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신문에서 올해의 학술출판 트렌드에 관한 기사를 옮겨놓는다. 필자는 출판평론가 표정훈씨이다. 네댓 가지 경향을 짚어보고 있는데, 2007년만의 도드라진 트렌드라고 보기는 어려운 듯하다. 그런 점에서 보면 학술적으로 중요한 업적에 속하면서도 '2007년의 책'이라고 할 만한 건 드물지 않나 싶다. 내가 과문한 탓도 있겠지만. 기사는 자료삼아 스크랩해놓는다.

교수신문(07. 12. 24) 2007년 학술출판 트렌드 회고

학술출판이 학술 동향을 실시간으로 반영하는 건 아니다. 학술출판과 학술 동향이 조응하는 모습은 대략 3년 정도의 시간을 전체적으로 살필 때 비교적 온전하게 조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어떤 학술 도서가 각별히 주목을 끌거나 논쟁을 촉발시키는 경우는 전체 학술 도서나 분야에서 극히 일부다.

바꿔 말하면 주목이나 논쟁 촉발과 상관없이 어떤 학술 분야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책들도 적지 않다(이 글은 아무래도 주목도가 높거나 일반 독자들에게도 상대적으로 널리 알려졌거나, 논쟁과 상관있는 도서 위주일 수밖에 없다. 더구나 필자의 개인적인 성향 또는 독서 범위의 한계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 이런 여러 한계들을 염두에 두고, 올 한 해(2006년 12월 이후 출간) 학술출판에서 주목할 만한 동향이나 개별 저서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식민지) 근대성과 민족주의 등의 주제를 천착하는 책이다. 윤해동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교수의 『식민지 근대의 패러독스』(휴머니스트)를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박선미 츠쿠바대 전임강사의 『근대 여성, 제국을 거쳐 조선으로 회유하다』(창비), 정여울이 번역한 토론토대 앙드레 슈미드의 『제국 그 사이의 한국 1895-1919』(휴머니스트) 등이 주목 받았고, 장문석 한양대 연구교수의 『민족주의 길들이기』(지식의 풍경)와 이용일이 옮긴 한스 울리히벨러의 『허구의 민족주의』(푸른역사) 등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이 주제에서 『동아시아 영화의 근대성과 탈식민성』(이현하 외, 연세대학교출판부), 김려실 교토대 인문과학연구소 연구원의 『투사하는 제국 투영하는 식민지: 1901-1945년의 한국영화사를 되짚다』(삼인), 김병희 서원대 교수(광고홍보학과), 신인섭 한림대 객원교수(언론정보학부)의 『한국 근대 광고 걸작선 100: 1876-1945』(커뮤니케이션북스) 등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주제로서의 매체와 방법으로서의 매체를 포괄하는 문화와 매체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연구가 앞으로 더욱 활발해질 것임을 짐작케 한다. 일종의 ‘문화적 전환’이 이 주제에서도 두드러지지 않을까 예상해 본다. 

 

둘째, 현재 우리 사회, 경제, 정치 현실을 진단하고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는 성격의 책이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우리 민주주의 체제의 문제들을 지적하고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구체적 시스템을 모색하는 『어떤 민주주의인가』(박상훈·박찬표·최장집, 후마니타스)가 대표적이다. 이 책은 특히 정당 정치 문제, 현실 민주주의의 과제 문제 등에서 정확한 쟁점을 제기해주었다.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의 『1997년 이후 한국사회의 성찰: 기업사회로의 변환과 과제』(길), 당대비평 편집위원회가 엮은 『더 작은 민주주의를 상상한다: 민주화는 실패한 기획인가, 87년 이후 한국 사회에 대한 성찰』(웅진지식하우스) 등이 이 주제에서 주목할 만한 책들이다. 새 정권이 들어서면 이런 주제에 관한 논쟁이나 연구는 더욱 두드러질 것이다. 이른바 ‘87년 체제’에 대한 전체적인 평가와 새로운 체제 모델에 대한 모색이, 새 정권 출범과 함께 현실 정치권의 소용돌이와 맞물려 활발해질 것으로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특히 이념적 지형도의 재편과도 상관있기 때문에, 특히 2008년 한 해에 관련 학계가 더욱 바빠질 가능성이 높다.



