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먹으며 신간들을 검색해보다가 두 권의 책이 관심을 끌기에 주문을 넣었다. 테어도르 데일림플의 <브레이크 없는 문화: 문화엘리트와 대중>(이카루스미디어, 2007)과 주디스 허먼의 <트라우마: 가정폭력에서 정치적 테러까지>(플래닛, 2007)가 그 두 권의 책이다. 공통점은 둘 다 저자가 의학전공자라는 것. 그리고 두 권 다 관심을 끄는 신생출판사의 책이라는 것(배송이 늦어지는 건 그런 이유에서인가?).

 

 

 

 

먼저, <브레이크 없는 문화>는 "의사이자 작가인 테어도르 데일림플의 현대문명에 대한 비판적 에세이"라는데, 저자는 생소하다. 하지만 목차가 흥미를 끈다. 크게 2부로 나뉘어져 있는 책의 "전반부에서는 문학과 예술에선 인간의 본성에 대한 탐구와 셰익스피어, 마르크스, 투르게네프, D. H. 로렌스, 버지니아 울프 등의 문학 작품들과 제임스 길레이, 메리 카사트, 뒤샹의 미술작품들 그리고 현대의 센세이셔널리즘에 대한 성찰을 통해 퇴락해가는 현대 문화의 일반적인 특징을 설명"하고, "후반부에서는 정치와 사회에 대한 에세이가 주를 이루는데 현대국가에서 점차 비대해지고 있는 관료주의를 비판하며 복지라는 명목으로 국민을 스스로의 삶을 개척할 수 있는 의지를 가진 인간이 아니라 사회구조의 노예로 만들고 있는 현상을 설명한다"고 한다.

원제는 <우리시대의 문화, 거기서 뭐가 남을까?(Our culture, What's left of it)>(2005) 정도로 보이며, 논조로 보아 '우리시대의 쓰레기 문화들'에 대한 분노/분통을 담고 있는 듯하다. "다양한 글들을 통해 지은이는 현대사에서 독재와 권위주의의 폐해에 분노한 우리 사회는 전통에 대한 거부와 센세이셔널리즘을 찬미하며 정작 보존해야 할 권위나 가치관마저 잃어버린 채 대중문화의 비속성과 타락을 찬양하고 고무하기까지 하고 있지는 않는지를 묻는다."로 정리될 수 있는. 가령 '쓰레기, 폭력 그리고 베르사체 그런데 그것이 예술일까?' 같은 절 제목이 이 책의 성격을 집약해주는 듯.

국역본의 부제는 '문화엘리트와 대중'이지만 여기서 '문화엘리트'는 중국의 관리를 뜻하는 '만다린'의 번역이다. 다분히 부정적인 뉘앙스를 담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겠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문학 분야의 저자들을 포함해 사회 제도와 전통에 대한 비평가들은 문명이 적어도 변화만큼이나 보존을 필요로 하며 무절제한 비평주의나 유토피아적 관점을 우선시하는 비평주의는 치명적- 사실 파괴적 - 일 수 있다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말하자면 지식인은 스스로 지적 오만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할 필요가 있다."  

역자는 <나타샤 댄스: 러시아 문화사>(이카루스미디어, 2005)를 우리말로 옮긴 채계병씨이다(고유명사 표기에 약간의 아쉬움을 갖게 되지만 이 만한 분량의 러시아 문화사를 번역해낸 노고는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둘러보니 그가 번역한 책으로 카트린 클레망의 <악마의 창녀>(새물결, 2000)도 나는 갖고 있다(기억엔 1/3쯤 읽었던 듯하다). 그 책의 부제가 '20세기 지식인들은 무엇을 했나'인데, 일종의 지식인 소설로서 보부아르의 <레망다랭>('만다린들'이란 뜻)과 크리스테바의 <사무라이들>의 계보를 잇는 성격의 책이다(이 책들은 모두 절판된 듯하다). 소설의 내용과 무관하게 계열체를 만들어보자면, 지식인들은 만다린이거나 사무라이이거나 창녀 들이다.  

이어서 주디스 허먼의 <트라우마>. 소개에 따르면, "지은이 주디스 허먼은 가정폭력이든 정치적 테러이든 폭력의 메커니즘은 어디에서나 동일하며, 이러한 폭력을 종결짓기 위해서는 인권 운동 같은 정치적이고 공적인 행위의 개입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트라우마를 개인적 차원에서만 다루거나 해결하려고 해서는 곤란하다는 주장이겠다.

그래서 덧붙여진 것이 "'외상을 경험한 개인들과 마찬가지로, 외상을 경험한 국가 또한 외상을 재경험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를 기억하고, 애도하며 속죄해야 한다'는 이 책의 문장은 그러한 지은이의 생각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는 말이겠고. "때문에, 이 책은 인간이 폭력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지, 얼마나 사악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책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이겨나가기 위한 가능성을 동시에 열어보여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책은 10년전인 1997년에 출간됐는데 여성운동가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표현을 빌면 '하나의 이정표'가 될 만하다고. 책을 낸 플래닛에서는 <우울증에 반대한다>(2006)를 작년에 처음 냈었는데, <트라우마>는 그 <우울증>과 나란히 꽂아둘 만하다.

Father Daughter Incest New Edition Cover

한편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듯한 저자 주디스 허먼의 또다른 책으론 <부녀 근친상간(father-daughter incest)>(하버드대출판부, 2000)이 눈에 띈다. 이 또한 '트라우마'감이지만 문학에서는 자주 등장하는 소재이기도 하여 읽어볼 만하겠다는 생각은 든다. 당장에 나보코프의 <롤리타>만 하더라도 '부녀 근친상간'의 외양을 갖고 있지 않은가. 사실 <죄와 벌>과 <롤티타>에서의 근친상간 모티브에 대해서는 얼마전부터 페이퍼를 쓰려고 짬을 보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7월에는 몇 자 적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07. 06. 22.

P.S. 대저 책만 보면 손가락이 근질거리는 나의 습성은 어떤 트라우마의 소산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래도 브레이크가 좀 필요한 듯싶다(진득하게 책을 읽고 번역을 해야 할 시간에 이러고 있으니 말이다). 이건 어딜 가서 구해야 하나? 감옥에라도 가야 하나? 프리즌 브레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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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수많은 역사와 생존이 담긴 ‘트라우마’
    from 일다의 블로그 소통 2009-04-25 10:13 
    마음의 고통에 대해서 많이들 이야기합니다. 심리적 어려움에 대한 지식이 전달되면서 누군가는 자신의 고통을 이해하게 되었을 테고, 누군가는 변화와 회복의 기회를 얻었을 것입니다. 만약 이곳 저곳 몸이 아픈데 왜 아픈지 알지 못한다면 통증 앞에서 참으로 무기력하게 되지요. 마찬가지로 내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알지 못한다면, 특히나 혼란스럽게 느껴지는 마음의 고통은 더 깊어질 우려가 있습니다. 심리장애 '아는 것이 힘', 의미가 정확히 사용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