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다룬 바 있다. 그의 책들이 올해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때문이다(http://blog.aladin.co.kr/mramor/1890626).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인간사랑, 2007)에 이어서 <감성의 분할>(도서출판b, 2008)이 연이어 출간됐고 앞으로도 몇 권의 책이 더 소개될 예정인 것으로 안다. 어떤 책들인가 궁금하신 분들은 한겨레의 리뷰를 길잡이 삼아 읽어보실 수 있겠다. 

한겨레(08. 02. 16) '반목의 철학’ 랑시에르의 ‘배제된 자를 위한 정치’

자크 랑시에르(사진)가 국내 지식계에 출몰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이 철학자의 이론은 다른 여러 프랑스 철학자들이 그러하듯이 까다롭고 불친절하다. 익숙한 관념에 매달리는 사고의 관성을 깨뜨려 새로운 생각의 지평을 여는 일은 친절한 방식으로는 될 수 없다고 믿는 듯하다. 흐릿한 안개 속에 겨우 윤곽만 보인 랑시에르의 철학적 사유를 좀더 뚜렷하게 느낄 수 있는 책이 한 달 사이에 잇따라 번역됐다.

먼저 나온 2005년 저작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인간사랑 펴냄)와 이번에 출간된 2000년 저작 〈감성의 분할-미학과 정치〉가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랑시에르 저작들이다. 특히, 프랑스에서 랑시에르를 공부한 오윤성씨가 번역한 〈감성의 분할〉은 옮긴이의 소개문과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발문(‘랑시에르의 교훈’), 그리고 랑시에르 용어 해설을 부록으로 달아, 랑시에르를 이해하는 데 길잡이 구실을 해준다.

1940년 프랑스 식민지 알제리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공부한 랑시에르는 전형적인 ‘68혁명 세대’ 좌파 이론가이자 ‘구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 주창자 루이 알튀세르 문하 출신의 철학자다. 65년 알튀세르가 그의 제자들과 함께 펴낸 〈‘자본’을 읽자〉에 공저자로 참여했던 랑시에르는 68혁명의 열기 속에서 알튀세르를 떠나 프랑스 마오쩌둥주의로 옮겨간다. 그를 유명인사로 만든 사건은 〈알튀세르의 교훈〉(1974) 출간이었다. 이 책에서 그는 알튀세르가 자신의 지적 지배 위치를 지키고 지식 엘리트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에만 관심을 쏟는다고 비난했다. 학문적 부친 살해라 할 이 책을 통해 그는 옛 스승 알튀세르와 떠들썩하게 결별했다. 이런 거침없는 도발 때문에 그는 ‘반목의 철학자’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그의 철학적 사유의 여정은 대체로 ‘정치’와 ‘미학’ 두 단계로 나뉜다. 박사학위 논문인 〈프롤레타리아의 밤〉(1981)에서부터 그의 정치적 사유가 응집된 〈불화〉(1995)까지가 ‘정치’ 단계라면, 96년 이후 문학·영화·예술에 관한 저술들은 ‘미학’ 단계를 이룬다. 이 미학 시기에도 그는 정치철학적 저작들을 몇 권 펴냈는데,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가 그 가운데 하나다. 또 같은 시기에 출간한 〈감성의 분할〉은 부제가 보여주는 대로 미학과 정치를 동시에 주제로 삼은 저작이다.

랑시에르 철학의 독특한 영역은 민주주의와 평등이라는 낯익은 개념을 둘러싼 ‘정치’의 재해석에서 발견된다. 통상 자유주의 정치세계에서 정치는 이해가 상충하는 개인 또는 집단 사이에서 조정을 통해 합의를 끌어내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랑시에르가 보기에 이런 과정은 정치가 아니다. 이미 정치적 주체로 받아들여진 공동체 주체들 사이의 통치 행위일 뿐이다. 그의 용어로, 이런 정치 과정은 기존 사회질서 유지를 목표로 하는 ‘치안’에 해당한다. 진정한 정치 또는 본래의 정치는 ‘배제된 자들의 주체화’에 있다.

이를테면, 프랑스 혁명기에 귀족과 교회의 지배에 대항했던 ‘제3계급’이 그런 주체화 과정을 보여주었으며, 고대 그리스에서 민주주의가 형성되는 과정은 정치의 본래 모습을 처음으로 보여주었다. 귀족계급 또는 과두지배자들에 맞선 ‘데모스’(인민)의 등장이야말로 정치의 탄생이었던 것이다. 주체화란 지배 질서 안에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던 자신들의 존재와 목소리를 보이게 하고 들리게 하는 것, 정치적 대화와 권력의 행사에서 정당한 상대자(파트너)로 서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야말로 랑시에르가 말하는 ‘본래의 정치’다.

