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대학원신문의 '논문리뷰'로 실리게 될 글을 옮겨놓는다. 당초엔 인문학번역에 관한 논문들의 리뷰를 기획했었지만 내가 읽은 두 편의 논문이 모두 '함량' 미달이어서 그냥 가장 손 가까이에 있는 학술지의 논문을 리뷰의 대상으로 골랐다. 소비에트 해체 이후, 즉 포스트소비에트 시기라고 불리는 최근 십수 년간의 러시아 문학장에 관한 개관논문인데, 필자는 대중문학의 대두를 가장 두드러진 특징으로 꼽고 있다. 전공자가 아니더라도 흥미를 가질 법한 내용이어서 자리를 마련한다(아래는 이문영, “포스트소비에트 시기 러시아 문학장의 변화와 대중문학”, <슬라브학보>, 제22권 3호, 2007에 대한 나대로의 요약/정리이다). 이미지와 군말은 새로 덧붙인 것이다(*이 논문을 포함한 저자의 논문집이 <현대 러시아 사회와 대중문화>(한울, 2008)란 제목으로 출간됐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몰락 이후의 러시아를 지칭하는 ‘포스트소비에트’ 시기에 관한 국내외 연구자들의 관심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1991년 사회주의 연방의 해체 이후 현재까지 숨 가쁘게 진행되어온 포스트소비에트 러시아의 변모과정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관심대상이다. 우리의 경우에는 거기에다 러시아 연구가 갖는 지정학적 의의를 또한 빼놓을 수 없다. 한반도 주변 4강의 일원이자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의 한 축으로서 현 러시아의 향방에 주목이 쏠리는 것은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국내에서도 특히 최근 3-4년 동안 포스트소비에트 시기의 정치, 경제, 문화 등 다방면에서의 변화양상에 대한 여러 연구과제들이 수행되었고 그 성과들이 논문으로 발표되고 있다. 이 논문 또한 그러한 성과의 일부이며 체제전환 이후 러시아 문학장(文學場)의 전반적인 변화양상을 ‘대중문학의 비약적인 성장’이라는 관점에서 일목요연하게 설명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대중문학의 성장과 그 기능의 확대는 전지구적 자본주의 체제하에서는 세계적인 현상이지만 필자의 지적대로 과거 소비에트 문학장에서는 나타날 수 없었던 현상이기에 소비에트와 포스트소비에트를 변별해줄 수 있는 중요한 문화적 요소가 된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우리에게 소개된 러시아문학 작가와 작품들을 일별해 보아도 ‘대중문학’이란 러시아문학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와는 가장 거리가 먼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로 대표되는 문학이 아니었던가.

 

 

 

 

 

 

 


사실 러시아 문학의 ‘진지성’은 러시아 근대문학의 전통이기도 했다. 비록 본격예술문학과 구별되는 대중문학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러시아 인텔리겐치아가 주도해온 러시아문학은 언제나 “도저한 정신성, 특유의 진지함과 철학적 야심”으로 특징지어졌고 따라서 대중문학은 문학사에서 배제되어왔다. 이러한 경향은 소비에트시기에 더욱 강화되어 상업적 대중문학에 반감은 아예 볼셰비키들의 적의로 대체되었다. 한마디로 대중문학이 자리할 공간이 없었던 셈이다.

   

Владимир Набоков Владимир Набоков. Собрание сочинений американского периода в 5 томах. Том 3. Пнин. Рассказы. Бледное пламя

 

하지만 사회주의체제 몰락 이후 사정은 전혀 다른 것이 되었다. 이른바 러시아 문학장의 전통적인 구조를 뒤흔드는 변화가 발생한 것이다. 논문의 필자는 그러한 변화를 집약해주는 키워드가 바로 대중문학이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1990년대 이후 체제전환을 경험한 러시아 사회를 장악한 것은 자본의 논리와 상업화 원칙”이고 이는 문학장의 구조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초기에는 솔제니친과 파스테르나크, 나보코프 등과 같은 반체제 작가, 혹은 망명작가 들이 주로 대중적 관심의 대상이 되었지만 이러한 일시적인 ‘고급문학’ 붐은 시장원리에 따라 곧 ‘대중문학’ 출판붐으로 이어졌다.

과거 국가가 주도하던 출판 시스템이 붕괴하면서 출판시장은 자연스레 위축/둔화되었고 이러한 가운데 소련시기 거대 국영출판사들을 대신하여 러시아 출판시장의 권력으로 등장한 것이 독과점 민영출판사들이었다. “1991년 러시아에서 출간된 신간물 목록의 8%, 그 총발행부수의 21%를 민영출판사가 담당한 반면, 2002년 그 비율은 66%/87%로, 2004년에는 68%/91%까지 높아진다.” 한마디로 출판의 주체가 교체된 것이다.  

