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인 한국학 분야는 나로선 (조금 과장하자면) 기계공학만큼이나 덜 관심을 갖고 있는 쪽인데 이 분야에서 한꺼번에 네 권의 학술서가 출간돼 눈길을 끈다. '네 권'이란 수치는 대단한 게 아니지만 이 네 권을 한 사람이 집필했다고 하면 사정은 좀 달라진다. 한국학계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일 아닐까?(얼핏 조동일 교수가 한꺼번에 몇 권의 책을 냈었다는 기억이 떠오르긴 한다.) 저자는 강명관 교수이고 <조선의 뒷골목 풍경>(푸른역사, 2007) 등으로 이미 대중적인 인지도까지 얻은 학자이다. 최근 몇년 동안 한국학쪽에서는 유독 18세기를 다룬 책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 이 시대가 특별한 것인지 (우연의 일치로) 이 시대 전공자들이 모두 뛰어난 것인지 가늠하기 어렵다(정민, 안대회, 강명관 교수 등을 염두에 둔 말이다). 아무려나 성실한 학인의 자세는 동료-후학들의 귀감이 될 만하다(맨날 서재질이나 하고 있으면 언제 책을 쓰나?). 내일자 조간에 실릴 관련기사를 옮겨놓는다.  

경향신문(07. 08. 27) '민족문학·근대·국가’ 환상을 벗기다…김명관교수 학술서 출간

'조선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나오다’ ‘조선의 뒷골목 풍경’ 등을 통해 조선 후기 일상생활을 복원했던 부산대 한문학과 강명관 교수가 최근 묵직한 학술서 4권(소명출판)을 내놓았다. 웬만한 학자가 한 권도 아닌 4권을 한꺼번에 출간하기란 쉽지 않은 일. 그러나 강교수는 전화 인터뷰에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했다.



오래 전부터 준비한 책들이 함께 출간된 것뿐입니다. ‘공안파와 조선후기 한문학’은 16년 전부터 써오던 논문을 모은 것이고 ‘농암잡지평석’도 10년 걸렸죠. ‘국문학과 민족 그리고 근대’는 재작년에 정리했고 ‘안쪽과 바깥쪽’이 최근에 쓴 책입니다. 성격은 각각 다르지만 서로 연관성이 있어요. 제일 얄팍한 ‘국문학과 민족 그리고 근대’가 세 권의 이론적 근거가 되는 책이고 나머지 세 권은 각론이에요.”

이들 책은 모두 조선 후기 한국학연구의 주요한 이론인 내재적 발전론에 대한 자성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내재적 발전론은 조선 후기에 이미 근대화의 싹이 자생적으로 텄다는 이론으로서 일제의 식민사관을 배격하기 위해 1970년대 출현했다.

“이 책들은 근대라는 개념에 대한 깊은 반성에서 출발했습니다. 제가 91년에 박사학위 논문을 쓸 때, 중인문학을 주제로 택했습니다. 양반문학과의 차별성을 바탕으로 논문을 쓰려고 연구를 진행시켰는데 막상 중인문학과 양반문학 사이에 크게 다른 특징이 안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곤혹스러웠지요. ‘내가 잘못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러다 ‘왜 조선후기 문학사에서 근대를 찾으려고 하는가?’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죠.”