〈감성의 분할〉은 그런 정치의 문제를 ‘미학’(감성학)의 엑스레이를 투과해 보여주는 책이다. 여기서 ‘감성’이란 감각되고 감지되는 것, 다시 말해 우리의 오감을 통해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을 가리킨다. 그 감성이 분할된다는 것은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것들이 나뉘어 어떤 부분이 배제된다는 것, 그리하여 존재하기는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는 존재들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랑시에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를 들어 이 문제를 설명한다. “말하는 동물(곧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그러나 노예는 그가 언어를 이해할지라도 그 언어를 ‘소유’하고 있지는 않다.” 노예는 ‘말하는 동물’에서도 ‘정치적 동물’에서도 배제돼 보이지 않는 존재인 것이다. 이 배제를 뚫고 일어서 자신이 언어를 되찾고 자신을 보이는 자리에 세우는 것이 말하자면 랑시에르적 정치다.

지젝은 랑시에르 철학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랑시에르의 사유는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현실적이다. 좌파가 방향감각을 상실한 우리 시대에, 그의 글쓰기는 ‘어떻게 우리는 저항하기를 계속해야 하는가’에 대한 소수의 견실한 개념화들 가운데 한 가지를 제안한다.”(고명섭 기자)

08. 02. 15.

P.S. 서두에 언급된 대로 랑시에르의 이론은 "다른 여러 프랑스 철학자들이 그러하듯이 까다롭고 불친절하다". 무얼 번역한 것인지 의문스러운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는 말할 것도 없지만 <감성의 분할> 또한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 해서 예전에 복사해놓은 영역본(<미학의 정치학>)을 지난주부터 찾았지만 아직도 행방이 묘연하다. 갑갑합을 달래려면 한번 더 복사하든지 해야 할 모양이다(그렇게 되면 세 번 복사하는 것이 된다. 분량은 100여 쪽에 불과하지만).

  

사실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 역시 나는 영어본을 두 번 복사해야 했다. 먼저 복사한 것이 눈에 띄지 않아서였다. 당장 손에 들었을 때 읽고 정리해놓지 않으면 기억과 시야에서 멀어지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지금도 여기저기 뒤적여서야 겨우 영어본을 다시 찾았다. 몇 자 적기 위해서이다.

국역본의 경우 나는 지난달에 30-40쪽 정도 읽다가 덮어버렸다. 교정해가며 읽을 만한 수준도 안된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래서 적은 40자평이 "당신이 무엇을 상상하든지 간에 그 이상의 오역을 읽게 될 것이다!"(http://blog.aladin.co.kr/mramor/1830514)인데 이게 "번역자의 명예와 신망을 훼손하는 게시물"이란 역자의 항의에 따라 블라인드 처리됐다. 알라딘의 방침이 그러하다고 하니 따로 왈가왈부하진 않겠다. 대신에 나대로 대응하는 수밖에 없겠다. 번거로운 일이지만 내 판단의 몇 가지 근거를 나열하는 것이 그 '대응'이다.

'서론'에서 랑시에르는 2001년부터 2005년 사이에 프랑스 사회에서 벌어진 몇 가지 현상들을 나열한다(이 책의 불어본은 2005년에 나왔다). 그 중 하나가 "초등학교는 평준화에 근거한 평범화 교육을 강조하고 있다."(14쪽)이고 영어본에 따르면 이것은 "a Grande Ecole creates an alternative entrance schemes"을 옮긴 것이다. 믿기지 않는 노릇이지만 역자는 'Grande Ecole'을 '초등학교'로 옮긴 것이고 이건 그가 '그랑제콜(그랑제꼴)'이 뭔지도 모른다는 게 된다(불어책을 번역한다는 역자가 어떻게 프랑스 학제의 기본 상식도 모를 수 있는가?). 

알다시피 '그랑제콜'은 '초등학교'이기는커녕 '대학 위의 대학'으로 프랑스의 소수정예 엘리트를 양성하는 기관이다. 그러니 어처구니 없는 오역이지만 나름대로 진실, 무의식적인 진실을 드러내주긴 한다. '그랑제콜' 수준의 책을 '초등학교' 수준으로 번역해놓고 있다는.

