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의 마지막주 북리뷰들을 훑어보다가 '올해의 책' 한권을 발견했다. 나보코프의 자서전 <말하라, 기억이여>(플래닛, 2007)가 그것이다(사실 귀가할 때 문화일보의 북리뷰를 집어들긴 했는데 얼핏 롤프 데겐의 <오르가슴>(한길사, 2007)이 메인으로 다뤄진 것만 보고 그 아래 나보코프의 자서전에 관한 기사는 알아보지 못했다). 사실 개인적으론 내년쯤에 번역서가 나오지 않을까 짐작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는 빨리, 그리고 예기치않게 책이 나와서 반갑고 흐뭇하다. 마치 연말의 '선물' 같은 책이다. 이번주에 <롤리타>에 대한 강의도 했고 내달에도 '보강'이 예정돼 있는지라 재빨리 읽어봐야겠다(물론 나는 영어본과 러시아어본을 갖고 있지만 완독하진 않았었다)...

문화일보(07. 12. 28) '롤리타’ 작가 나보코프의 자서전

“고백하건대, 나는 시간을 믿지 않는다. 나는 내 마법의 융단을 사용한 뒤에, 한 부분과 다른 부분의 무늬가 겹쳐지도록 접어두는 것을 좋아한다.(…)이때에 아무렇게나 골라진 풍경처럼 시간이 없는 상태로부터 누릴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란, (…)그 무아경의 뒤엔 설명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있다. 이는 마치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이 달려 들어가고 있는 순간적인 진공과도 같다.”

열두 살 소녀를 향한 중년남자의 사랑을 그린 소설 ‘롤리타’로 20세기 문학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1899~1977)의 자서전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자서전과는 다른 형식을 띠고 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과거에 대한 ‘회상’을 통해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드러내듯, 이 자서전은 과거와 현재 사이를, 때로는 현재라고 말할 수 없는 다른 시공의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며 순간적인 진공, 곧 죽음을 향해 가는 자연의 상태를 거부하는 나보코프만의 시공을 만들어낸다. ‘가장 예술적인 자서전’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 책은 기억과 그것을 희미하게 만드는 시간 사이의 싸움과도 같다. 이는 그의 굴곡 많았던 삶의 역정에서 기인한다.

나보코프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부유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영국인과 프랑스인, 러시아인 가정교사들에게 다양한 교육을 받았고, 러시아와 유럽 휴양지를 오가면서 나비와 나방 채집을 즐기며, 사랑에 빠져 시를 짓는 행복한 청년으로 자랐다.

하지만 볼셰비키 혁명으로 1919년 그의 가족이 유럽으로 망명하면서 그의 삶은 일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의 아버지는 베를린에서 러시아 극우파에게 암살당했고, 어머니는 프라하에서 죽었으며, 남동생 세르게이는 1945년에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영양실조로 죽게 된다. 나보코프가 1940년 미국에 망명했을 때는 그 무엇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롤리타’(1955)로 미국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킨 이후에야 겨우 삶을 지탱할 경제적 여건이 생겼고, 다시 유럽으로 돌아가 1966년 이 자서전을 출간할 수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나보코프가 1947년 ‘롤리타’와 이 자서전을 동시에 시작했다는 점이다. ‘롤리타’에서 롤리타를 영영 잃은 험버트는 그녀와 영원 속에 남게 될 최후의 방법으로 자서전 집필을 택한다. “그리고 이것이 너와 내가 영원히 죽지 않을 유일한 길이야. 나의 롤리타”라는 험버트의 최후의 독백처럼, 시간 안에 갇힌 비극적 존재라는 점에서 나보코프는 험버트와 다르지 않다.(엄주엽기자)

경향신문(07. 12. 29) 기억, 불현듯 솟구치는 빛

파격 소설 ‘롤리타’의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죽기 11년 전 내놓은 이 책은 흔히 자서전으로 분류된다. 하지만 책은 몇쪽을 넘기자마자 자서전에 대한 통념을 무너뜨리며 독자의 기대를 배반한다. 책은 시대 상황이나 개인 역사의 기술에 비중을 두지 않는다. 초점은 기억의 단편들이고, 펜 끝은 내면으로 향한다. 나보코프는 기억을 둘러싼 한 편의 옴니버스 드라마를 펼쳐놓았다. 물론 주인공은 나보코프 자신이다.

