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도서관에서 대출한 책은 하버마스의 <인간이라는 자연의 미래>(나남, 2003)이다. 책은 2003년 정초에 나온 걸로 돼 있지만 그 전 주에 이미 서평이 나온 것으로 보아 실제로는 2002년 연말에 나온 듯하다. 분량에 비해 너무 비싸다는 판단에서 구입하지 않았던 책인데 문득 읽어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사실 하버마스의 논지에 대한 지젝의 비판을 나는 예전에 읽었었다). 하버마스 '전문가'인 이진우 교수의 서평을 미리 읽어둔다.
동아일보(02. 12. 28) [인문사회]인간이라는 자연의 미래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해질녘에야 비상하는 것처럼, 철학은 어떤 문제가더 이상 문제로 인식되지 않을 정도로 보편화되었을 때 비로소 그것을 문제삼는 것 같다. 생명공학이 바로 그런 문제이다.
생명공학은 우리들에게 자신과 후손, 세계의 비전을 만들고 영향력을 행사할 힘을 주는 ‘꿈의 기술’로 인식되고 있다. 이제까지 가능성의 영역에 머물렀던 인간복제를 현실화시킨 생명공학이 정말 꿈의 기술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지난 몇 년 동안 유전학만큼 우리를 흥분시킨 자연과학도없다는 사실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유전학이 생명의 신비를 해명하는데 그치지 않고 생명을 생산적으로 다룰 수 있는 생명공학으로 발전함으로써 ‘생명’은 이제 이 시대의 핵심적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그러나 생명공학의 문제는 이성적으로 논의되기는커녕 ‘축복’과 ‘재앙’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하는 극단적 이원론의 덫에 걸려 있다. 한편에는 생명공학의 출현으로 모든 것이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이라는 긍정적 예측이 있으며, 다른 한편에는 인간이 생명공학을 통해 창조주인 신(神)의 기능을 탈취함으로써 결국에는 인간 존엄성을 파괴할 것이라는 종말론적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이원론은 어쩌면 실제의 생명과학적 인식과 그것이 적용될 때 나타날 수 있는 기술적 결과들과는 별로 관련이 없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상황에서 출간된 하버마스의 이 책은 특히 두 가지 측면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다. 한편으로, 이 책은 생명공학의 성과를 인정하면서도 ‘인간본성’의 관점에서 생명공학에 도덕적 한계를 설정하는 미덕을 갖추고 있다. 따라서 철학은 무조건 생명공학을 반대한다는 인식이 팽배한 우리 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준다. 다른 한편으로 하버마스는 일련의 포스트휴머니스트들처럼 기존의 인간 이해를 포기하지 않고서도 생명공학의 문제를 도덕적으로 해명할 수 있는 관점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진화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을 이제 진화의 주체로 올려놓음으로써 생명공학은 어떤 윤리적 문제를 낳는가? 하버마스는 이 문제를 대체로 세 가지 관점에서 접근한다.
첫째,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윤리적 불확실성은 근본적으로 자연스럽게‘태어난 것’과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 사이의 경계가 흐릿해진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인간의 체외수정을 허용한다면, 왜 우리는 인간의배아 연구를 금지해야 하는가? 생명공학에 대한 도덕적 과잉반응을 비판하는 과학자들은 지금 인간복제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25년전 체외수정도 반대했다고 꼬집는다. 생명공학의 발전을 막을 도덕적 댐은 이미 붕괴된 것이다.
둘째, 하버마스는 태아의 도덕적 지위에 관해 모든 시민들이 수용할 수있는 중립적 관점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수정란에도 도덕적 주체에 주어지는 인격과 인간의 존엄성을 부여한다면, 생명공학 자체는 어떤 이유에서도 도덕적으로 허용될 수 없을 것이다. 하버마스가 절대적 생명권을 주장하지 않고서도 생명공학의 도덕적 한계를 설정할 수 있는 근거를 찾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셋째, 하버마스는 생명의 존엄과는 다른 ‘인간다운 삶의 존엄’을 도입함으로써 “우리는 생명공학 시대에도 ‘자신의 삶의 창조적 주체’로서 실존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답하고자 한다. 만약 우리가 생명공학 시대에도 서로를 자율적으로 행위하는 인격으로 인정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전제조건을 침해하는 기술행위에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하버마스는 치료의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소극적 우생학’과 치료의 논리를 넘어서 유전자의 특성을 변형시키는 ‘적극적 우생학’을 구별하면서, 소극적 우생학은 허용될 수 있지만 유전자 조작에 바탕을 둔 적극적 우생학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 물론, 하버마스의 이러한 시도가 우리의 불안을 말끔하게 씻어주지는 못하겠지만, 그의 철학적 성찰이 다음의 문제를 심각하게 제기하게 만든다면 그것으로충분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 존재이기를 원하는가? 우리는 태어나기를 바라는가, 아니면 만들어지기를 바라는가?”(이진우 계명대교수·철학)
07. 08. 16.
P.S. 국역본의 제목이 <인간 본성의 미래> 대신에 <인간이라는 자연의 미래>가 된 것은 읽기에 좀 거북하다(영역본의 제목은 'The Future of Human Nature'). 'Human Nature'를 일부러 '인간적 자연'이라고 옮기는 철학자들도 있지만 본인들 생각만큼 의미심장한 건 아니며 오히려 이해를 방해한다. '인간이라는 자연'이라고 옮기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런 식이라면 에드워드 윌슨의 <인간 본성에 대하여>는 <인간 자연에 대하여>가 될 터인데 이게 얼마나 어색한 번역인지 객관적으로 판단해볼 수 있는 것 아닐까? 이런, 본문을 보니 '인간 자연의 도덕화' '인간 자연의 기술화'가 난무하는군. 그냥 자연스럽게 '본성'이라고 해두면 편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