내 식으로 다시 옮기면 "한 그랑제콜은 대안적인 입학제도를 도입했다" 정도이다. 그렇게만 적어놓으면 프랑스 독자들은 무슨 말인지 알아먹겠지만 우리에겐 상황 설명이 좀 필요하다. 영어본 주석에 따르면, 2001년초에 정치분야 그랑제콜의 하나인 '씨앙스포(Sciences Po)'가 소외계층 학생들을 위한 새로운(대안적인) 입시안을 도입했다고 한다. '학력' 외에 다른 변수를 고려한 것이고(가령 서울대의 농어촌 특별전형 같은) 랑시에르에 따르면 이러한 '평등에의 요구'들을 사람들은 민주주의와 결부시킨다("이게 다 민주주의 탓이야!"). 물론 이런 정황에 대해 역자가 이해하고 있었을 리는 만무하다. 이어지는 번역이 이렇기 때문이다.

"물론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가 신선한 화두는 아니다. 단순한 존립근거에 기반한 민주주의만큼이나 이에 대한 증오 역시 오랜 세월 쌓여왔다. 그렇기에 이 용어는 생성과 동시에 용어 자체에 증오심이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다."(15쪽)

"Hatred of democracy is certainly nothing new. Indeed it is as old as democracy itself for a simple reason: the word itself is an expression of hatred."(2쪽)

'단순한 존립근거에 기반한 민주주의'? 영어본에 따르면 그저 '단순한 이유'란 뜻이다. 대체 어떤 번역으로 읽는 게 수월한가.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는 분명 새로울 게 없다. 실상 그 증오는 민주주의 자체 만큼이나 오래되었다. 아주 단순한 이유에서 그러한데, 민주주의란 말 자체가 증오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건 그 부연설명인데, 아무리 '번역'이라고 해도 우리가 꼭 이런 식의 한국어 문장을 읽어야겠는가?

"최초에 이 용어는 고대 그리스에서 발명되었는데, 거기에는 극천박한 대중정부에 의해서 정당한 위계질서가 철저히 붕괴되는 것을 목도한 그리스인의 경멸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 용어는 사람의 권능에 비례해서 호칭되고 출신가문에 의해 운명이 결정되었던 사람들의 권한으로부터 탈피하는 것만이 진정한 권력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에 대한 혐오와 동의어로 남아 있다."

"It was, in Ancient Greece, originally used as an insult by those who saw in the unnameable government of multitude the ruin of any legitimate order. It remained synonymous with abomination for everyone who thought that power fell by rights to those whose birth had predestined them to it or whose capabilities called them to it."

영어본에 준해서 다시 옮기면 이렇다: "민주주의(데모크라시)란 말은 고대 그리스에서 원래 다수(데모스)의 정부라는 말도 안되는 정부에서 모든 합법적 질서의 붕괴를 목도한 자들이 일종의 욕으로 사용한 말이다. 권력이란 게 태어날 때부터 운명 지워진 자들이나 그에 걸맞은 역량을 갖춘 자들에게만 속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민주주의란 말은 혐오와 동의어로 남았다."

'익명적 다수'를 뜻하는 'multitude'는 요즘 '다중'(네그리)으로 옮기지만 'unnameable government of multitude'를 그냥 '다수의 정부라는 말도 안되는 정부'라고 풀어서 옮겼다. 민주주의의 비판자들에게 '다수의 지배'는 어불성설이라는 얘기이다(혹은 반대의 경우이긴 하지만, 현재의 대의제 민주주의에 대해 의혹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도 그렇겠다. 민주주의라곤 하지만 실질적으론 과두제 아니냐는). 참고로, 민주주의의의 어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데모스demos는 '사람들(people)' 곧 '어중이떠중이'을 뜻하고 크라토스kratos는 '권력(force, power)을 뜻한다. 그걸 결합한 '데모크라시'란 고대 그리스에서 일종의 '욕'이었다는 것. "에잇, 민주주의 같으니라구!" 

"그런데도 이 용어는 인간 공동체 편재(遍在)의 유일한 합리적 근거로서 인정받는 신성한 율법을 공부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지금까지도 존속하고 있다."(15쪽) "And it still is today for those who construe revelations of divine law as the sole legitimate foundation on which to organize human communities."

