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 때문에 에른스트 벨러의 <아이러니와 모더니티 담론>(동문선, 2005)을 급하게 펴들었는데, 예전에 도서관에서 대출했을 때도 느꼈던 것이지만 역자들 또한 책을 너무 급하게 옮긴 듯하다(급하게 번역한 책이라 책값은 더 비싼 걸까?). 읽어나가면서 께름칙한 대목들이 눈에 자꾸 들어온다. 시간이 없는 탓에 '한줄'만 지적해둔다.  

 

 

 

 

'현대사상에서의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다룬 1장의 한 대목인데, 참고로 벨러의 저작에 관심있는 독자라면 <데리다-니체, 니체-데리다>(책세상, 2003)가 더 안전하겠고, 니체와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해서라면 데이브 로빈슨의 <니체와 포스트모더니즘>(이제이북스, 2002)이 더 자세하겠다. 읽어볼 한줄은 바로 그 '니체와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포스트모더니즘은 니체의 목적론뿐 아니라 진리와 전체성을 동일시하는 헤겔주의 전반을 거부하는 니체의 시각과 연결되어 있다."(18쪽)

이 문장은 아무리 읽어봐야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일단 우리말 문장이 안되기 때문인데, 게다가 '니체의 목적론'이라니? 조금 요령있는 독자라면 얼토당토 않은 '니체의 목적론'에서 '목적론'이 헤겔주의와 관련된 것이라는 것 정도는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그 경우에 '니체의' 다음에 쉼표가 와야 한다). 그러면 절반의 이해 정도는 가능하다. 하지만 제대로 이해하려먼 원문을 참조하는 수밖에 없다.

"Historically speaking, postmodernism is an alignment with Nietzsche's perspectivism and refusal of Hegelianism, of Hegel's equation of truth with totality, as well as of his entire teleology."(6쪽)

짐작대로 'his entire teleology'에서 역자는 'his'를 헤겔이 아닌 니체로 본 것인데, 나로선 상식밖이다. 그리고  'Nietzsche's perspectivism'을 '니체의 시각'이라고 옮긴 것도 예상밖이다(니체에 관해서라면 전혀 문외한이라는 얘기이다). '원근법주의' 혹은 '관점주의'라고 옮겨지는 용어이다.

다시 옮기면, "역사적으로 말해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니체의 관점주의와 연계되는 것이면서 헤겔주의에 대한, 헤겔식 목적론뿐만 아니라 진리=총체성이라는 헤겔식 등식화에 대한 그의 거부와 바로 연결되는 것이다."   

무성의해 보이는 번역서라고 해서 소득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서로 분류될 수 있는 책이지만 '포스트모던 번역'에 대한 진단으로서도 읽히기 때문. 가령, "포스트모던한 스타일을 사용하는 작가들의 경우 그들이 다루는 주제의 모호함은 어떤 피상성, 아마추어 수준의 전문지식, '빈약한 철학', 한계 위반 등과 뒤섞여서 나타난다."(21-22쪽)는 지적은 '포스트모던한 스타일'을 '포스트모던한 번역'으로, 그리고 '작가들'을 '역자들'로 대체할 경우에 그대로 포스트모던 번역론이 된다.

그것이 억지는 아닌 것이 'poor philology(빈약한 문헌학)'를 이미 역자는 '빈약한 철학'으로 대체해놓았기 때문이다. 요즘 좀 다른 의미에서 '빈약한 철학'을 지적하는 말들이 많지만 실상은 'poor philology'(나라면 '빈약한 공부'라고 옮기고 싶다)부터가 문제되는 것 아닐까? 필롤로지의 기본은 차근차근 읽는 것이다(짜집기를 글쓰기와 혼동하는 포스트모던한 공부는 공부 이후에 하는 것이다)...

07. 0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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