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루스트와 신경과학

며칠 매달렸던 일이 끝나서 30분 정도 쉬기로(놀기로?) 했다. 그래봐야 도서관에서 새로운 책을 몇 권 대출하고 서재에 새로 페이퍼를 올리는 것 정도이지만. '만남'이 오늘의 화제인 듯해서 컬처뉴스의 한 칼럼기사도 옮겨놓는다. 조나 레러의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지호, 2007)는 지난달에 소개 페이퍼를 올려놓기도 했는데, 그동안 책상에 올려놓고 아직 펴보지도 못한 책이다. 막간에 리뷰를 하나 더 읽어둔다.

컬처뉴스(08. 01. 16) 예술과 과학의 매혹적인 만남

우리는 감각을 통해 살아 있음을 느낀다. 보고 듣고 맛보고 만지는 행위를 통해 세상과 접촉하고 타인을 인식하면서 자아를 형성해간다. 우리가 인식하는 세상의 모습은 일차적으로 우리의 감각계가 작동하는 방식에 달려 있다. 그래서 우리의 세상은 감각계가 우리와 다르게 작동하는 동물들의 세상과 다르다. 외계 지성이 존재한다면 그들이 인식하는 세상의 모습도 분명 우리와 다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식하는 세상의 모습을 흥미롭게 재구성하기도 한다. 예술 활동이 대표적인 예이다. 예술을 통해 우리는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을 배울 뿐만 아니라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고 이상적인 미를 구현해낸다. 이것 역시 감각 기관의 지배를 받는다. 우리 인간들에게 새의 소리가 아름답게 들리고 나비의 무늬가 매혹적으로 보이는 것은 순전히 우연의 일이다. 아서 클라크의 SF 소설 『유년기의 끝』에서 오버로드 종족이 인간의 음악을 들으며 당혹해하는 것은 바로 그들의 감각이 우리와 다르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세상이 유기체의 감각 기관의 작동 방식에 따라 달리 인식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세상이 객관적인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 의해 ‘구성’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예술은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가 된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예술의 본분이 인간 외부에 존재하는 자연을 충실하게 묘사하는 것이라 믿어왔다. 하지만 19세기 중반 과학적 사고가 사회과학의 방법론에 파고들면서 역으로 예술가들은 인간의 심리적 내부, 주관적인 세계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당대의 대중들은 이런 예술에 놀라워하고 일부는 혐오감마저 드러냈지만 역사는 결국 이들 예술가의 판단이 옳았음을 보여준다. 세상은 주관적으로 경험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예술과 과학이 흥미진진하게 만난다. 지난 2-30년 동안 신경과학이 놀라울 정도로 발전하면서 우리의 인식의 비밀이 하나둘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실험 장비가 개선되고 실험 방식이 정교해지면서 이제 우리는 인간의 뇌가 어떻게 보고 듣고 느끼는지, 그리고 이런 감각자료들이 어떻게 종합적인 인식으로 구성되는지 상당히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결과 인간의 인식이 본질적으로 주관적인 양상을 띤다는 사실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모더니즘 예술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통해 드러냈던 경험의 양상이 과학에 의해 하나씩 입증되고 있는 것이다. 조나 레러의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는 바로 인간의 인식의 비밀을 두고 예술과 과학이 어떻게 서로 조응되는지를 흥미롭게 파헤친 책이다.

감각과 인식의 선구자들
어렵고 따분한 줄로만 알았던 신경과학이 가장 역동적이고 흥미진진한 학문 분야로 떠오를 날이 올 줄 누가 알았으랴. 인간의 뇌의 미묘한 비밀을 밝혀내는 신경과학은 올리버 색스라는 스타급 필자를 낳으며 흥미로운 책들을 쏟아내고 있다. 이 책의 저자 조나 레러도 만만치 않다. 대학에서 신경과학과 문학을 전공한 저자는 인문학적 사유와 과학적 데이터를 오가며 우리를 인간 두뇌의 내밀한 세계로 안내한다.

이 책에는 모두 여덟 명의 예술가들이 등장한다. 다들 고정관념을 깨고 우리의 인식의 틀을 새롭게 정의한 예술가들이다. 오귀스트 에스코피에는 현대 요리의 기초를 확립한 프랑스의 전설적인 요리사이다. 그의 요리의 비밀은 송아지고기 육수에 있었다. 고기를 적절히 눌어붙게 해서 단백질을 화학적으로 변화시킴으로써 기막힌 소스를 만들어냈다. 그가 경험적으로 터득한 이 맛의 비밀은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마침내 과학적으로 설명되었다. 세계 각지에서 사람들의 입맛을 끄는 음식에 글루타메이트라는 분자가 공통적으로 들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그 맛을 해독할 수 있는 수용체의 존재가 우리 혀에서 발견되었던 것이다. 한편 에스코피에는 음식의 풍미가 그저 혀에서 감도는 맛일 뿐만 아니라 후각적인 경험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았고, 우리의 혀가 상황에 좌우되는 변덕스러운 존재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이 또한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 블라인드 테스트를 통해 우리의 기대감이 맛을 규정한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같은 맛과 냄새라도 반복적으로 경험하면 그 인식이 달라질 수 있음이 신경학적으로 설명되었다.