역시나 말도 안되는 번역문이다. 불어본 구문이 어떻게 돼 있는지 모르겠지만 영어본은 생략문이다. "it still is today for those who-"라는 건 "it still is synonymous with abomination for those who-"로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신성한 율법을 공부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민주주의란 말이 지금까지도 존속하고 있다고? 이런 엉터리 번역이 계속 존속하는 건 독자들이 "번역자의 명예와 신망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서" 개의치 않기 때문은 아닌가?(그래서 나는 역자들만의 책임이 아니라고 본다. 독자들에게도 방관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 랑시에르의 명예와 신망을 위해서 다시 옮기면 "그리고 민주주의는, 신성한 법의 계시만이 인간 공동체 구성의 유일한 합법적 근거라고 간주하는 자들에겐 여전히 혐오와 동의어이다." 

책의 제목 자체는 이러한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혐오를 염두에 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내용을 번역본에서 간취하기는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몇 걸음도 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에 이어서 민주주의 비판을 다루고 있는 대목.

"역사는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 즉 민주체제에 관한 비판 형국을 경험해 왔다. 민주체제를 비판할 수 있는 권리는 존재했었지만 그 한도는 있게 마련이었다."(15-6쪽) "Alongside this hatred of democracy, history has born witness to the forms of its critique. Critique acknowledges something's existence, but in order to confine it within limits."

번역문은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 즉 민주체제에 대한 비판"이라고 하여 둘을 동일시했지만 '증오'와 '비판'은 구별되어야 한다.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와 함께 역사가 보여주는 건 민주주의 비판의 형태들"이라고 돼 있기 때문이다. "이 비판은 무엇인가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단지 그 한계를 지적하기 위해서이다." 이 비판의 두 가지 형태(양상)만을 더 따라가본다.

"역사적으로 볼 때,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은 이 체제의 두 가지 주요 양상을 혹평한 것이다. 거부할 수 없는 실세로 인정받고 있던 민주주의와 타협하길 원하던 귀족출신 의원들 및 학자들의 계략이 그 한 양상이다. 또 다른 양상은 미국 헌법제정에 관한 것인데, 이는 민주주의라는 실제로부터 짜낼 수 있는 최선의 개념 추출을 지향하는 제도적 메커니즘의 전형으로서, 추출된 개념의 균형과 그 효력 배합작업의 전형을 의미한다. 이렇게 추출된 개념 모두 두 가지 축을 보존하기 위해서 엄정한 심사를 거친 후에 미국 헌법의 토대를 이루었는데, 양대 축이란 최선정부(best government)와 소유자 위계질서의 수호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16쪽)

번역문에 따르면 이 두 가지 형태(양상)가 '귀족출신 의원들 및 학자들의 계략'과 '미국 헌법제정에 관한 것'으로 돼 있지만 마르크스로 대표되는 두번째 비판의 형태의 아직 언급되지도 않았다. 인용문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건 전체가 한 가지 '양상'인 것이다. 이런 번역에서 대체 무얼 읽으라는 것인가? 역자는 '최소한의 성의도 인정하지 않는' 40자서평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던 듯한데 내가 생각하는 '최소한의 성의'는 '엄정한 심사를 거친 후에' 이런 함량 미달의 번역서는 내지 않는 것이다. 인용문을 영어본으로라도 다시 읽어보면 이렇다.

"There have been two great historical forms of critique of democracy. There was the art of aristocratic legislators and experts who strove to make a compromise with democracy, viewed as a fact that could not be ignored. The drawing up of the United States constitution is the classic example of this work of composing forces and of balancing institutional mechanisms intended to get the most possible out of the fact of democracy, all the while strictly containing it in order to protect two goods taken as synonymous: the government of the best, and the preservation of the order of property."(2쪽)

문장이 조금 길어서 얼핏 난해해보이지만 국역본처럼 난감하지는 않다. 다시 옮기면 "민주주의 비판에는 역사적으로 두 가지 큰 줄기가 있어 왔다. 먼저 귀족주의적 입법자들과 전문가들의 술수가 있는데, 그들은 민주주의를 무시할 수 없는 현실로 보고 그와 타협하려고 애썼다. 미국 헌법의 제정은 민주주의라는 현실로부터 최대치를 얻어내고자 권력들을 조직하고 공공 기구들간의 균형을 맞추면서 한편으론 서로 동의어로 간주되는 '최선의 정부'와 '소유권 질서의 보존'이라는 두 가지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 민주주의를 엄격하게 한정한 고전적인 예이다."

