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김수영의 생일과 김춘수의 기일이 엇비슷한 즈음이란 걸 한국일보의 연재 '오늘의 책'을 읽으며 알았다. 어제(27일)가 그 생일이고 내일(29일)이 그 기일이다. 안 그래도 오늘 오전 강의때 김춘수의 <들림, 도스토예프스키>(민음사, 1997)에 실린 시 몇 편을 읽을 기회를 가지면서 3년전 모스크바에서 그의 부음을 들었던 기억을 떠올렸더랬다(이맘때쯤일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바로 내일인 줄을 몰랐다). 두 시인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민음사의 '오늘의 시인총서'의 1,2권으로 나란히 출간됐던 두 시집 <거대한 뿌리>와 <처용>은 나에게 좀더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그 이유는 말미에 적었다.  

국일보(07. 11. 27) [오늘의 책<11월 27일>] 거대한 뿌리

시인 김수영이 1921년 11월 27일 태어났다. 그는 1968년 6월 15일 귀가 중 버스에 부딪쳐 이튿날 47년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생전에 한 권의 시집밖에 내지 않았던 그의 사후 6년이 지나 시선집 <거대한 뿌리>가 나왔고, 그의 시와 산문을 각각 묶은 <김수영 전집> 두 권이 나오고 김수영문학상이 제정된 것은 1981년이다.

<김수영 전집>에 실린, 러닝셔츠 차림으로 오른팔을 뺨에 괸 채 까칠하고 퀭해 보이는 얼굴로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는 그의 사진과, ‘시(詩)는 나의 닻(錨)이다’라고 쓴 그의 필체를 몇번이나 되풀이 들여다봤던가.

 

그의 시는 시를 부정하고 있었다. ‘썩어빠진 대한민국’에 욕지거리와 상소리를 해대고, 독재자에 대고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고 시를 쓰고 있었다. 말마따나 그의 시는 ‘노래’가 아니라 ‘절규’였다. 산문도 마찬가지다. 그가 신문에 쓴 시 월평은 이런 식이다.

“이달같이 논평의 대상이 될 작품이 없는 달에는 ‘시단 월평’ 같은 것도 사보타주를 하는 편이 오히려 나을 것 같다… 중견시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20여년의 작업 끝에 어린아이의 작문보다도 싱거운 글을 시라고 내놓다니.” 김수영의 시와 산문은 그렇게 모든 금기나 속박을 넘어선 자유를 갈구하고 있었다.

 

사망하던 해인 1968년 4월 발표한 글 ‘시여, 침을 뱉어라’에서 김수영은 말한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 시는 문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민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인류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문화와 민족과 인류에 공헌하고 평화에 공헌한다… 모기소리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시작하는 것이다. 모기소리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시작하는 것이다.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그것을…”(하종오기자)

 



한국일보(07. 11. 29) [오늘의 책<11월 29일>] 처용

 

오늘은 ‘꽃’의 시인 김춘수(1922~2004)의 3주기다. “아름다운 서정시와 전위적인 실험시, 사회비판적인 참여시는 김춘수 이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시를 통해 하나의 사유를 보여주고자 하는 시도는 김춘수 이전에는 없었던 일이다.”(문학평론가 문혜원) 김춘수는 사물의 이면에 내재하는 본질을 순수한 사유를 통해 파악하고자 했던 ‘인식의 시인’이었다. 그의 시론을 보면 “나의 인식을 지배한 두 사람은 프로이트와 마르크스였다”는 말이 자주 나온다. 하지만 그의 인생행로는 전자에 훨씬 더 경도된 것이었다.

그의 시 ‘처용단장(處容斷章)’의 ‘제4부 뱀의 발'에 ‘역사는 나를 비켜가라,/ 아니/ 멧돌처럼 단숨에/ 나를 으깨고 간다’라는 구절이 있다. 역사가 비켜가기 바라는, 혹은 역사에 으깨인 시인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김춘수에게는 두 가지 경험의 자취가 뚜렷하다. 하나는 일제 말기 니혼대 유학중 적극적으로 항일운동을 하지 않았으면서도 일제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7개월간 옥살이를 한 일, 하나는 1981년 5공 때 전국구 국회의원이 돼 정치에 발 담근 일이다.

그는 두 일을 두고 나중에 “모두 내 의지가 아니었던 100% 피동적인 사건”이라며 ‘인생의 아이러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역사와 개인의 접점에서 아이러니를 겪은 시인은 ‘무의미의 시’로 나아가, 우리 시의 영토를 넓히고 그 ‘제일 아름다운’ 한 진경을 펼쳐보였다.

