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한겨레21에서 강준만 교수의 칼럼을 옮겨놓는다. 며칠 눈감고 있어서 궁금하기도 했지만 속 편했던 '한국 시사'를 따라잡기 위해 언론 사이트들을 둘러보다가 읽게 된 글이다(http://h21.hani.co.kr/section-021128000/2008/01/021128000200801310696017.html). 역시나 뉴스거리들은 차고 넘치는 나라가 한국인 것 같고 다른 기사들까지 정리할 엄두도 나지 않아서(굳이 '정리'해야 할 이유도 없지만) 그냥 이 칼럼 정도만 '사회적 독서'에 올려놓는다(아직 알라딘에 퍼온 분들도 없고 해서). 돌아오는 기내에서 읽은 국내신문들에서 '영어 몰입'에 대한 유익한 비판칼럼들도 옮겨올 만하지만 좀 뜸을 들일 생각이다. '한국 시사'에 가장 강한 강준만의 칼럼은 역시나 대단히 한국적인 '댓글 문화'에 칼을 대고 있다. 우리의 '실생활'이기도 하므로 일독해봄 직하다. 개인적으로 '악플' 때문에 고생한 적은 없으나(비정규직 강사가 '유명세'까지 치른다면 너무 가혹한 일이다) 불미스런 기억들은 몇 되기에 나름으로 '실감'나는 기사이기도 하다.
한겨레21(08. 01. 31) 댓글 민주주의에 대한 착각
한국의 ‘댓글 문화’는 악명이 높다. 물론 ‘악플’ 때문이다. 악플이 범람하는 이유에 대해선 설이 분분하지만, 그것이 지극히 한국적 현상이라는 데엔 이견이 없다. 한국 대학의 한 외국인 교수는 한국의 ‘댓글 문화’는 서방 국가가 200년에 걸쳐 이룬 민주주의를 50년 만에 압축 도입하면서 계층·세력 간에 형성된 ‘뒤집기 문화’에서 연유한다며 ‘내 이름’으로 책임지는 문화를 가진 선진국에는 한국처럼 무분별한 댓글 문화는 없다고 비판했다.
소속 집단 중심의 연대 ‘마을 의식’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노르웨이 오슬로대학 교수 박노자가 최근에 출간한 <박노자의 만감일기>에서 한국 특유의 ‘관계 문화’를 지목한 게 더 가슴에 와닿는다. 그는 가족이든 동창이든 친한 지인이든 정말 ‘관계’가 있는 사이라면 한국인만큼 잘해주는 사람은 없으며,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대면해서 이야기하는 경우라면 ‘상대방’이라는 ‘관계’가 성립되니까 속마음이야 어떻든 간에 일단 얌전한 척이라도 한다고 했다. 맞다. 누구든 동의할 수 있는 한국인의 유별난 특성이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밀물이 있으면 그만큼 썰물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 특성은 완전한 타인들이 익명으로 서로 접촉하는 인터넷이라면 바로 정반대가 된다는 게 박노자의 분석이다. 그는 이런 성향을 ‘마을 의식’으로 부르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기 마을 안에서는 예의범절을 다 챙기지만, 바깥에 나가면 속을 풀대로 푸는 전근대적 ‘소속 소집단 중심의 사회적 연대’인 셈이다. 글쎄, 나 같은 사람들은 ‘민족주의’ 등의 거대 담론들을 자꾸 문제 삼지만, ‘우리’에게 더욱 중요한 범주는 사실 무슨 ‘민족’보다도 이 ‘마을’(가족, 동창 집단, 친구 등 가까운 사람들)인 듯하다.”
골수 악플러들이 일상에서는 자기 주장이 강하지 않고 소심한 편이라는 조사 결과는 이 분석의 설득력을 높여준다. 신촌세브란스병원 정신과 교수 남궁기는 “상사의 불합리한 주문에는 순응하는 듯하다가 자기보다 힘이 약한 후배의 말에는 버럭 화를 내는 사람처럼, 특정 환경에서 평균 이상으로 공격성을 표출하는 사람은 ‘악플’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고 했다. 이 또한 악플이 현실의 결핍에 대한 분풀이 또는 보상심리의 산물이라는 걸 말해준다.
