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말 북리뷰의 가장 많은 주목을 받은 책은 아마도 강신주의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그린비, 2007)가 아닌가 싶다. 개인적으론 책의 절반 정도를 미리 읽어볼 기회가 있었는데 활달하고 막힘없는 글솜씨가 인상적이었다. 덕분에 저자의 다른 책들에도 눈길이 갔고 사실 노자와 장자철학에 관한 기본적인 문제의식들은 이전에 낸 <장자 -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태학사, 2003), <노자: 국가의 발견과 제국의 형이상학>(태학사, 2004), <장자의 철학>(태학사, 2004), <장자 & 노자>(김영사, 2006)에서 이미 펼쳐놓은 바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이번에 나온 '리라이팅'은 보다 대중적인 화법으로 이를 풀어낸 것이다. 최소한 작년에 나온 <장자 & 노자>와 같이 읽으면 도움이 되겠다. 저자의 문제의식을 살리자면 <장자 vs 노자>여야 할 테지만. 미리 읽어둘 만한 리뷰기사 두 편을 옮겨놓는다.
경향신문(07. 08. 18) 노자와 장자, 섞일 수 없는 철학
장자는 노자의 사상을 집대성한 철학자로 알려져 왔다. ‘노장사상’이라는 말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인식은 잘못됐다고 주장한다. 노자가 무위(無爲)를 주장했던 것은 통치자가 무위에 이르면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복종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란 것이다. 노자의 도(道)는 “통치자들이 만약 이것을 지킬 수만 있다면 만물이 스스로 와서 복종할 것”이라는 노자 자신의 말처럼 통치자의 지배를 위한 것이었다. 노자는 국가와 군주의 지배를 강화시키기 위해 노력한 국가주의 정치철학자였다는 말이다.
반면 장자는 아나키스트였다. 국가에 의해 강제적으로 진행되는 권력의 집중에 반대했다. 그는 국가의 힘을 강화하는 것은 전란을 부추길 뿐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서로 대립하고 맞서기보다는 타자와의 차이를 받아들이고 긍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후대에서는 노장사상이라고 뭉뚱그려 이야기한다. 저자는 이런 ‘잘못된’ 인식의 차이에 대해 ‘소백산의 겨울바람’을 예로 들었다. 소백산을 겨울과 이른 봄을 피해 오르는 등산객은 이 산의 따뜻함과 부드러움만 기억한다. 그러나 소백산의 겨울은 거칠고 날카롭다. 장자를 ‘따뜻하게’ 읽는 것은 자유지만 그 이면에는 겨울바람과 마주치는 것처럼 차갑고 냉철하고 날카로운 면이 핵심이라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노자의 세계관은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이고 장자는 소통(疏通)이다. 커뮤니케이션은 어원 그대로 어떤 공적인(communis) 영역의 권위를 전제한다. 사람들이 공적인 사고나 인지의 틀에 따르는 것을 말한다. 쉽게 말해 자유로운 개인이 공동체의 규칙에 동화되는 것이다.
그러나 소통은 다른 의미다. 소(疏)는 ‘막힌 것을 터 버린다’는 뜻이고 통(通)은 ‘새로운 연결’을 말한다. 기존의 고정된 삶의 형식을 극복해 새로운 연결과 연대를 모색하려는 의지라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노자는 주어진 삶 속에서 지도자의 역할과 그에 따른 순응에 대해 설파했다면 장자는 이를 거부하고 개인으로서 타자(또는 세상)와의 소통 문제를 다뤘다는 말이다.(김주현 기자)
한국일보(07. 08. 18)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 열림과 연대를 찾아내다
장자는 “도는 걸어가야 이뤄진다(道行之而成)”이라 했다. 사람의 불행과 우울을 양분으로 증식되는 종교, 국가, 자본 등의 가치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 때, 비로소 진리를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장자는 비움과 망각을 강조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군주와 국가를 위해 전개된 사유인 노자 사상과 결별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삶을 부정하려는 일체의 권력을 단호히 거부하려는 정신이었다. 그래서 장자의 ‘비움’이란 열림 또는 연대와 이어지는 사유의 결정체다.