내재적 발전론이 서양사의 보편성을 한국사에서 뽑아내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그리고 이 같은 깨달음은 책 ‘국문학과 민족 그리고 근대’에서 조목조목 민족문학과 근대, 국가 등에 덧입혀진 환상을 벗겨내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책에서 강교수는 국문학사가 기본적으로 민족과 근대라는 두 어휘를 통해 구성됐음을 지적한다. 민족과 국가라는 개념이 근대에 고안된 개념인 만큼, 한 민족의 문학적 특질을 찾으려는 국문학 역시도 실재한다고 보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또 연구가 심화할수록 국문학의 본질이 드러날 것이라는 생각 역시 환상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한국 문학사 연구가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강교수는 국문학사에서 민족과 근대라는 내피를 제거하고 타자를 통해 조선후기 문학사를 분석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타자란 중국문학이다. 한국사가 중국 및 일본 등 주변국과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간 한문학계는 조선후기 문학의 자생성에 힘을 실어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 문학사에서는 중국의 의고문체와 공안파의 문예이론 등이 끼친 영향을 부정할 수 없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 문단에 수용된 의고문체는 중국 진한대의 산문을 본받아 예술적 성취를 이루자는 명대의 복고적인 창작론. 신흠, 김상헌, 유몽인 등 당대 일류 문인들이 진한대의 고문을 숭앙했다. 조선 후기 문학의 대가였던 농암 김창협은 이 같은 의고문체를 강력히 비판했다. 그의 문학에 대한 짧은 언설로 구성된 ‘농암집’ 권 31 잡지 외편에는 중국의 고전에 대한 농암의 사유와 비판이 담겨 있다. 이 책은 농암문학 연구의 필독서였으나 그간 제대로 번역된 적이 없다. 때문에 강교수가 번역하고 주석을 단 ‘농암잡지평석’은 앞으로 많은 국문학사 연구자들에게 유용한 기초자료로 쓰일 듯 싶다. 원문을 번역하고 자료를 찾으며 준비하는 데만 10년이 걸렸다.

모든 것이 농암에게로 흘러들어가서, 그로부터 다시 나왔습니다. 한데 기존의 한문학 연구를 살펴보면 많은 학자들이 자신의 논리를 구축해놓고 필요한 자료만 뽑아 쓰곤 했어요. 그렇게 해서는 전모를 살필 수 없습니다. 농암이 중국의 고전을 읽고 비판했다 하면, 원전이 뭔지 찾아 읽어야 어떤 맥락에서 비판을 했는지를 알 수 있죠. 이잡듯이 읽어보자고 마음 먹고 시작한 일이 이렇게 시간을 끌 줄은 몰랐네요.”



‘안쪽과 바깥쪽’은 그간 민족적 주체를 강조하면서 외부의 영향을 무시했던 연구풍토를 비판하고 있다. 한문학이 전근대 동아시아에 보편적으로 출현한 문학 양식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데, 이를 중국의 동시대 문학과 무관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자폐증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공안파와 조선 후기 한문학’은 좀더 상세한 분석을 담고 있다. 구상에서 집필완료까지 16년이 걸렸으니 네 권의 책 중 가장 공력을 들인 책이다. 강교수는 사람들이 연암 박지원을 조선 후기의 독창적인 지식인, 이단아로 알고 있지만 그를 비롯한 이덕무, 이옥, 이언진 등의 비평론과 창작론은 중국 명대 공안파(公安派)의 문예론에 빚을 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공안파는 봉건적 권위와 도덕을 무시한 탁오 이지(李贄)의 영향을 받아 개성적인 자아 표현을 중시하고 옛사람들의 낡은 사고를 배격한 문예집단이다. 강교수는 책을 통해 조선의 근대적 지식인으로 일컬어지는 박지원 일파의 성취가 실은 공안파의 문예론에 기댔다고 강조한다. 연암일파는 기본적으로 한문학을 기반으로, 공안파의 비평을 수용해 조선어의 어휘와 속담을 받아들여 창작했기 때문에 이들로부터 ‘민족문학적 성격’을 찾으려는 노력은 철회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10년이 넘게 아침 일찍 출근해 하루 종일 한적을 뒤적이고 컴컴한 밤이 돼서야 퇴근을 했다는 강교수는 안식년 중에도 연구실에 틀어박혀 읽고 썼다. 이번 책들은 그 특유의 연구열과 성실함이 만들어낸 성과다.

조만간 일반 독자들을 위한 역사교양서도 출간된다. 조선시대 책과 관련된 인물들을 통해 지식이 조선이라는 사회와 국가를 어떻게 만들어내고 구성해냈는가를 살핀 인문교양서와 어떻게 조선의 유교이념이 열녀사상을 만들어내고 여성들의 성적욕망을 억압했는지를 추적한 책이 올 가을 출간될 예정이다. 조선 후기를 바라보는 강교수의 신선한 사유가 기다려진다.(윤민용기자)

07. 08.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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