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와 문학사이' 22번째는 소설가 백가흠 편이다. 약력상으론 1974년 전북 익산에서 태어나 명지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으며 200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광어>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첫 창작집은 <귀뚜라미가 온다>(문학동네, 2005). 제목상으론 좀 소심해보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이 작가가 '귀뚜라미'급이 아니라 '광어'급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내가 매력을 느끼는 건 그가 '날것'을 다루는 솜씨이다.

경향신문(07. 06. 16) [작가와 문학사이](22)백가흠-끔찍한 진실 적나라한 서사
잠시, 불결한 육체가 죄악과 나뒹구는 장면을 감상해보자. “달구의 늙은 노모가 달구에게 매를 맞고 있다. 노모의 검버섯 곱게 핀 뺨이 벌그죽죽하다. 바람횟집의 남자가 막 여자의 질 안에 삽입을 시작했을 때, 달구분식의 노모는 가지런히 쪽 찐 머리가 일순 헝클어지도록 세차게 귀뺨 한 대를 얻어맞았다. 천장으로 넘어온 여자의 웃음소리는 가는 신음 소리로 변하고 있다. 바람횟집 여자는 자신의 신음 소리가 새어나가지 못하게 엎드려서 손으로 입을 막고 있다. 달구의 노모도 비슷하다.”

백가흠의 첫 번째 창작집 ‘귀뚜라미가 온다’의 표제작 ‘귀뚜라미가 온다’는 폭력과 섹스가 동거하는 기묘한 장면에서 시작된다. 같은 시간 한 집에서는 아들이 늙은 어미를 두들겨패고 얇은 벽 너머의 다른 한 집에서는 젊은 남자가 ‘엄마’라고 부르는 여자와 교접한다. 장면은 계속된다. 가령 남편은 인터넷 채팅으로 아내의 몸값을 흥정한 뒤 아내에게 매춘을 강요하고 ‘아버지’처럼 보이는 고객은 아내의 음부에 “둘둘 말은 지폐를 끼워 넣는다”(‘밤의 조건’) 혹은 자발적 매춘으로 생계를 유지해온 아내와 일가족 모두를 죽이고 자살하는 남편은 어떤가(‘구두’). 그도 아니면 어린 딸을 티켓다방에 팔아넘기는 아버지는(‘배의 무덤’).
백가흠 소설의 여자들은 그렇게 아버지 혹은 남편의 손에 속절없이 맞고 피 흘리고 죽어간다. 때리는 사람이나 맞는 사람이나 모두 인간이라는 자각은 일찌감치 접어둔 채, 아니 인간이기를 포기한, 마치 본능으로만 살아가는 동물과도 같다. 그러니 어떤 평론가의 말을 빌려와 이들이 상연하는 드라마를 ‘비루한 동물극장’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충격적인 장면들이 낯설지만은 않다. 불쾌하고 역겹고 끔찍한 병리적인 가족 이야기는 이미 텔레비전의 고발 프로그램에서 익숙하게 봐온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전능한 가학적 폭력을 휘두르는 주인 남자(유사 아버지)가 있어, 정신지체 장애인인 ‘여자’를 부인이 보건 말건 수시로 강간하고 심지어 ‘여자’의 젖을 독점하기 위해 유아살해까지 서슴지 않는 엽기적인 이야기는 어떤가.
실제로 백가흠의 ‘배꽃이 지고’는 모 프로그램에서 다룬 이 반인륜적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고발 프로그램이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낯선 개인들을 사회적 네트워크 바깥에 존재하는 예외로 괄호침으로써 이러한 이야기를 충격적이지만 흥미로운 에피소드로 소비하게 하는 반면, 백가흠은 이러한 패륜과 악덕의 이야기를 사회병리적으로 서사화함으로써 좀더 두껍게 만든다. 그리하여 백가흠 소설의 신경향파적 에피소드는 우리 사회의 병리적 현실과 그러한 현실에 내장된 남근주의적 폭력을 진단하고 해부하려는 작가적 자의식을 거치면서 사회비판적인 심리극으로 변모한다. 그리고 그 심리극의 중심에 아버지가 있다.
그런데 그 아버지는 생각만큼 권위적이고 파워풀하지 않다. 오히려 이 즈음 인구에 회자되는 연민을 자아내는 가련하고, 심지어 착하기까지 한 존재에 가깝다. “한 번도 닦아 신지 않은 듯한 구두, 먼지와 때가 굳어 가죽의 일부가 되어버린 구두”(‘구두’)는 그 자체로 왜소하고 빈약해져버린 이 즈음의 아버지를 상징한다. 그러나 아무리 어머니의 외피를 두르고 어머니 같은 캐릭터를 연기한다고 해도, 여전히 아버지들은 힘이 세다. 그들의 불쌍한 모습에 현혹되어 그들의 가학과 폭력을, 그러한 무자비한 공격에 신음하고 피흘리는 존재들을 은폐해서는 안 된다.
백가흠 소설은 이 세계에서 여전히 자행되는 불쾌하고 불편한 진실을 불쾌하고 불편한 방식으로 적나라하게 까발린다. 그리하여 여전히 종교와 법과 국가라는 상징적 아버지의 이름으로 무서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음을 고발한다. ‘성탄절’에서 연출되는 신성 모독의 이야기나 ‘루시의 연인’에서 주인공 남자의 변태적 상상력의 기원을 왜곡된 군대문화에서 발견하는 방식 또한 이에서 멀지 않다. 그러니 백가흠 소설에서 그려지는 지옥도가 우리를 힘들게 하더라도 노여워하지 말자. 그것이야말로 우리 삶의 끔찍한 실재의 모습이니. 그 모습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우리 독자가 갖춰야 할 윤리적 태도일는지도.(심진경|문학평론가)
07. 06. 17.

