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스럽게도 이번주에는 주머니를 털어갈 만한 책이 눈에 띄지 않는다. 몇 권의 책을 그냥 기억해놓으면 되는 수준이다. 그 중 한 권은 미국의 두 심리학자가 쓴 <거짓말의 진화>(추수밭, 2007)이다. 목차를 보니 진화론은 물론이고 진화심리학과도 관련이 없어 보이는데, 원제와 다르게 '진화'란 말이 국역본 제목에 들어간 건 아무래도 '호객'을 위한 것이지 싶다('거짓말'이라고 하면 너무 야박하겠고). 차라리 부제가 더 분명하게 책의 주제를 제시해주는 듯하다. 자기정당화의 심리학(혹은 '발뺌의 심리학', '오리발의 심리학'). 이건 뭐 한국인이라면 거의 매일같이 안팎으로 경험하는 것이겠는지라 '우리 얘기'로 읽어도 되겠다. 내가 읽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문화일보(07. 12. 14) '자기정당화’의 덫에 걸린 거짓말쟁이들

한국사회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장면 중 하나. 바로 검찰 조사를 받으러 들어가는 피의자들이 한결같이 자신의 혐의를 부인하는 모습이다. 특히 정치가나 기업인, 고위 관료 등 특권층에 속하는 인사들일수록 완강하게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혐의를 인정하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검찰에서 모든 것이 밝혀질 것입니다(자신에 대한 혐의가 벗겨질 것이라는 뜻)” 등의 말로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그나마 나은 경우엔, “어떻든지 간에 국민에게 심려를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정도다. 이 말 역시 자신이 잘못한 것은 없지만, 국민적 관심사가 된 만큼 소란을 일으켜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의미에 불과하다.

왜 이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까. 불과 수시간 후면 드러날 거짓말을 왜 줄줄이 늘어놓을까. 국민들의 눈에는 이들의 잘못이 너무나 명백하게 보이는데 왜 정작 당사자들은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을까. 책은, 이 같은 질문에 대한 심리학적인 답을 내놓는다. 바로 ‘자기정당화’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자신의 행위에 대해 정당화하는 심리구조를 철저히 파헤치고 있다. 저자들의 설명을 따라가 보자.

우선, 죄를 지은 사람이 대중을 설득하는 것(‘나는 그 여자와 섹스를 하지 않았다’, ‘나는 사기꾼이 아니다’ 등)과 자신을 설득하는 것은 매우 다르다. 대중을 설득할 때는 자신이 위험을 모면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자신이 옳은 일을 했다고 스스로 설득할 때는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 바로 그 때문에 자기정당화가 공공연한 거짓말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위험하다.

남을 속이기 위한 의식적 거짓말과 자신을 속이기 위한 무의식적 자기정당화 사이에는 매혹적인 회색 영역이 존재한다. 바로 기억이다. 기억은 종종 과거 사건의 윤곽을 흐리게 하고, 범죄성을 호도하며, 진실을 왜곡하는 ‘자기고양 편향(ego-enhancing bias)’에 의해 재단되고 형성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억의 자기위주 왜곡이 작용함에 따라 우리는 과거의 사건을 잊거나 왜곡하고, 그 결과 차츰 자신의 거짓말을 믿게 된다.

자기정당화를 추동하는 엔진은 무엇일까. ‘인지부조화’다. 예를 들어, ‘흡연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생각과 ‘나는 하루 두 갑을 피운다’라는 자각 사이엔 긴장 상태가 형성된다. 흡연자가 이 같은 심리적 불편함을 해소하는 방법은 금연을 하든지, 아니면 ‘흡연이 긴장 이완이나 비만 예방에 도움이 된다’는 식으로 구실을 붙여 흡연으로 인한 피해를 감수할 가치가 있다고 자신을 설득하는 것이다. 대부분 흡연자들은 후자의 방법으로 자신을 속인다.

이처럼 인지부조화 상태를 해소하려는 욕구는 강렬하다. 부조화 상태에서는 불편함과 불안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실험 결과 부조화 상태에 있을 때 뇌의 추론 영역은 거의 정지되며, 조화가 회복됐을 때는 뇌의 정서 회로가 밝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메커니즘은 마음을 일단 결정하고 나면 바꾸기가 어렵다는 관찰을 뒷받침하는 신경학적 근거를 제공한다. 더욱이 되돌이킬 수 없는 행위를 했을 때는 자기가 옳았다는 확신이 더 강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다수 사람들은 상당히 긍정적인 자기개념을 갖고 있어서 자신을 유능하고, 도덕적이며, 똑똑하다고 믿는다. 따라서 부조화를 줄이려는 노력은 긍정적인 자아상을 보존하도록 설계돼 있다. 자기확신이 강하고 유명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과오를 인정할 가능성이 더 낮은 것이다. 반면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 역시 부조화를 해결하기 위해 자기정당화의 메커니즘을 따른다. 단, 이들은 부정적인 방향으로 자신을 속인다. 예를 들어, 자신의 능력을 낮게 평가하는 사람은 평소의 생각과 다르게 성공을 거뒀을 때 ‘아냐, 이건 우연일 뿐이야’라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다시 한국사회로 돌아와보자. 매일매일의 뉴스거리가 흘러넘치는 한국사회에서는 왜 그토록 많은 공직자들이 비리를 저지를까. 자신이 평생에 걸쳐 쌓아온 명예와 경력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릴 짓을 어쩌면 그토록 무모하게 저지를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저자들은 ‘피라미드의 비유’를 든다. 처음엔 피라미드의 정상에 서 있던 인물도 한쪽 사면으로 미끄러지기 시작하면 결국 맨 밑바닥까지 추락한다는 것.