셋째, 동아시아를 주제로 하는 책들이다. 물론 동아시아를 주제 범위로 잡는다고 해도 책마다 색깔은 가지각색이다. 예컨대 강상규의 『19세기 동아시아의 패러다임 변환과 제국 일본』(논형)이나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의 연구 프로젝트 성과물인 『충돌과 착종의 동아시아를 넘어서: 근대전환기 동아시아의 자기인식과 대외인식』(성균관대학교출판부) 같은 책이 있는가 하면, 송기호 서울대 교수(국사학과)의 『동아시아의 역사분쟁』(솔) 같은 책도 있으며, 일본 이와나미(岩波)에서 나온 『아시아 신세기』 8권을 번역한 책(한울)도 있다.

지금까지 이른바 ‘동아시아 담론’의 상당 부분은 동아시아 공동체, 즉 일종의 지역적 실체 구성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사회과학적 담론이거나(시민운동 연계 차원에서부터 정부의 정책적 고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층위를 보인다), 동아시아의 문화적 정체성 구축이라는(‘역사 전쟁’으로도 일컬어지는 갈등 요인을 안고 있으면서도) 일종의 문화 담론이었다. 요컨대 그것은 실체성과 정체성 구축을 지향하는 목적 지향적 담론이었다.

그러나 목적이라는 큰 숲에 가려진 세부적인 나무들이 그 얼마나 많을 것인가. 그런 의미에서 정재서 이화여대 교수(중문학과)의 『사라진 신들과의 교신을 위하여: 동아시아 이미지의 계보학』(문학동네)이 시사 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목적을 지향하기에 앞서 다양한 주제와 분야에 걸친 동아시아의 계보학이 치밀하게 정리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넷째, 고전 번역서다. 이제이북스에서 펴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고전 번역서들, 학진 학술명저번역총서로 한길사에서 펴낸 김창성 번역의 키케로 『국가론』, 성염 번역의 키케로 『법률론』, 권중달 중앙대 명예교수가 번역한 사마광 『자치통감』(삼화), 천병희 단국대 명예교수의 『아이네이스』와 『일리아스』(숲) 개역판, 김난주가 번역하고 김유천이 감수한 『겐지 이야기』(한길사), 김필수 외 3인이 옮긴 『관자』(소나무) 등이 올 한해 주목할 만한 고전 번역서였다.

마지막으로, 학술 번역에서는 두 책만 언급하고자 한다. 먼저 길 출판사에서 김덕영 독일 카셀대 교수와 함께 진행하고 있는 게오르그 짐멜 선집이다. 지금까지 『게오르그 짐멜의 문화이론』, 『근대세계관의 역사』, 『예술가들이 주조한 근대와 현대』 등이 나온 이 선집 시리즈는, 우리 인문사회과학 분야 전반에서 볼 수 있는 ‘문화적 전환’의 흐름에서 하나의 자양분으로서 의미 있는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박여성이 번역한 니클라스 루만의 『사회체계이론』(한길사)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간 루만의 후기 저작들이 단편적, 간헐적으로 번역 출간됐지만 그의 사회학 이론의 핵심을 담은 이 책이 번역됨으로써 루만 연구 및 그에 바탕을 둔 이론적 모색을 위한 중요한 레퍼런스를 가질 수 있게 된 셈이다. 사회학 이외 분야에서 루만의 이론을 원용하거나 참고로 삼고자 하는 연구자들에게 도움이 될 것임은 물론이다.

어느 시대 어느 시기에서나 학문적 성찰의 초점이 일종의 확장된 ‘나’에 대한 체계적이고 반성적인 성찰에 있었다 하겠지만, 2007년을 돌이켜 보면 그러한 성찰성이 더욱 두드러진다. 우리의 근대성, 우리의 민족주의, 우리의 오늘날 현실, 우리가 속해 있는 동아시아 등이 학문적 성찰의 중심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우리’가 결코 고립돼 닫혀 있는 ‘우리’가 아님은 물론이다.

이런 의미에서, 비록 학술서이기보다는 교양서에 가깝지만, 이옥순 외 6인이 쓴 『오류와 편견으로 가득한 세계사 교과서 바로잡기』(삼인)에 주목하고 싶다. ‘우리’가 ‘그들’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태도와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 책은, 세계 각 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연구해 온 학자들이 각자의 학문적 전문성을 폭넓은 대중과 유효적절하게 소통하는데 성공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문제와 ‘우리’의 현실에서 출발하되 ‘그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이해에서 다시 ‘우리’에 대한 성찰로 한 단계 高揚해 되돌아오는, 학문적 성찰의 되먹임을 어떻게 성공적으로 해나갈 수 있을 것인가. 2008년에는 바로 그런 성찰이 더욱 넓고 깊게 이루어졌으면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덧붙여 변명하자면 문화예술이나 과학기술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의 학술 도서 동향에 관해서, 필자의 무지와 게으름 탓에 사실상 생략하고 말았다. 이 점 양해를 부탁드린다.(표정훈/ 출판평론가)

07. 12. 29.