 

Дарья Донцова Ангел на метле

 

이렇게 등장한 민영출판사들의 경영원칙은 다품목 소량생산이었고 이러한 전략이 갖는 상업적인 차원에서의 결함을 보완해주는 것이 바로 대중문학 붐이었다. 지난 2005년을 기준으로 할 때, 출판자본에 최단기간 최대이익을 보장해주는 시리즈물 형식의 대중소설은 전체 신간종의 35%, 그 발행부수의 53% 차지할 정도로 성장했다. 2001년 러시아 최대서점의 통계에 따르면 전체 문학판매량의 38%가 돈초바, 폴랴코바, 다쉬코바, 마리니나 등의 추리소설이었다는 사실도 포스트소비에트 문학장의 특징을 단적으로 말해준다(마리니나의 추리소설은 국내에도 네댓 종이 소개된 바 있지만 별다른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대중소설 작가들이 전면에 부각하게 되는데, 대부분 우리에게 생소한 이름들이긴 하나 이들 대표적인 작가들을 유형별로 거명하면, 첫 번째로 액션소설 영역의 도첸코, 코레츠키, 압둘라예프, 두 번째로 추리탐정소설 영역의 돈초바, 다쉬코바, 마리니나, 세 번째로 역사소설 장르의 아쿠닌, 네 번째로 연애소설 장르의 우스티노바야, 즈나멘스카야, 빌몬트, 그리고 SF 판타지 장르의 알렉세예프, 보즈네센스카야, 세묘노바 등이 있다. 체제전환 직후에는 남성작가가 남성독자들을 주 대상으로 쓴 폭력적인 액션, 범조소설들이 인기를 끌었다면, 2000년 이후에는 여성추리소설이 강세를 보이면서 여성작가들의 약진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Борис Акунин Азазель

 

변화된 인기작가군들 가운데 특히 주목의 대상이 되는 인물은 “포스트소비에트적인 작가 페르소나의 가장 전형적이고 성공적인 사례”로 꼽히는 ‘러시아의 에코’ 보리스 아쿠닌이다(아쿠닌의 작품들은 국내에도 곧 소개될 예정이다).

 

 

천만부 이상을 판매할 정도의 대중적인 인기와 함께 평단의 지지까지 얻고 있는 그는 자신이 ‘전문가’로서 ‘시장’에서 일하고 있으며 작품을 가지고 “대중잡지, 무대, 영화 TV로 나아가 이익을 얻을 계획”이라고 떳떳하게 밝힌 바 있다.

 

 

이미 그의 여러 작품들이 TV 드라마나 연극, 영화로 제작되고 있으며 이러한 다매체적 ‘소통’은 또한 포스트소비에트 문학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지적된다(국내에도 루키야넨코의 판타지 <나이트워치>와 <데이워치>가 소개된 바 있다. <나이트워치>의 경우는 2004년 영화로 개봉되어 1600만불 이상의 흥행수익을 올렸다).  

 

 

 

 

 

 

 

 

 


이렇듯 대중문학에 의해 주도되는 포스트소비에트 문학소통구조인지라 독자의 위상이 현저하게 강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독서인구는 점차로 감소하고 있다는 점은 아이러니컬하다. 한 설문에 따르면 1994년에는 러시아 성인인구의 23%가 책을 전혀 읽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지만 이 수치는 2002년에는 40%로 늘어났다(현재 러시아 인구의 45%가 전혀 책을 사지 않는다고 한다). 대중문학의 득세와 함께 ‘문학예술의 나라, 러시아’의 간판도 곧 내려야 할 듯싶어 씁쓸한 여운을 갖게 된다.

 

07. 11. 03.

 

 

 

P.S. 포스트소비에트 문학의 국내 소개는 지극히 저조하다. 보리스 아쿠닌을 비롯하여 몇몇 작가가 곧 소개될 예정이지만 다른 언어권에 비하면 여전히 초라한 수준이다. 게다가 영화건 소설이건 러시아 대중문학/문화가 국내에서 '재미'를 본 적도 별로 없어 보인다(이런 사정이 악순환을 낳고 있는 것!). 가장 최근에 나온 러시아 대중문학작품으론 '스무살 러시아 여성작가의 발랄하고 충격적인 뉴웨이브 소설'로 소개된 이리나 제네쥐끼나의 <나에게 줘!>(문학세계사, 2007)이다.  

 

Ирина Денежкина Дай мне!

 

'대중문학'이라고 하지만 저명한 문학상 최종심에까지 올라간 작품으로 '신세대' 소설이며(이리나는 1981년생으로 우리작가 김애란보다도 한 살이 어리다), 20여 개국에서 17개 언어로 번역되었다고 하니까 유명세를 짐작하게 한다. 그럼에도 물론 국내에서는 전혀 '소개'되지 않은 작품이다. 제목에서 강조되고 있듯이 포인트는 '나'이다. 사실 소비에트 사회주의사회에서 포스트소비에트 자본주의사회로의 이행은 '우리'에서 '나'로의 이행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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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세곰 2008-08-29 0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데제쥐끼나의 책은 역자에게 한권 턱 증정받았기 때문에 지하철에서 오가다 좀 읽었습니다. 그닥 재미는... 데네쥐끼나가 범지구적 유명세를 탄 것은, 기억하길, 2004년 에딘버러 축제에 문학의 나라, 러시아를 대표하는 젊은 작가(?)로 소개되어 BBC를 비롯해 서방의 전파에 무진장 노출되었습니다. 그 영향인듯 싶습니다. 그건 그렇고, 저 현란한 러시아 젊은이들의 속어를 번역하느라 역자는 논문을 한 학기 심지어 미루기까지 했다는 후일담이 있습니다.

로쟈 2008-12-18 23:43   좋아요 0 | URL
댓글을 좀 뒤늦게 봤네요. 역자로부터 번역에 관한 에피소드는 저도 들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