P.S. 최근 출간된 <박범신이 읽는 젊은 작가들>(문학동네, 2007)에는 '젊은 작가' 12명의 한 사람으로 선발된 백가흠과 그의 은사이기도 한 소설가 박범신의 좌담이 포함돼 있다. 책은 "2005년 가을에서 겨울 사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주최로 열린 '금요일의 문학이야기'"를 묶은 것으로 "소설가 박범신이 2000년대 한국문단의 주목받는 젊은 작가들과 만"나서 나눈 대화의 기록이다. 2000년대 젊은 작가들에 관심을 갖고 있는 독자들에겐 유익한 길잡이가 될 만하다. 관련기사를 하나 옮겨놓는다. '역사의 부채'가 없는 '행복한 글쟁이들'의 한 사람인 백가흠이 '끔찍한 진실, 적나라한 서사'의 작가라는 게 왠지 모순처럼도 느껴지는군(작가의 의도대로라면 '모순' 대신에 '불쾌'라고 적어야겠다)...
동아일보(07. 06. 15) '역사의 부채’ 없는 행복한 글쟁이들
“누구는 보안업체 다니고 누구는 경비를 하고 누군가는 세일즈 하는 것처럼 소설 쓰는 일 역시 일반 직장이라고 생각합니다.”(소설가 이기호 씨) 젊은 작가들이 선배들과 다른 문학관을 밝혔다. '박범신이 읽는 젊은 작가들’(문학동네) 에서다. 이 책은 소설가 박범신(61) 씨가 30대 작가 12명을 초청해 작품과 삶에 대해 나눈 이야기를 묶은 것이다. 생생한 구어를 그대로 옮겨 현장감을 살린 덕분에 젊은 작가들의 다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소설집 ‘이상 이상 이상’과 ‘우리는 달려간다’를 낸 소설가 박성원(38) 씨. 그는 “문학이 어떻게 보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데, 가장 요긴하게 사용한다 해도 가위질 같은 걸 하다가 피가 났을 때 임시로 지혈하는 정도밖에 없는데, 그런데 종이책이 그렇게 아무짝에도 소용없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절대 억압하지 않는다”고 문학의 의미를 에둘러 말한다. 박 씨는 “가방은 물건을 넣고 다니는 도구인데, 그게 루이비통이 돼 버리면 어떤 사람은 흠집 날까 봐 자주 들고 다니지도 못하더라”며 “이렇게 진짜와 가짜가 역전되는 현대를 문학으로 옮기려는 것”이라고 소설관을 밝혔다.
지난해 ‘낙서문학사’를 출간한 김종광(36) 씨는 “소설이 갈등의 산물이라는데 사실 이해가 잘 안 가서 인물 간의 갈등 국면을 짧게 처리한다”며 기성관념에 반기를 든다. 그는 그러면서도 “소설을 안 쓰면 허파에 바람이 든 것 같다”며 글을 쓸 수밖에 없다고 한다.
윗세대와 달리 소설 쓰기가 숭고하다거나 그에 대해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이기호(35) 씨. 그는 “일종의 벤처인데, 경제논리에 휘말리지 않는 것”이라고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명쾌하게 정의한다. “내 글이 화염병이 돼야 한다거나 조국 통일에 기여해야 한다는 생각도 없으며 그래서 오히려 행복한 세대가 아닌가 한다”면서 그는 ‘문학 아니면 죽음을 달라’던 선배 세대와 선을 긋는다.
서울내기여서 사투리 하나 몰랐던 데다 분자생물학과 출신이어서 문학의 길에 들어서기 쉽지 않았다는 심윤경(35) 씨. “문단에서 고졸이나 마찬가지인데 그게 악착같은 헝그리 정신을 주는 것 같다”고 말한다. 다시 태어나도 글을 쓰겠느냐, 혹은 절대 쓰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김숨(33) 씨는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며 중요한 것은 ‘현재’라고 말한다. “소설이라는 게 축복일 수도 있고 저주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살아가면서 매달릴 대상이 있다는 것에 대해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때때로 독자에게 불쾌함을 요구한다”고 소설의 의도를 당당하게 밝히는 백가흠(33) 씨, “작가는 언어로써 독자를 유혹하는 존재”라는 명료한 작가관을 가진 오현종(34) 씨…. 젊은 작가들은 이 책을 통해 “우리는 계속 쓸 것이며 다른 모든 건 부차적인 일”이라고 말한다. 젊은 작가들과 대화한 박범신 씨는 “이들의 고백과 발언이 어떻게 작품으로 완성되는지 좇아가 보는 것이야말로 우리 소설문학의 미래”라고 소감을 밝혔다.(김지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