'민주주의라는 현실'로 옮긴 'the fact of democracy'란 말은 '주어진 현실로서의 민주주의'란 뜻으로 나는 이해한다. 요는 미국식 민주주의의 경우 민주주의의 최대치를 보장하는 듯하지만 한편으론 그것을 더 큰 가치(재산)의 보호를 위해 제약하고 있다는 것. 민주주의 비판은 이런 식으로 민주주의의 존재 자체, 즉 그것의 부인할 수 없는 현실성과 대세는 인정하지만, 그 인정은 동시에 민주주의의 한계에 대한 지적과 제약의 필요성으로 귀결된다. 해서 "민주주의는 이론적으로 좋은 제도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라는 구문이 민주주의 비판의 전형적인 틀이 되겠다(알다시피 유신 정권이 내세운 '토착적 민주주의'도 이와 동일한 구문과 논리를 갖고 있었다). 번역문에서 이러한 내용을 읽을 수 있는지 지극히 의심스럽다. 한 대목만 더 읽어본다.

"이같은 구도 속에서 행해진 민주체제에 관한 비판은 성공을 거두었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반민주주의 세력의 성공 자양분이 되어왔던 것이다. 젊은 마르크스는 공화주의 체제의 기본 원리인 소유권 지배구조를 파헤치는 작업에 거리낌이 없었다. 게다가 공화국 의원들 누구도 이 사실을 은폐할 수 없었다. 여하튼 마르크스는 지금도 소진되지 않고 있는 한 표준 이념을 확립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는 형식에 얽매인 민주주의의 법과 제도가 부르주아 계급의 권력행사 매개체에 불과하며, 이런 영향력 하에서 법과 제도는 겉치레에 불과하다고 파악했었다."(16쪽)

"The success of that critique en acte naturally fuelled the success of its contrary. The young Marx had no troubles exposing the reign of property lying at the foundation of the republican constitution. The republican legislators had made no secret of it. But in so doing he was able to set a standard of thought whose resources have not yet been exhausted: the notion that laws and institutions of formal democracy are appearances under which, and instruments by which, the power of the bourgeois class is exercised."(2-3쪽)

민주주의에 대한 또 다른 비판자는 청년 마르크스이다. 미국식 민주주의 혹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성공은 다른 한편으로 마르크스의 민주주의 비판을 유효하게 만들었다는 것. 'critique en acte'는 'critique in action'의 뜻으로 보인다. '진행/작동중인 비판' 정도일까.

다시 옮기면, "이러한 실효적 비판의 성공은 자연스레 그 반대파의 성공을 가져왔다. 청년 마르크스는 공화주의 체제의 토대에 소유권의 지배가 놓여 있음을 손쉽게 폭로할 수 있었다. 공화주의 입법자들은 그러한 점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마르크스는 한 가지 표준적인 사상을 정립할 수 있었고 이 사상의 원천은 아직도 고갈되지 않았다. 그것은 형식적 민주주의의 법과 제도는 단지 외양일 뿐이고, 그러한 외양 아래서 혹은 그러한 외양을 통해서 부르주아 계급의 권력이 관철되고 있다는 사상이다."

마저 읽어본다. "자유와 평등의 민주주의가 더 이상 국가 및 법에 근거한 체제를 대표하지 못했을 때 겉치레에 대한 투쟁은 '진정한' 민주주의를 향한 방안이 되었지만, 감각적 경험법칙과 금전본위의 생활양식에 의해서 민주주의는 정형화되었다."(17쪽) "The struggle against appearances thus became the path leading to 'real' democracy, where liberty and equality would no longer be represented in the institutions of law and State but embodied in the very forms of concrete life and sensible experience."(3쪽)

비교해서 읽어보면 알겠지만 국역본의 번역은 한마디로 넌센스다. '감각적 경험법칙과 금전본위의 생활양식'? 여기서 제시되는 '진정한 민주주의' 상을 과연 독자가 읽어내는 게 가능한 것인지? 다시 옮기면, "외양만의 형식적 민주주의에 대한 투쟁은 그리하여 '진정한' 민주주의로 가는 길이 되었다. 진정한 민주주의에서라면 자유와 평등은 더이상 법제도나 국가에 의해서 대표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과 감각적 경험 자체를 통해서 구현될 것이다."    

여기까지가 영어본으로 치자면 서론의 두 문단이고, 분량으론 한 페이지 반 정도이다. 국역본은 시종 이런 식이니 어떻게 읽을 수 있겠는가?(오역학의 교재로서는 아주 유용하겠다.) 바로 이어지는 문단의 첫문장만 읽어본다. "이 책의 화두 민주주의에 대한 미숙한 증오는 민주체제의 어떤 모델에 대해서도 관대하게 기술하진 않을 것이다. 비록 각각의 증오들이 어색하게 결부되어 있을지라도." 대체 무슨 소리인가? 당신은 이해할 수 있는가? 역자는 이런 문장에 '자신의 명예와 신망'을 걸 수 있는가?