P.S. 얼핏 어림에도 기사에서 다루어지지 않은 건 강명관 교수의 저작들이다. 올해 한꺼번에 네 권의 연구서를 출간함으로써 동료 학자들의 경탄과 원성(?)을 사기도 했는데, 최근에 <국문학과 민족 그리고 근대>(소명출판, 2007)이 시사IN 선정 '올해의 책'에 꼽히기도 했고(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711), <공안파와 조선후기 한문학>(소명출판, 2007)은 한국일보가 주관하는 한국출판문화상의 학술부문 수상작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올해의 학자'로 기억해둘 만하다. 관련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국일보(07. 12. 24) [48회 한국출판문화상] 학술부문

"조선후기 문학에서 자생적인 근대문학의 모습을 찾을 수 있고 연암이 그것을 정당화 시켜준다는 기존의 문학사를 부정하는 일은 괴로웠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괴롭더라도 이제는 그것을 돌파해야할 시점입니다.”

강명관 (48)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는 <공안파와 조선후기 한문학>에서 철저하게 20세기적 기준인 ‘민족’과 ‘근대’로 수렴하는 한국문학사의 구성논리를 해체한다. 그가 씨름한 것은 다름 아닌 조선후기 문학의 큰 봉우리로 꼽히는 박지원, 이덕무, 이옥, 이용휴 등의 비평론과 창작론들이다. 자생적 근대문학의 단초를 제공한 것으로 평가돼온 이들의 문학이론들이 실은 양명학적 사유, 구체적으로 명대 중국 공안파 사유의 자장 안에 있다는 도발적인 주장을 편다.

강 교수가 책의 서문에서 “일종의 모험”이라고 실토했을 정도로 그것은 도발적인 작업이었다. 책은 진리에 대한 상대주의적 태도, 개성의 강조 등 근대성의 코드로 해독돼온 이들 조선후기 문학가들의 사유가 실상 ‘우리 바깥’의 것을 토대로 구축돼왔음을 입증한다. 즉 우리가 떠받드는 조선후기 지식인들의 사유는 ‘귀고천금(貴古賤今)’을 내세우는 의고파에 대한 반작용으로 17세기초 등장한 명대의 문예이론가들인 원종도, 원굉도, 원중도 등 공안파의 사유에 크게 빚지고 있다는 것이다.

연암이론에 대한 기존 연구에서 연암의 문학사상과 공안파의 사상과의 유사성에 주목한 이론은 있었지만 그는 실증적 자료를 제시하며 “연암비평이 공안파의 논리를 절취하고 있음은 비밀이 아니다” 라고까지 주장한다. 이 책과 함께 펴낸 <농암잡지평석>, <국문학과 민족 그리고 근대>, <안쪽과 바깥쪽> 역시 이 같은 궁리의 결과물들이다.

그가 이같은 문제의식을 품게 된 것은 1992년께다. 박사학위논문을 쓰던 중 홍신유와 이언진의 문집에서 공안파의 흔적을 발견했고, 이후 우리가 높이 평가하는 조선후기 문인들의 창작과 비평이 대부분 공안파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이후 관련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해 책으로 나오기까지 무려 16년이 걸린 셈이다.

강 교수의 책이 발표된 후 학계에서는 “당혹스럽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지만, 그의 작업들은 결과적으로 국문학사에까지 완고하게 영향을 끼쳐왔던 내재적 근대화론이 빚어낸 모순을 돌파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될 것으로 평가된다. 강 교수는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서구 부르주아적 근대를 더 이상 우리 근대의 모델로 삼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춘향전, 흥부전, 심청전 등 근대성의 단초를 드러낸 것으로 평가돼왔던 조선후기의 소설들이 사실은 중세적 논리를 보급하는 매체로 쓰였음을 증명하고 싶다고 했다. 그의 ‘도발’은 좀처럼 멈출 것 같지 않다.(이왕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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