누구나 처음부터 ‘엄청난’ 비리를 저지르지는 않는다. 초기엔 ‘업자와 식사를 같이 하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라고 생각한다. 업계의 현안을 파악하는 것도 필요하니 같이 밥 먹으며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럼 골프는? 서로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엔 더욱 좋지 않은가. 그러다 보면 어느새 해외 골프관광도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고 여긴다. 결국, 처음 공직에 발을 들여놓을 당시엔 ‘비리 공직자’로 여겼던 인물과 닮은 꼴인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책은, 미국사회에서의 풍부한 사례들, 즉 거짓말과 말 바꾸기를 밥 먹듯이 하는 대통령을 비롯해 과학자, 의사, 성직자, 사법기관에서 외도를 한 남편의 행동까지 구체적인 실례를 들며 자기정당화의 심리구조를 철저히 파헤친다. 마지막 장에서 이 같은 자기 기만의 유혹을 떨치고 솔직하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용기 있는 인물의 사례까지 보여준다. 자기정당화의 덫이 얼마나 깊고 끈질긴지를 책을 통해 충분히 느낀 뒤에 이처럼 용기 있는 유명인들의 고백사례를 보면 새삼 이들이 달라 보인다. 책의 날개에서 경고하고 있듯이, 어느 누구도 이 책을 읽고 나면 ‘다시는 예전처럼 그렇게 속 편하게 책임을 회피하지 못할 것’이다.(김영번기자)

07. 12. 15.

P.S. 알라딘에는 이 책의 원제가 병기돼 있지 않아서 몇 번 더 손품을 팔아야 하는데, 부제까지 더하면 원제는 좀 길다. 'Mistakes were made (but not by ME): Why we justify foolish beliefs, bad decisions, and hurtful acts'(2007) 올봄에 나온 책이고 분량은 304쪽. 공저자의 한 사람인 엘리엇 에런슨은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심리학자 100인’의 한 사람으로도 꼽힌 적이 있는 저명한 심리학자이고 <사회심리학>이란 교재의 공동저자이기도 하다. 

이 책은 국내에도 번역돼 있다기에 찾아보니 <사회심리학>(탐구당, 1990)이라고 소개되었다. 당연히 애런슨이 공저한 'Social Psychology'(2006, 6판)를 옮긴 것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그게 아니라 애런슨의 단독 저서인 'The Social Animal'(2007, 10판)을 옮긴 것이고 원래는 <현대사회심리학개설: 사회적 동물>(탐구당, 1981)이라고 번역되었다가 <사회심리학>이라고 개정돼 나온 것이다. 5판을 옮긴 것이라고 하는데, 원서가 현재 10판까지 나왔으니 좀더 보완해서 개정판을 내야 할 듯싶다(교재용 책은 물론 많이 찍은 책들이 좋은 책이다), 라고 적고 다시 살펴보니 <사회심리학>(탐구당, 2002)이라는 최신판도 있다. 이건 8판을 옮긴 것인데 국역본의 경우 분량은 오히려 줄었다. 책의 판형이 바뀐 게 아니라면 군더더기들을 덜어낸 모양이다.   

애런슨의 책은 <사회심리학> 외에도 공저 한권이 더 번역돼 있는데, <누군가 나를 설득하고 있다>(커뮤니케이션북스, 2007)가 그것이고, <프로파간다시대의 설득전략>(커뮤니케이션북스, 2005)의 재판이다. 원제는 '프로파간다의 시대'(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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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12-15 14:28   좋아요 0 | URL
심리학적으로 설명은 되어도 용서는 안되는게 그들의 행동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긴 부정부패 금품수수로 구속된다 치더라도 금방 사면되서 나오며 별 경제적인 어려움
없이 부유하게 사는게 그들이니까. 어쩌면 X밟았다 생각할지도 몰라요.
자기합리화는 곧 도덕불감증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로쟈 2007-12-15 23:33   좋아요 0 | URL
자기정당화의 심리학뿐만 아니라 사회학도 그래서 필요합니다. "그 정도는 개얀타"는 대중적 정서의 문제도 걸려 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