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일이란 게 주말과 휴일에 오히려 일이 더 많다. 많은 걸 보류하고 생략하더라도 몇 개의 페이퍼 거리는 꼭 남기 마련이다. 얼마전에 나온 'How To Read' 시리즈에 대한 가장 '도발적인' 리뷰를 옮겨오는 것도 그런 거리의 하나이다. 필자가 현직 편집장인지라 인문 시리즈에 대한 '감각'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리뷰이다. 

컬처뉴스(07. 06. 15) 역사상 가장 도발적인 사상과의 만남

다른 편집자들은 모르겠지만, 직접 책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내가 가장 해보고 싶은 작업 중 하나는 세계 유명 사상가들의 사유를 알려주는 입문서 시리즈를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런 시리즈가 나올 때마다 꼭 챙겨보곤 하는데, 특히 내가 주목해 보는 것은 ‘의심의 거장들’이라고 불리는 칼 맑스, 프리드리히 니체,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각각의 시리즈가 어떻게 다루고 있느냐이다(‘의심의 거장들’이라는 유명한 표현은 프랑스의 철학자 폴 리쾨르가 자신의 1965년 저서 『해석에 관하여: 프로이트에 관한 에세이』에서 처음 이들에게 붙여준 것이다).

내가  ‘의심의 거장들’을 다루고 있는 방식을 눈여겨보는 첫 번째 이유는 개인적인 이유다. 최소 열 명 이상을 다루고 있는 각 시리즈의 모든 책을 매번 다 읽을 수 없는 나로서는 몇 권만 집어들 수밖에 없는데 이왕 집어들 거면 맑스, 니체, 프로이트를 집어든다. 즉, 이 3인방은 이들과 관계된 책이라면 무엇이든 집어들만큼 내가 좋아하는 사상가들이다.

두 번째 이유는 제법 학문적인, 그러나 당연히 주관적이기도 한 이유인데, 나는 ‘의심의 거장들’이라는 데 그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는 이들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시리즈라면 다른 사상가를 다룬 수준도 뻔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이 ‘의심의 거장들’을 어떻게 다루고 있느냐는 내게 해당 시리즈의 수준을 가늠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인 셈이다.



“우리 시대 교양인을 위한 고품격 마스터클래스”라는 문구와 함께 첫선을 보인 “HOW TO READ”(웅진지식하우스) 시리즈를 보는 내 관심도 바로 여기에 맞춰져 있다. 내가 즐겨 사용하는 이 리트머스 시험지는 삼단, 즉 "누가 썼는가", "잘 썼는가", "쉽게 썼는가"라는 기준으로 이뤄져 있는데 각 단을 모두 빨간색으로 변색시키면 합격이다.

먼저 ‘“누가 썼는가”. 이 시리즈의 맑스, 니체, 프로이트 편은 각각 피터 오스본, 키스 안셀-피어슨, 조시 코언이 맡았다. 국내에 소개된 바 있는 인물은 안셀-피어슨이 유일하나, 이들은 모두 자기 분야에서 한몫을 단단히 하고 있는 젊은 연구자들이다(오스본은 1958년생, 안셀-피어슨은 1960년생, 코언은 1970년생).

특히 오스본은 이런 입문서의 필자로 먼저 소개되는 게 안타까울 정도인데 그의 주저 『시간의 정치학: 모더니티와 아방가르드』(1995)와 『문화이론에서의 철학』(2000)도 곧 소개되기를 바랄 뿐이다. 안셀-피어슨의 경우도 마찬가지. 그는 국내에 들뢰즈 연구(『싹트는 생명: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로 먼저 알려졌지만, 사실 영미권의 떠오르는 니체 번역자(대표적으로는 『도덕의 계보학』 등)이자 연구자이다. 그가 쓴 니체 연구서만 해도 『니체와 근대 독일철학』(1991), 『니체 대 루소: 니체의 도덕/정치사상 연구』(1991), 『새로운 니체의 운명』(1993), 『정치사상가로서의 니체 입문: 완벽한 니힐리스트』(1994) 등 네 권에 달한다.

가장 의외의 인물은 코언이다. 물론 영미권 대학 중 정신분석학을 정식 학과로 두고 있는 대학이 거의 없다는 실정을 감안해도, 코언은 영미 포스트모던 문학, 특히 레이먼드 카버와 폴 드 만 전공자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아우슈비츠라는 트라우마에 천착하는 ‘수용소 문학’을 연구 중이다(실제로 그의 최근작은 『아우슈비츠에 끼여들기: 예술, 종교, 철학』이다). 그러나 전공보다 부전공에 더 강한 인물이 꽤 있고(가령 『제국』으로 유명한 안토니오 네그리는 정치철학자이기 전에 법학자였다), 그가 꾸준히 연구성과를 발표하고 있다는 점은 사실이니 일단 이 시리즈의 필자 선택은 빨간색.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가장 중요한 건 두 번째 기준, 즉 “잘 썼는가”이다. 내 관심을 염두에 둔다면, 여기서 “잘 썼는가”라는 질문은 이들이 ‘의심의 거장들’에게 “그 명성에 걸맞은 대접을 해줬느냐”라는 질문과 같은 것이다. 각각 1883년, 1900년, 1939년에 죽은 맑스, 니체, 프로이트를 오늘날에도 여전히 ‘의심의 거장들’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일부 사람들은 그냥 버릇처럼 그렇게 부를 뿐이라고 해도, 이들의 의심이 여전히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시사해 주기 때문이다. 그도 아니라면 이들이 제기한 의심에 우리가 여전히 속시원한 답변을 못 내리고 있기 때문이거나. 그렇다면 이들에게 걸맞은 대접이란 이들의 의심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 의심의 유효성(그도 아니라면 함의)을 밝혀주는 것이리라.

