론다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그라나다로 향하는 중이다. 앞서 작은마을이라고 적었는데(그렇게 소개받기도 해서) 확인해보니 인구는 3만5천 가량. 하지만 관광객들로 북적이는지라(다른 한국인 단체관광팀도 보였다) 체감으로는 작지만은 않은 도시다. 유명한 협곡과 누에보다리를 보고 헤밍웨이의 산책로를 따라 투우장 앞에 있는 헤밍웨이 동상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었다. 론다의 바깥쪽 풍광을 보면서 멋진 점심식사를 하고 다시 그라나다로 향하고 있는 것. 그라나다의 아경을 구경하는 것이 오늘의 마지막 일정이다.
스페인 작가가 아니지만 명예 스페인 시민증을 받을 만한 작가가 헤밍웨이다. 그의 대표작 <태양은 다시 떠올다>(1926)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1940) 그리고 투우를 다룬 논픽션 <오후의 죽음>이 모두 스페인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다.
헤밍웨이 문학의 특징으로 ‘고독한 개인‘의 형상을 자주 지목하는데(‘헤밍웨이와 실존주의‘가 언급되는 이유다), 그런 면에서 보면 주제적으로 가장 진화한 작품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이다. 하지만 작품은 제목과 제사를 빌려온 존 던(17세기 영국시인)의 시를 잘 구현하고 있는지 확실히 말하기 어렵다. 헤밍웨이의 의도(내지 명분)와 실제 사이에 간극이 있어보이는 것. 참고로 존 던의 시는 이렇다.
˝누구든, 그 자체로서 온전한 섬은 아니다.
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이며, 대양의 일부이어라.
만일 흙덩이가 바닷물에 씻겨 내려가면
구라파는 그만큼 작아지며, 만일 모래톱이 그리되어도 마찬가지,
그대의 친구들이나 그대 자신의 영지가 그리 되어도 마찬가지.
어느 사람의 죽음도 나를 감소시킨다.
왜냐하면 나는 인류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는지 알고자 사람을 보내지 말라.
종은 그대를 위해 울린다.˝
주제적으로 <누구를>을 정점으로 하고서 헤밍웨이의 문학은 수축하여 다시 <노인과 바다>(1952)에서 안정화된다. 중편(분량)이라는 형식과 고독한 개인의 인정투쟁이라는 주제에서 그의 문학은 안정감과 함께 최고의 성취에 도달하는 것으로 보인다. 장편소설의 미흡함을 상쇄한다고 할까. 그렇지만 그 주제는 <누구를>에 견주에 결코 앞선다고 할 수 없다. 헤밍웨이 문학세계에 대한 짧은 강의의 결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