영어본의 문장으론 "The new hatred of democracy that is the subject of this book does not strictly fall under either these model, though it combines elements borrowed from both."이다. 다시 옮기면, "이 책의 주제인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증오'는 엄격하게 말하면 이 두 가지 모델에 다 들어맞지 않는다. 비록 그 두 모델로부터 빌려온 요소들을 결합하고는 있지만 말이다." 정도이고.

번역에 대한 새로운 증오가 솟구치기 전에 그만 적어야겠다(이후에도 각종 난이도의 오역들이 속출한다). 이런 식의 번역이라면 어떤 독자라도 관대하게 평하기 어려울 것이다(*알라딘 관계자가 전한 역자의 말은 진의와 다르다고 하여 삭제함). 그냥 이 정도 번역이면 아직까지는 괜찮다는 것인가?..

08. 02. 15-16.

P.S. 이 페이퍼 또한 역자의 요구에 따라 책소개 페이지에서 '삭제'되었다. 입에 쓰면 뱉는다는 식인가 보다. 상식이 있다면 눈 가리고 아웅하기 이전에 시중에 나와 있는 책들을 전량 수거해서 폐기처분하고 개역판을 내야 한다는 게 나의 '몰상식한'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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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 / 02 / 29
    from Le mai 3 : The R Review 2008-02-29 21:20 
    방학동안 한 일이라곤 Monthly Review에서 몇몇 에세이를 들여다 본 것과, 자크 랑시에르의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를 영어로 조금씩 들떠본 것 밖에는 없다. 당장 오늘이 지나면 3월인데, 정말 손에 꼽을 만큼 한 일이 없다. 푸념은 이제 그만하고. 오늘 랑시에르의 책을 읽다가 도저히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럴 것 같아서 영어판을 비싼 돈 주고(!) 사 두긴 했지만, 최소한 어느 정도는 말이 되게 번역했겠지 싶은 마음이 조금은 있었다..
 
 
xnekans 2008-02-16 0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책이 나왔다기에 서점에서 살펴보다가, 책의 어느 부분에서 Ulrich Beck을 얼리치 벡이라고 적어놓은 것을 보고 바로 던져두고 왔더랍니다. ㅎ 원래 저렇게 읽는 건가, 순간 자신없어지기도 했지만... ㅎ <감성의 분할>도 읽으면 읽을수록 미심쩍은 순간들이 종종 있더군요. 결국은 이러나저러나 영어본을 꺼낼 수밖에 없겠더군요. 후.

로쟈 2008-02-16 11:08   좋아요 0 | URL
색인에는 없어서 몰랐는데, '얼리치 벡'이라니 우습군요. '얼치기 번역'의 여러 징후들이라고 할 밖에요...

안용태 2008-08-20 0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책이 저렇게 오역 투성일 줄이야. 정말 관심이 많은책이라 사서봤었는데 도저히 이해가 안가서 걍 내 무식을 탓하며 접었더랬죠.

근데 저런 오역이 문제였다니... 쩝... 할말이 없군요.

그랑제꼴을 초등학교로 옮긴부분 할말을 잃었습니다. 그랑제꼴이 어떤곳인지는 정말 먼나라 이웃나라만 열심히 봤더라도 다 아는 사실인데..

알라딘에서 저 책 소개엔 로쟈님 글이 안보이던데 블라인드 처리했을줄이야..

조금만 이글을 더 빨리봤더라면 국역본을 안사고 걍 영어본을 샀을텐데요..

로쟈 2008-08-20 07:53   좋아요 0 | URL
너무 늦게 보셨군요.^^; 참고로, 더 자세한 번역비평은 람혼님의 서재에 있습니다...

바르타쉐비치 2010-01-09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학동안 랑씨에르를 탐독할려고... "감성의 분할","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무지한 스승", 문학의 정치","미학 안의 불편함"을 모조리 샀답니다. '감성의 분할"을 20장도 채 읽지 못하고... "문학의 정치"를 펴 들었는데 그것도 마찬가지였어요. 그저 나의 무지 탓이려니 하다가... 아침에 로쟈님 검색창에 랑씨에르를 쳤더니... 이런 글들이 있네요.
물려 달라고 해야하나... 그래도 아직 못 펼쳐 본 책에 희망을 가져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