그런데 도대체 이들을 한데 묶어 ‘거장’이라고 칭할 수 있게 한 그 의심은 무엇일까? 우리는 이 별명의 창안자인 리쾨르의 언급을 참조할 수 있을 것이다. 리쾨르가 보기에 이들은 자본주의가 됐든, 도덕이 됐든, 의식이 됐든 연구 대상의 겉모습을 꿰뚫고 들어가 “진정한 세계, 새로운 진리 영역의 지평을 밝혀냈다”. 또한 이들은 의심을, 비판을 위한 비판의 수단이 아니라, 새로운 “해석의 기술”로 만들어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회의의 대가들’이 아니라 ‘의심의 대가들’이라는 것이다.

리쾨르의 이런 언급을 염두에 두고 본다면 가장 돋보이는 것은 맑스 편이다. 오스본은 『자본』 제1권의 “상품의 물신적 성격과 그 비밀”(제1장 4절)을 첫 번째 발췌문으로 골랐는데, ‘상품 물신주의’에 대한 오해를 지적하며(오스본에 따르면, 맑스가 말한 상품 물신주의란 상품에 대한 욕망의 고착화가 아니라 생산의 사회적 관계, 노동과 가치의 이중적 성격 등을 은폐하는 환상을 지칭한다), 맑스가 상품처럼 단순해 보이는 것에서 어떻게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동학을 읽어내는지 설명하는 부분은 무릎을 탁 치게 만들 정도다. 요컨대 맑스는 ‘노동의 산물인 하나의 물리적 객체’라는 상품의 겉모습을 의심함으로써, 상품의 사회적 의미를 드러내는 그만의 해석체계, 즉 ‘정치경제학 비판’을 창안했다는 것이다.

물론 안셀-피어슨과 코언 역시 니체와 프로이트의 ‘의심’이 어떻게 “진정한 세계, 새로운 진리 영역의 지평”을 밝혀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더 말하면 스포일러가 난무하게 될 테고, 내게 허락된 지면도 줄어들고 있으니 이쯤에서 이만. 아무튼 그래서 두 번째 빨간색.

마지막으로 “쉽게 썼는가”. 사실 이 문제는 좀 복잡하다. HOW TO READ 같은 해외 시리즈의 경우, 번역의 문제(더 나아간다면 담당 편집자의 교정교열 능력이라는 문제까지)가 중첩되어 있기 때문이다. 번역의 경우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옮길 수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아무튼 먼저 각 책의 원문을 보건대 필자들은 자신들이 다루는 해당 사상가들의 저작 중 핵심적인 부분을 직접 읽는다는 이 시리즈의 취지를 잘 따른 듯하다. 그 ‘핵심적인 부분’이 그리 길지도 않고, 그 발췌 부분을 중심으로 각 사상가의 삶과 사유를 명쾌하게 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은 아무래도 이 시리즈의 책임편집자 사이먼 크리칠리(그 역시 1960년생으로서 촉망받는 연구자이다)의 공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편 번역의 경우도 별다른 문제없이 술술 읽힌다. 인터넷서점의 한 독자서평에 의하면 데리다 편의 번역은 좀 의아한 면이 있지만(*한 독자는 '로쟈'인 듯하다), 그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사상가들을 다룬 책들도 적절한 번역자를 만난 듯싶다. 특히 셰익스피어 편을 옮긴 이다희(그는 셰익스피어 전집을 번역 중이기도 하다), 히틀러 편을 옮긴 안인희(그는 히틀러 평전을 옮긴 바 있다)는 믿을 수 있는 번역자이다. 아무튼 그래서 또 빨간색.

정리하자면, 관심 있는 분들은 꼭 자신이 좋아하는 사상가를 골라 이 시리즈의 한 권을 찾아볼 것은 권유하는 게 내 결론이다. 이 시리즈의 또 다른 장점은 저렴한 가격(9,000원)에 고급 사양(표지나 본문 디자인이나 얄미울 만큼 깔끔하다)이라는 데 있다. 다만 아쉬운 건 이 시리즈 역시 국내 기획물이 아니라는 점. 언제쯤이면 우리는 우리 손으로 만든 이런 시리즈를 갖게 될 수 있을까?(이재원/ 그린비 편집장) 

07. 06. 17.

P.S. 이 시리즈에 대해서는 나도 진작에 언급을 해둔 터이고 몇 개의 페이퍼를 올리기도 했다. <마르크스>와 <니체>는 몇 장씩 훑어보았지만 저자가 가장 생소했던 <프로이트>는 아직 들춰보지 못했었는데, 필자의 '뒷조사' 덕분에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게 됐다(단, 한 가지 착오가 있는 듯한데, '폴 드만' 연구자는 조시 코언이 아니라 톰 코언이다). 한데, 이 리뷰를 굳이 '세계의 책'으로 분류해놓은 것은 '국내 기획물이 아니라는 점'을 고려해서가 아니라 아직 번역/소개되지 않은 책이 조만간 햇볕을 쐬었으면 하는 바람에서이다. 가장 첫손에 꼽을 만한 책은 필자도 언급하고 있는 피터 오스본의 <시간의 정치학>(1995)이고 사실 이건 최근에 내가 읽기 시작한 책이기도 하다(이미지가 뜨지 않아서 그냥 <마르크스>로 대체했다).

더불어 꼽자면 <프로이트>의 저자 조시 코언의 <아우슈비츠에 끼여들기: 예술, 종교, 철학>(2003). 아우슈비츠에 관한 아감벤과 바우만의 책들과 함께 읽어볼 만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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