 

‘샤갈의 마을에는 삼월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는 정맥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삼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 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전문).(하종오기자)

 

07. 11. 28.

 

 

P.S. 서두에서 운을 뗀 '사연'이란 건 다음과 같다. 지난 96년에(아직 20대였다!) 적은 글에서 인용한다.

 

87년 봄. 나는 만 19세였고 대학 1학년생이었다. 꼬박꼬박 등교를 했지만, 아직 결핵약을 먹고 있던 터라 1주일에 평균 두 번은 공기가 사나와지던 학교에 대체적으로 잘 적응할 수 없었다. 3월은 연극을 하며 보내고(자원한 것이었지만 나는 하기 싫어 죽을 뻔했다), 4월은 문무대에 군사교육을 받으러 갔다 왔다 하며 보내고, 5월부터 나는 학생생활연구소에 생활상담을 받으러 다녔다. 그리고 기말고사를 거부하게 됨에 따라 나는 일찌감치 6월초에 집에 내려갔다. 시를 쓰기 시작한 건 7월부터이다. 그리고 8월에 시집을 냈다. 모교의 누나가 타이핑을 하고 학교 아저씨가 등사를 해서 50부인가를 제본했다. 40여 편(이걸 한 달 새에 쓰다니!) 되는 시들 중에는 이런 것도 끼여 있다. 

왜놈들의 독립운동 주동자 이토오 히로부미가 
오늘 아침 드디어 총살당했다 
녀석은 지난주에 하얼빈 역에서 체포되었다 
바보 같은 녀석(빠가야로)! 
일본이란 나라 없어진 지가 벌써 언제야? 
조선 나라 황제의 은덕도 모르는 못된 놈이 있나 
그런 놈들은 
모조리 색출해서 총살시켜야 해!

'이토오 히로부미'라는 것인데, 이건 그중 나은 편이고 한 30여 편은 다시 보기 싫은 것들이다. 사실 등사를 할 때 처음에 파지가 많이 나는 것처럼 처음 시를 쓸 때도 망둥이나 빗자루 같은 게 많이 끼기 마련이다. 나는 이런 걸 갖다가 잘 아는 서점에 내놓았고 거리에서 전단을 나눠주며 홍보까지 했다(전봇대마다 전단을 붙였다!). 제 정신이었을까? 아직 만 이십 세가 안된 미성년이었다는 사실로 정상을 참작해 볼 따름이다.

시집이 팔렸냐고? 그럴 리가! 볼품도 없는 시집을 다른 시집들과 똑같은 값에 팔았는데, 두어 권이 팔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버지가 사가고 담임 선생님이 사가고 하신 것. 하지만 그런 거 생각할 겨를이 없이 나는 서점에서 3천원을 받아들고 마냥 즐거웠다. 그리고는 바로 다른 서점에 가서 시집 두 권을 샀다.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와 김춘수의 <처용>이었다. M출판사에서 나온 ‘오늘의 시인총서’의 1,2권이었다. 나는 그제부터야 한국 현대시를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한다... 

 

요는 내가 쓴 시집을 처음 팔아서 산 두 권의 시집이 <거대한 뿌리>와 <처용>이었던 것이다. 시 '거대한 뿌리'의 후반부를 옮겨놓는다.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나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시구문 진창을 연상하고 인환네
처갓집 옆의 지금은 매립한 개울에서 아낙네들이
양잿물 솥에 불을 지피며 빨래하던 시절을 생각하고
우울한 시대를 파라다이스처럼 생각한다
버드 비숍 여사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비숍 여사와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진보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네에미 씹이다 통일도 중립도 개좆이다
은밀도 심오도 학구도 체면도 인습도 치안국
으로 가라 동양척식회사, 일본영사관, 대한민국관리,
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좆대강이나 빨아라 그러나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제3인도교의 물속에 박은 철근기둥도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괴기영화의 맘모스를 연상시키는
까치도 까마귀도 응접을 못하는 시꺼먼 가지를 가진
나도 감히 상상을 못하는 거대한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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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실이 2007-11-29 0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들어와서
책제목, 출판사 적으면서
"열심히 읽어야지!"다짐하다가
잠시 쉬어가는 중...^^;;
그림도 보고 시도 읽고 로쟈님도 읽고...*^^*

로쟈 2007-11-29 00:47   좋아요 0 | URL
서재가 쉼터이기도 하군요.^^

2007-11-29 00: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29 0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29 0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29 0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