박노자가 지적한 ‘마을 의식’은 댓글 문화뿐만 아니라 한국 정치의 작동 방식도 설명해준다. 왜 한국 정당들의 수명은 포장마차 수명보다 짧은가? 왜 한국 정치인들은 자주 철새떼나 들쥐떼가 되는가? 왜 선량한 보통 사람들은 정치 참여만 했다 하면 무조건적 열성 지지자로 변하며, 왜 또 그들 중 일부는 반대파 처단에 앞장서는 홍위병 흉내를 내지 못해 안달하는가? 이 물음들에는 ‘마을 의식’이 좋은 답이 될 것 같다.
소설가 조선희가 수년 전 ‘악취 진동하는 사이버 토론장’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온라인 공간이 “한국 정치의 드잡이 난투극을 그대로 닮아가면서 토론 문화의 첨단이 아니라 게토가 되어버렸으며, 오히려 오프라인 시절의 토론 수업 교양 과정을 훌쩍 월반해 최소한 게임의 룰조차 실종된 흑색선전과 편가르기와 극단적 주의·주장의 거점이 되어버”렸다고 개탄한 것도 바로 그런 ‘마을 의식’에 대한 고발이 아니고 무엇이랴. 조선희는 “‘욕설·비속어·인신공격’ 글이 횡행하지 못하도록 엄격히 수질 관리를 하든가, 게시판이나 댓글 공간을 관리 가능한 만큼 줄이던가, 그것이 아니라면 쌍방향 소통의 대의를 당분간 접고 온라인 토론 공간을 폐쇄하는 고육지책이 필요할는지 모른다”고 했는데, 지금까지 그 어느 것 하나도 이뤄지지 않았다.
‘첨단’ 인터넷에 주눅들다
왜 그럴까? 왜 우리는 악플에 너그러운가? 이 물음에는 최영재 한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가 답을 제시한 바 있다. 그는 댓글이 특정 여론의 움직임을 읽게 하는 지표 구실을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합리와 이성, 절도가 없는 댓글의 폐해는 정도가 지나쳐 건전한 여론 형성 과정을 망가뜨리고 있다”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인터넷 강박증에 눌려버린 언론들은 댓글이 불러올 수 있는 민주주의 파괴 현상에 대한 성찰이 부족했고, 애써 눈을 돌리기도 했다. 세계적인 권위지라는 미국 <워싱턴포스트>와 <뉴욕타임스>의 인터넷판은 현재 기사에 대한 댓글 제도가 없다. 한때 기사 댓글을 운영했지만 쓰레기 글들이 너무 많이 올라와 명예훼손이나 프라이버시 침해와 같은 법적인 문제가 제기되자 폐지했다. 절제가 없는 의견은 시민 여론의 자격이 없다는 것이 기사 댓글 폐지의 이유이다. …언론은 댓글 민주주의에 대한 착각과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기사 댓글을 과감히 폐지하고 제대로 된 시민의 추임새를 들을 수 있는 토론 광장을 활성화하자.”
언론의 ‘인터넷 강박증’이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터넷에 대해 주눅이 들어 있는 ‘인터넷 콤플렉스’라고 해도 좋겠다. 텔레비전을 시청하지 않는다고 해서 ‘텔레비전 맹(盲)’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오히려 수준이 높다고 본다. 그러나 인터넷을 하지 않으면 ‘인터넷 맹’이라고 한다. 시대에 뒤떨어진 부적응자로 본다. 인터넷은 첨단을 상징한다. 모두 다 주눅이 들어 있다. 어느 정도인가? 명예훼손이나 프라이버시 침해와 같은 법적인 문제조차 눌러버릴 정도다.
최근엔 좀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있기도 하지만, 그간 언론은 악플 피해자들이 법에 호소하는 방법도 있다고 말은 하면서도 “악플의 상처에서 벗어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둔감해지는 것이다”라는 식의 조언을 많이 해왔다. “피해를 당하면 극히 일부 미성숙한 아이나 열등한 성인의 행동으로 치부하고 스스로를 달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라는 조언이 제시되기도 했다. 이런 기사엔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악플을 다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객관화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신경정신과 의사의 조언까지 곁들여진다.