책은 나보코프가 4살이던 1903년부터 1940년까지의 시간을 배경으로 한다. 총 15장으로 이루어진 기억에 관한 에피소드는 각각 다른 시기에 쓰였고, 다른 매체에 게재됐다. 나보코프는 많은 작품 가운데 자서전이라는 성격에 어울릴 것을 선별했으리라. 그런데 그 선별 기준은 ‘기억’이라 불러도 좋을 듯하다. 기억의 대상은 가족, 영어 교육, 첫사랑, 시 창작, 가정교사, 망명 등이다.

나보코프에게 기억이란 어떤 의미인가. 그것은 “두 어둠 사이 잠시 갈라진 틈을 통해 새어나오는 빛과 같은 존재”이다. 암실의 문을 열면 빛이 들이닥치듯 기억은 그렇게 불현듯 솟구친다. 나보코프는 그런 기억의 재생을 통해 자신을 되돌아본다. 기억을 불러오는 매개체는 시각, 청각이 중추 역할을 한다. 책은 과거로 가는 길목마다 시청각적 묘사가 빛을 발한다. 책이 시적이면서도 육감적인 까닭이 거기에 있다. 그는 “그(유년) 시절의 인상들이란 시각과 촉각의 참된 에덴으로 통하는 길”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감각은 기억의 문을 여는 열쇠인 셈이다. 가령 ‘내 해군복에 달려있던 호루라기의 날카로운 소리, 잠이 깬 아침 창 밖 푸른 인동덩굴, 해가 번쩍거리는 강물, 낚시꾼이 버리고 간 눈부신 양철 깡통’ 따위가 기억의 열쇠이자 주문이다.

그는 또 “한 사람의 삶 속에 있는 주제적 무늬를 이해하는 것이 자서전의 진정한 목적”이라고 말하는데 ‘주제적 무늬’란 과거 강렬하게 스쳤던 인상 같은 것이다. 책이 사소한 일상 속에서 큰 의미를 찾고 있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주제적 무늬는 나보코프에게 성장의 나이테와 다름없다.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기억을 시적 언어로 묘사하는 대목이 많아 책은 한 번 읽고 이해하기 다소 버겁다. 이해하기보다 음미하는 자서전이라 해야 할 듯하다.

또 기억을 불러오는 감각이라는 측면에서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떠올리게 한다. 프루스트와 나보코프는 기억을 과거의 복사본이 아니라 감각 혹은 인상의 하나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책은 유년의 기억을 어찌 이렇게 선명하게 묘사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 만큼 세세하다. 혹 기억을 변주한 허구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하는데, 이마저도 프루스트의 소설과 닮았다. 작가의 경험이 녹아있는 것이 소설이라 한다면 이 책은 경험과 허구, 즉 자서전과 소설의 경계에 위치해 있다. 15장 각각은 하나의 단편소설로 불러도 무방할 만큼 저마다의 개성을 지니고 있다.

이같이 특색있는 글쓰기만큼이나 그의 이력도 유별나다. 나보코프는 곤충학자로도 유명하다. 나비 채집은 그의 오랜 취미이자 열정의 분출구였다. 7살 때 호랑나비를 보고 “경험해본 적 없는 강렬한 욕망을 느꼈다”는 그는 “나비의 의태(擬態)의 신비에 끌렸다”고 말한다. 진화론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나비의 보호색이 그를 매료시켜 평생 나비를 쫓아다니게 만든 것이다. 형형색색의 감각으로 기억을 연주하는 나보코프의 글은 형형색색의 나비를 쫓아다닌 그의 일생과 닮았다.(서영찬기자)

07.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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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7-12-29 17:01   좋아요 0 | URL
왜 나보코프가 좋은 걸까요.. 망한 귀족이라서? 롤리타 때문에? 나는 나를 곰곰 생각합니다..
방학은 하였고 영화도 굉장히 좋은것들이 특집으로 걸리고 사야될 책들도 엄청나고 읽고싶은 책들도 많고
일본정도의 여행은 세 자매와 한 조카의 일정을 맞추다 보면 늘 떠나지 못하고 입씨름속에 계획만 세우고..
뭐 그렇습니다. 내일 책사러 나가야겠어요!!

로쟈 2007-12-29 18:48   좋아요 0 | URL
망명작가의 '노스탤지어'에 공감하시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