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리뷰들에서 <인간 없는 세상>(랜덤하우스, 2007)과 함께 눈길을 끄는 책은 제레미 시브룩의 <다른 세상의 아이들>(산눈, 2007)이다. 부제대로 '세계화 시대의 야만, 어린이 노동'을 다루고 있는 책인데, 그러고 보니 모두 '조화'와 '신의 섭리'에 대한 이반 카라마조프의 맹렬한 비판의 논거로 쓰임직한 책들이다. 내가 읽은 리뷰들을 옮겨놓는다.

경향신문(07. 10. 27) '경제성장’만이 아동착취를 막을수 있을까

서구 국가들은 1999년 시애틀 세계무역기구(WTO) 회담을 통해 제3세계 국가들의 아동 노동 착취와 학대를 문제 삼으며 ‘문명세계의 표준’을 제시하려 했다. 그러자 방글라데시와 같은 후발개도국들은 강력 반발했다. “왜 너희들은 이미 다 해놓고, 우리는 못하게 하느냐.” 그들은 서구 국가들의 ‘사악한 보호주의’를 읽었던 것이다. 어린이 노동을 문화적 야만성 또는 도덕적 문제로 간단하게 치부할 수 없는 한 단면이다. 이는 마치 이라크를 침략한 미국 네오콘이 일상적으로 “폭력만은 안돼”라고 말하는 것에서 보듯 폭력에 대한 논의가 간단치 않은 것과 비슷하다.

영국인 시민활동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산업혁명 초기인 19세기 영국의 아동 노동과 21세기 방글라데시의 아동 노동을 오버랩시키며 아동 노동에 대한 서구의 논의가 얼마나 위선적인지, 그리고 문제의 근본이 어디에 있는지 짚고 있다. 저자는 서구의 인권단체와 국제기구들이 제3세계 아이들을 가혹한 노동환경에서 구해내야 된다고 할 뿐, 그 아이들이 ‘구출된’ 뒤에는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왔다고 꼬집는다. 게다가 그들 중에는 아직도 이 문제가 경제 성장으로 해결되리라고 믿는 이들이 많다. 마치 17세기 북미의 노예무역과 19세기 영국 공장에서의 아동 착취라는 악습이 사회 전체의 부가 쌓이고 그것이 빈곤층에까지 흘러넘치며 완화됐듯이 말이다. 하지만 영국이 식민지라는 자국 아동 노동을 대체할 보루가 있었던 반면 방글라데시는 그런 식민지를 가질 수는 없다. 더 가난한 부족민들이 사는 지역을 공략할 수는 있을지언정 말이다.

어린이 노동을 문화적 야만성이나 도덕성의 문제로 생각하는 서구의 논의는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짚지 못하는 것이다. 사진은 학교를 가는 대신 일을 하고 있는 네팔 어린이의 모습.

많은 이들이 말한다. 현재로서는 가혹한 아동 노동에 대해서만 철저히 규제하도록 하고, 근본적으로는 세계화와 시장 원리에 충실함으로써 더 많은 부를 창출하고 지속가능한 성장을 이루는 것만이 아동 노동의 폐해를 없앨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봐도 이 논리는 모순임이 드러난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핵심은 국가가 자국민의 복지, 건강, 교육, 영양분야에 개입하는 것을 차단하는 것인데, 바로 이 때문에 많은 아이들이 노동시장으로 유입된다. 그런데 해결책이라는 것이 그 세계화와 자유시장에 의한 부의 창출밖에 없다니. 모든 대안들이 사라지고 아이들을 노동시장으로 끌어들이는 바로 그 원인이 해결책으로 제시되는 아이러니인 것이다.

그래도 이해가 안된다고 하는 사람들을 위해 저자는 두바이의 인공섬과 아랍에미리트연합에 낙타경주 기수로 팔려온 남아시아 어린이들을 예로 든다. “두바이의 인공섬은 진보한 현대 사회의 문명을 한눈에 보여준다. 하지만 남아시아의 3~4세 아이들이 돈 몇 푼에 팔려와 아랍에미리트연합에서 낙타 등에 꽁꽁 묶인 낙타경주 기수로 이용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공포에 질린 아이들의 비명은 낙타를 자극해 더욱 빨리 달리게 만들고, 밧줄이 풀려 아이들이 죽기도 한다. 경제성장과 기술진보에 의한 부의 창출이 모든 인류에게 자유를 가져다 주리라는 믿음은 비현실적이며, 근거 없는 희망이다.”

그러면 노동을 전혀 하지 않는 서구 아이들은 행복한가. ‘일과 완전히 분리된 유년’이라는 신화 자체가 최근에 생긴 것이다. 최상층만을 제외하면 세계화 이전에도 아이들은 소 풀을 먹이거나 집에서 떡(케이크) 만드는 것을 돕는 식으로 노동을 해왔다. 서구의 아이들은 제3세계 아이들이 돌을 깨기 위해 망치를 잡는 그 나이부터 소비의 주체가 됨으로써 노동하는 아이들과 불가분의 운명체로 묶이게 된다. 이들은 ‘공부’ 외에는 어떤 직분도 부여받지 못한 채, ‘쓸모없는’ 성인으로 성장하기 쉽다. 아동들에게도 일과 여가 사이의 적정한 선이 있다는 것이다. 결국 아이들을 이 양 극단에 놓음으로써만 비로소 안도하는 사람들은 시장원리를 외치는 많은 어른들이 아닐까.(손제민기자)