그 장자의 사유는 현대적ㆍ동시대적이다. 타자와의 마주침이 전제돼야만 촉발되는 헤겔의 변증법,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확인되는 루소의 반국가주의, 국가란 자발적 연대를 가로막는다며 군주제의 역기능을 폭로한 스피노자의 정신과 어깨를 겯는다.
이 책은 <장자>에 관한 동서고금의 정보로 엮여 있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장자>는 위진 시대의 사상가 곽상의 편집물이다. 원래 모두 33편 6만4,606자로 이뤄져 있는 <장자>는 현재 3분의 1 정도는 유실된 채 전해져 온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장자>는 서양 철학자들을 분발시켰다. 미세 지각 이론의 라이프니츠, 장자의 ‘수영 이야기’를 자신의 철학의 노둣돌로 삼는 들뢰즈 등은 대표적이다. 또 유한한 존재인 인간을 규정짓는 조건들을 뭉뚱그리는 성심(成心)이란 장자 특유의 사유틀은 부르디외에게 이입돼, ‘아비투스’라는 개념으로 이어진다.
2부 ‘해체와 망각의 논리’는 장자의 사유법이 이처럼 해체 철학의 시대와 단단히 유대하고 있는 풍경을 비춰 보인다. 이 책은 장자를 21세기적으로 복원시킨다. 장자의 적극적 의미는 그가 소통을 사회의 대전제로 보았다는 점에 크게 기인한다.
장자는 우리의 삶이 유한하다는 것, 그래서 타자와 마주칠 수박에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분명히 통찰했다. 그 과정에서 그가 보여주는 민주적 원칙은 독자들을 돌아보게 만든다. 장자는 지배 의지를 필연적으로 내포하는 형이상학적 사유란 유아론적 환각에 불과한 것이라며 조롱했다. 나아가 수직적 초월(超越)이 아니라 수평적 포월(匍越)을 강조, 일찍이 민주성을 통찰했다.
장자는 급진주의자였다. “잊어라!(기존 시스템의 망각) 그리고 연결하라!(새로운 연대)”고 그는 삶의 강령으로 제시했다. 정치적 위계 질서를 일종의 꿈이라고 지적한 장자는 군주와 국가를 위해 전개된 노자의 사유와 결정적으로 배치한다고 책은 지적한다. 장자를 이 시대로 불러내기 위해 지은이 강신주 씨는 지난 1~8월을 꼬박 집필 작업에 매달렸다. 그는 “비정규직이나 세계화 등 개인 말살의 상황은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며 “개체성을 강조한 장자의 언어가 새삼 새로워져 간다”고 말했다.(장병욱 기자)
07. 08. 19.
P.S. 개인적으론 언제나 노자보다 장자에 끌렸기 때문에 저자의 '장자 예찬'에 쉽게 공감하게 된다. 그런데, 저자의 책을 읽으면서 더 관심을 갖게 된 건 노자이다. 특히나 '초간 노자'의 발견 덕분에 새로운 시야가 열린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자세히 말할 건 아니지만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노자는 (1)왕필본(=통행본), (2)백서본, (3)초간본, 세 종류이며 시기적으로 점점 거슬러올라간다.
당연한 말이지만 어느 본을 노자 이해의 핵심으로 삼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갖게 되는 '노자 상'은 사뭇 달라질 수 있다. 저자의 노자론이 초간본에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은 그래서 다소 의아한 일이다. 초간 <노자>와 백서 <노자>의 저자가 다르다는 일반적인 주장을 수용한다면 백서본을 근거로 <사기>에 기록돼 있는 노자(노담)의 철학을 논한다는 것은 무리로 보이기 때문이다. 전공학자들의 견해가 어떤 것인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