 점차 몰락해 가는 집안의 현실은 물론, 아내 나타샤의 공공연한 외도를 애써 외면한 채 다만 안정만을 추구할 뿐이며, 그의 아내 나타샤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주위에 대한 영향력을 장악해 성공하려는 탐욕스런 신자유주의 시대의 화신과 같은 존재이다. 이윤택 씨는 이번 작품을 통해 체홉의 매력이란 지극히 속물적인, 그런 까닭에 우리와 같이 평범한 보통 사람의 희망과 절망, 욕망과 좌절을 담아낼 수 있는 특유의 통속성에 있다고 주장한다.
체홉 작품 특유의 침묵과 절제의 미학을 포기하고, 통속극 방식의 자극과 도발의 독법을 선택한 이윤택 연출의 <세자매>는 분명 쉽고 재미있는 대중적인 작품으로 다시 태어났다. 하지만 그만큼 원작이 지닌 정서, 곧 가고 싶고, 말하고 싶고, 드러내고 싶었지만, 결국 끊임없는 망설임 속에 인생을 놓쳐버린 세 자매의 회한어린 정서는 느끼기 힘들어졌다. 어떤 방식의 해석이 원작 또는 관객의 취향에 보다 적합한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이제 관객의 몫으로 남아있다. 다만 과거 전통적인 방식의 해석과 차별화 된 방식의 새로운 <세자매>가 체홉의 작품 보는 즐거움을 더하게 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한 듯 보인다.(박준용_연극평론가)
08. 04.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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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로렌스 올리비에가 감독한 영화 버전의 <세자매>(1970)는 http://www.youtube.com/watch?v=saiH6HJH2Zw 참조. 도입 장면에서 암시되지만 세자매는 세월에 흐름에 맞서고자 하는 운명의 세 여신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윤택 버전에서는 너무 '속물'로만 그려놓은 것이 아닌가도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