 

 

 

 

 

 

 

 

 

 

 

 

 

 

 

 

 

 

 

 

 

 

 

  

한국일보(07. 10. 27) 무서운 세상이, 너희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웠구나

#1 쇠가죽 채찍이나 잘 마른 가죽끈에 못 이겨 시계태엽처럼 일하는 소년들, 또는 여자아이들도 심심찮게 목도할 것이다. 열한살 먹은 어느 아이는 나무 뭉둥이에 다리가 부러졌고, 또 다른 소녀는 면직공장의 감독관 형상을 한 무자비한 괴물에게서 판자로 얻어맞았다.

#2 열네살의 한 소년은 트럭운전사 보조다. 새벽 5시에 일을 시작하는데 운행일정은 종종 밤 11시나 12시가 되어도 끝나지 않는다. 그는 한 달에 약 2만원을 버는데 그 가운데 3분의 2는 가족- 그는 9남매 중 한 명이다- 에게 보낸다. 그는 트럭에서 살고 좌석에서 잔다.

19세기초 영국의 사회개혁가 존 필든이 당시 미국 노동현장을 기록한 보고서(#1)와 현재 세계 최빈국인 방글라데시의 수도 다카에 사는 한 소년 노동자의 일상에 대한 르포(#2)를 읽어보자. 어떤 차이를 느낄 수 있는가? ‘안티 나이키 운동’이 잘 보여주듯 제3세계에서 자행되는 어린이 노동착취의 문제가 세계적 이슈로 떠오른 지도 꽤 됐다. 그것이 ‘제도화된 가장 극악무도한 부정이고, 성장ㆍ개발 모델의 수치’라는 주장을 반박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반(反)세계화 운동가이자 영국의 저널리스트인 제레미 시브룩은 이 책을 통해 어린이 노동착취의 문제에 폭넓은 시각으로 접근한다.

복잡하게 얽힌 역사ㆍ경제ㆍ문화적 맥락을 신중히 들여다봐야 문제의 근절, 그것이 어렵다면 최소한 개선이라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우선 ‘이런 일은 경제적으로 낙후되고 문화적으로 열등한 나라에서나 생기는 일이라는 식의 시각은 위선’이라며 어린이노동 착취 문제에 대한 시각의 교정을 주장한다. 그는 엥겔스나 영국 학자 E P 톰슨을 인용, 현재 제3세계의 어린이 노동착취는 18,19세기 영국의 노동지대나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의 대농장에서 벌어졌던 비극의 반복임을 주지시킨다.

‘어린이 노동은 비윤리적이니만큼 당장 폐지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도 대의명분은 훌륭하지만 수혜자들의 상황을 고려하지 못한 순진한 논리다. 가령 1995년 영국의 한 TV가 모로코의 12~15세 여자아이들이 영국에서 마크 앤 스펜서로 납품되는 잠옷을 만들어왔다고 폭로하자, 많은 모로코 소녀들이 해고됐다. 소녀들의 가정은 이 정도의 노동은 충분히 받아들일 만하다고 봤지만 결과적으로 어린이노동의 금지는 소녀의 가족들을 더욱 깊은 가난으로 몰아넣었다.

동의하기 쉽진 않겠지만 문화의 상대성도 고려해야 한다. 가령 벵골어에는 태어나서부터 열여덟살까지를 의미하는‘미성년’이라는 단어가 없다. 따라서 방글라데시에서는 ‘노동에 대한 어린이들의 권리’라는 말이 거부감없이 동의를 얻는다. 하지만 세계자본주의 착취구조의 최하부에 어린이들의 노동이 깔려있고 이를 인정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이 책의 기본 전제다. 저자는 3, 4세의 어린이를 낙타 위에 밧줄로 묶고 경주를 위해 이들의 공포감을 자극하는 아랍에미리트의 낙타경주나, 먼지와 기름을 뒤집어쓰고 금속성의 굉음에 시달리는 10대 초반의 소년을 무급으로 부려먹는 방글라데시의 자동차정비소의 사례를 들어 이런 노동의 비인간성을 폭로한다.

그렇다면 제3세계 어린이들의 노동착취 문제를 빠른 시간 안에 해결할 수 있을까? 문제는 다시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로 환원된다. 저자는 비관적이다. IMF 같은 국제금융기구의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프로그램 때문에 각국 정부는 건강, 영양, 교육 같은 사회보장 프로그램을 축소하고, 이는 빈곤층에 가장 큰 타격을 준다. 그것은 곧바로 결손가정, 아동 성매매, 노동시장에 유입되는 아동의 증가로 이어진다. 저자는 어린이노동을 당장 근절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기보다 우선 가장 위험하고 유해한 노동부터 금지시키는 일이 실천적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원제 ‘Children of Other Worlds’(2001).(이왕구기자)

07. 10. 28.

P.S. 제레미 시브룩의 경우에도 <세계의 빈곤, 누구의 책임인가?>(이후, 2007)가 지난봄에 소개되었기에 구면이다. 빈곤 문제에 대한 독서 리스트를 내달에는 만들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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