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의 기본단위가 개인이라면 고대 그리스철학을 따르는 스트라우스 이론의 기본단위는 레짐이다. 그리고 스트라우스가 말하는 '정치'는 근대인들이 보통 생각하는 정치보다 훨씬 광범위하며 우리 생활의 곳곳에 스며 있는 '고대적인 정치'이다.(...) 레오 스트라우스는 문화적 상대주의를 지독히도 싫어한다. 스트라우스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여러 레짐들을 비교한 뒤 좋은 레짐과 형편없는 레짐에 대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45-46쪽
스트라우스의 입장에서는 이런 근대성과 자유주의, 가치중립주의, 역사주의는 위장된 상대주의, 허무주의에 불과하다. 스트라우스는 근대 이성주의는 그래도 도덕이 유지될 거라는 막연한 환상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나 도덕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스트라우스에 따르면, 고대의 현인들은 '도덕'에는 절대적 근거가 없으며 그것은 사람이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어리석은 대중들에게까지 발설하지 않는 신중함이 있었다는 것이다. 상대주의와 허무주의가 어리석은 대중들에게까지 확산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덕을 내팽개칠 것이고 서구문명에는 재앙이 닥칠 것이라는 게 니체의 교의를 따르는 스트라우스의 걱정이다. -70쪽
스트라우스는 단호함의 적절한 대상으로 진리를 내세운다. 스트라우스는 '무엇에 대한 단호함인가?'라고 스스로 물은 후 '진리에 대한 단호함이다'라고 스스로 대답할 것이다. "진리가 없다는 것이 진리"라는 니체의 말을 인정하면서도 정치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혼란을 막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절대적인 진리'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75쪽
"인간의 최고 활동인 철학 혹은 과학은 '만물'에 대한 의견을 '만물'에 대한 지식으로 대체하려는 시도다. 그런데 의견은 사회의 구성요소다. 그러므로 철학 혹은 과학은 사회가 숨쉬고 있는 기초를 해체하려는 시도다. 따라서 그것들은 사회를 위태롭게 만든다.(...) 철학 혹은 과학과 사회의 관계와 관련하여 이러한 견해를 견지하는 철학자나 과학자들은 사회의 바탕을 이루는 의견들에 대해서 다수가 갖고 있는 무조건적인 신뢰를 위태롭게 만들지 않고도 소수에게는 자신들이 진리라고 간주하는 것을 밝힐 수 있게 하는 특이한 글쓰기 방식을 채택하도록 강요받는다. 그들은 밀교적(esoteric) 가르침으로서의 진정한 가르침과 공개적(exoteric) 가르침으로서의 사회적으로 유용한 가르침을 구분하게 된다." -86-87쪽
스트라우스에 따르면 플라톤이 넌지시 혹은 우물쭈물 말하고 넘어가는 부분이 플라톤의 진짜 가르침일 가능성이 높다. '플라톤이 여기서 무엇을 말했나'보다 '플라톤이 여기서 무엇을 말하지 않았느냐'에 더 주목해서 살펴봐야 진짜 가르침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플라톤이 여기서 이 말을 했다가 저기서는 저 말을 한다면 둘 중에 하나는 진짜 가르침이고 다른 하나는 가짜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97쪽
스트라우스가 정치철학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 계기[는] 서구와 근대성의 위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할 방법을 찾는 과정에서 정치철학의 역사를 연구했다.(...) 스트라우스는 마키아벨리가 고대 정치철학의 전통을 파괴하고 정치와 도덕을 분리시킨 근대 정치철학의 시조라고 본다. 그에게 마키아벨리는 도덕적 혼란이라는 근대성의 위기, 서구문명의 위기를 불러온 장본인이다. -108-112쪽
스트라우스는 판단을 내리기를, 인간본성과 인간사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관찰은 올바르다는 것이다. 이것은 스트라우스 자신도 마키아벨리에 동의한다는 말이다. 다만 플라톤처럼 몰래 속삭이면서 말해야지 마키아벨리처럼 그렇게 큰소리로 떠들어대면 곤란하다는 얘기다. 결국 스트라우스가 마키아벨리를 비난하는 진짜 이유는 마키아벨리가 너무 사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순진하기 때문이다. -114-1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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