이런 이야기를 듣다 보면 한국에선 어느 영역에서건 이름깨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한 첫 번째 자질은 ‘악플을 참아내는 법’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왜 그럴까? 무언가 또 다른 이유도 있는 게 아닐까? 문화평론가 강명석은 언론은 때론 악플러를 비난하지만, 대부분은 실질적으로 공생관계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터넷에서 악플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그것이 개개인의 윤리적·도덕적 판단뿐만 아니라 그들을 통해 수익을 얻는 언론매체,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들을 통해 방문자를 끌어들이는 포털 사이트의 문제와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즉, 악플의 문제는 단지 개개인의 인격적인 문제로만 치부할 것이 아니다. 이는 어떤 방법으로든 ‘주목’을 받아야 살아남는 포털 사이트와 그 속에서 활동하는 언론매체가 얽혀 있는 산업적인 문제다. 이것이 단지 몇몇 비정상적인 악플러들만을 비난할 수 있는 문제일까.”
인터넷 강박증, 인터넷 콤플렉스
한국을 가리켜 ‘인터넷 강국’이라고 한다. 껍데기만 그럴 뿐이지만, 그 껍데기조차 그런 ‘인터넷 콤플렉스’와 ‘인터넷 상업주의’를 먹고 자란 것이다. 웬만한 나라에선 법적인 문제 때문에 불가능했을 일이 한국에선 마구잡이로 저질러져도 아무런 법적 제재를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찬사를 받기까지 했다. 한국 인터넷의 ‘도덕적 해이’에 대한 관용은 ‘새것’과 ‘첨단’과 ‘세계 최고’에 걸신 들린 한국인들의 굶주림과 무관치 않다. 여기에 자유주의적 착각과 진보주의적 착각이 가세했다.
자유주의적 착각은 ‘표현의 자유’가 억압당했던 과거에 대한 반작용에서 비롯된다. 악플의 폐해가 아무리 심각하다 해도 그걸 통제하는 것보다는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에서 얻을 게 더 많다는 논리다. 권력감시, 내부고발, 창의력 발휘 등의 장점이 열거된다. 대놓고 말은 않지만, 이게 명예훼손이나 프라이버시 침해와 같은 문제보다 더 중요하다는 식이다. ‘흑색선전과 편가르기와 극단적 주의·주장’의 사회적 비용은 잘 거론되지 않는다. 거론된다 해도 ‘분열과 혼란은 민주주의 꽃’이라는 원론이 답으로 준비돼 있다.
내가 궁금한 건 국가보안법을 철폐하고, 내부고발자를 보호하는 법을 제대로 만들고, 모든 공적 영역을 투명하게 만드는 법과 규칙을 완비하는 노력이 기울여지지 않는 가운데, 왜 그런 기능을 인터넷으로 대체하려는가 하는 점이다. 아니 인터넷을 그런 노력에 이용해야 할 텐데 과연 그게 이루어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진보주의적 착각은 기존 거대 매체를 보수 세력이 사실상 장악했던 과거와 비교해 인터넷을 진보세력의 대안매체로 보는 시각에서 비롯된다. 일종의 이념적 ‘편가르기’ 논리가 인터넷에 적용된 셈이다. 실제로 ‘인터넷 실명제’만 하더라도 찬성하는 측은 대부분 보수파였고, 반대하는 측은 대부분 진보파였다.
초기엔 인터넷이 진보세력의 대안매체였을지 모르지만, 인터넷이 점점 더 돈이 되는 산업으로 커가면서 이제 그건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옛날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특히 노무현 정권이 보수 신문에 대한 견제 매체로 인터넷을 택해 큰 공을 들이면서 포털과 밀월 관계를 누린 건 정권 교체와 함께 부메랑이자 자충수가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럼에도 습관과 관성 때문인지 아직도 인터넷에 대한 진보주의적 착각이 횡행하고 있다.