에스코피에는 다행히도 당대에 인정을 받아 부와 명성을 누렸지만 모두가 그랬던 것은 아니다. 화가 폴 세잔과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대중들의 편견과 몰이해로 고통을 받은 사례에 속한다. 폴 세잔이 회화에서 이룩한 혁신은 빛이란 보는 과정의 시작일 뿐임을 간파했다는 점이다. 그는 눈이 아니라 뇌로 그리는 그림을 그렸다. 세잔의 화폭은 어떻게 보면 미완의 그림처럼 보일 만큼 본질적인 요소들만을 남겨둔 다분히 추상적인 경향을 띤다. 하지만 우리의 뇌는 거기서 비어 있는 요소들을 찾아내 그림에 채워 넣는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불완전한 감각들을 취해 의미를 만들어내는 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감각자료들을 일관된 재현으로 묶어내는 뇌의 작용이 없이는 세상을 인식할 수 없다. 우리는 현실을 사진처럼 이미지 전체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추상화된 것으로 받아들이고 마음의 능동적인 작용을 통해 이미지를 조합해낸다. 이런 신경학적 진리를 세잔은 이미 알고 있었다.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은 음악사상 가장 떠들썩한 스캔들이었다. 조성 화음을 근간으로 하는 예측과 해결의 익숙한 패턴을 벗어던지고 처음부터 끝까지 불협화음으로 밀어붙이는 이 곡은 아름다움과 가장 거리가 먼, 청중을 고통 속으로 밀어 넣는 음악이었다. 스트라빈스키는 왜 이런 음악을 작곡했을까. 그것은 아름다움도 학습을 통해 새롭게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기 때문이다. 그는 누구보다 음악의 경계를 확장시키고 싶어했다. 여기서 조나 레러는 우리에게 피질푸가 네트워크라는 것을 설명한다. 아무리 흉한 소음도 반복적으로 들으면 패턴을 기억해 점차 수월하게 인식할 수 있게 해주는 기제이다. 그리고 여기에 도파민이라는, 음악적 정서와 관련 있는 신경전달물질이 관여한다는 사실도 알려준다. 그의 말대로 <봄의 제전>의 초연은 청각의 경계를 밀어붙이는 극단적인 실험이었지만, 이후 청중들은 점차 여기에 익숙해졌고 그래서 현재 이 음악은 나름의 아름다움을 갖춘 고전적인 작품으로 인정받는다.

위의 세 명이 미각, 시각, 청각이라는 개별 감각의 본질에 대해 알려주었다면, 작가들은 주로 우리의 정신 작용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기억의 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우리의 기억이 늘 현실을 왜곡하는 불완전한 것임을 간파했다. 우리의 뉴런은 고정된 회로로 연결되어 전기적 자극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시냅스라고 하는 틈새를 통해 소통한다. 그래서 기억은 회상의 순간에 시냅스 간의 전이를 통해 매번 새롭게 활성화된다. 우리의 기억이 변덕스러운 것은 우리의 욕망 때문이 아니라 신경적 기제 때문이다. 거트루드 스타인은 자동기술을 통해 언어에서 의미와 구조를 분리하려고 했는데, 훗날 촘스키에 의해 언어 배후에 심층구조가 있음이 드러나면서 그녀의 시도가 정당했다는 것이 확인된다. 인간 심리의 내면을 파고든 버지니아 울프의 양식은 우리의 자아가 감각자료들을 해석하는 가운데 창발하는 것임을 선취한다. 자아가 단절된 순간들이 끝없이 이어지면서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환영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현대 신경과학을 통해 밝혀진 바이다.

이렇게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는 과학과 예술이라는 상이한 두 분야를 흥미진진하게 오가면서 우리에게 모더니즘 예술가들이 벌인 작업이 얼마나 과학적인 개연성을 확보한 실험이었는지 확인시켜 준다. 이를 통해 저자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과학의 오만함을 경계하자는 것이다. 과학이 제아무리 인간의 모든 비밀을 풀 것처럼 보여도 여전히 신비는 남을 수밖에 없으며, 과학이 전지전능한 신처럼 군림하는 시대에도 예술은 여전히 맡은 바 소명이 있다는 것이다. SF 소설가들의 상상이 미래사회의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해주듯, 오늘날 예술가들의 작업에서 인간의 인식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열쇠가 발견될지도 모른다. 예술가의 상상력은 일종의 과학 실험실인 셈이다. 이렇게 과학과 예술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정이창_문화비평가)

08. 0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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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학과 뇌과학이 만나는 곳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8-14 11:47 
    어제 주문한 책 중의 하나는 석영중의 <뇌를 훔친 소설가>(예담, 2011)이다. 지난주에 나온 가장 흥미로운주제의 책인데다가 저자가 러시아문학 연구자여서더더구나 놀랍다.소개기사를 미리 읽으니 문학과 뇌과학의 만남이불가능한 만남은 아니다. 오히려 앞으로 더 장려되면 좋겠다...연합뉴스(11. 08. 14) 문학과 뇌과학이 만나는 곳"공상의 행복한 힘으로/ 다시 살아난 허구의 인물들,/ 쥘리 볼마르의 연인,/ 말렉 아델과 드 리나르,/ 격정의
 
 
2008-01-17 08: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17 10: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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