‘배설물’ 염두에 두고 자기 검열하는 지식인들
지난 2006년 8월 전 미국 부통령 앨 고어는 영국 에든버러 국제TV 페스티벌에서 행한 연설에서 “권력과 돈으로 인한 미디어 통제 때문에 민주주의가 큰 위협을 받고 있으며 해결책은 인터넷뿐입니다”라고 주장했다. 반의 반쪽짜리 진실일 뿐이다. 기존 미디어 재벌들이 앞 다투어 인터넷 매체들을 사냥해온 건 보지도 못했나? 언제건 권력과 돈이 없는 사람이나 세력이 쉽게 생산자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인터넷의 매력은 여전하지만, ‘쏠림’ 현상을 그 속성으로 삼는 인터넷 공간에서 그 가능성의 실질적 가치는 상징적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인터넷을 포기하자는 것도 아니고 강력 통제하자는 것도 아니다. 거대 담론적 가치를 앞세워 인터넷의 ‘표현의 자유’를 무작정 예찬해온 자유주의·진보세력의 자세가 과연 옳은 것이었는지 한 번 더 생각해보자는 뜻이다. 예컨대, 악플의 ‘표현의 자유’엔 너그러우면서 그로 인해 박탈되는 다른 ‘표현의 자유’엔 무관심했던 건 아닌가? 악플이 지식인의 자기 검열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아 오히려 공론을 위협하는 결과를 낳은 건 아닌가?
윤태진 연세대 영상대학원 교수는 “지인 한 명이 칼럼을 쓴 뒤 느꼈던 참담함을 사석에서 토로한 적이 있었다. 인터넷 게시판의 악의적인 댓글들 때문이었다. 그는 왜 정당하지 않은 비난과 욕을 감내하면서까지 자기가 글을 써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푸념했다. 그냥 무시하라고 위로했지만, 그도 사람인지라 그 불쾌감이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공감하고 칭찬하리라 기대하며 글을 싣는 이는 없게 마련이다. 하지만 욕설과 비꼼, 비방과 인격적 모독으로 가득 찬 댓글은 글 쓰는 이들 대부분의 힘을 쏙 빠지게 한다”고 했다.
그래도 힘을 쏙 빠지게 하는 건 다행이다. 아예 글을 안 쓰려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다. 글을 쓰더라도 논쟁적인 글은 피하려고 한다. 실제로 어느 언론매체에도 기사화되진 않지만, 시사적인 글을 쓰는 많은 지식인들이 인터넷에서 튀기는 ‘배설물’ 세례를 염두에 두고 자기 검열을 하고 있다. 물론 그런 ‘배설물’에 전혀 개의치 않고 자기의 소신을 더 세게 밀고 나가는 지식인도 있지만, 그것도 문제다. 아주 독하거나 상처받지 않는 기계적 인간들만 제 목소리를 내고, 나머지 대다수가 ‘배설물’을 피하려는 글만 쓰려고 하는 공공 커뮤니케이션 시장이 건강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악플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건, 한국 사회에 만연한 ‘인터넷 콤플렉스’만큼은 다시 생각해보면 좋겠다.
‘내 이름’으로 책임져도 될 일
이 글의 첫머리에 소개한, ‘내 이름’으로 책임지는 문화를 가진 선진국에는 한국처럼 무분별한 댓글 문화는 없다는 비판엔 불편하게 여겨지는 점이 있다. ‘내 이름’으로 책임지는 문화를 가질 수 없었던 독재정권 시절의 아픈 과거가 떠오르며, 아직 그 상흔이 다 치유된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이름’으로 책임져도 될 만한 일까지 자꾸 역사적 상흔을 앞세우거나, 다른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한 익명성의 예외적인 사회적 가치를 앞세워, 계속 익명성의 보호막에 안주케 하는 건 우리 모두를 위해 이제 더 이상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기존 댓글 문화의 장점도 생각하는 동시에 그 사회적 기회비용에도 눈을 돌려보자.
08. 02. 03.
P.S. <박노자의 만감일기>에 대한 표정훈의 리뷰는 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32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