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출간된 스튜어트 휴즈의 서구 지성사 3부작에 관한 리뷰를 어제 옮겨놓았는데('20세기 서구 지성사의 밑그림') 오늘 학교에 나오다가 잠깐 서점에 들러 3권 <지식인들의 망명>(개마고원, 2007)을 손에 들었다. 1, 2권과는 달리 소장하고 있는 책이 아닌데다가(사실 3권은 기억에도 없던 책이다. 내가 대학에 들어올 무렵엔 이미 절판된 상태가 아니었나 싶다) 3부작 중 개인적으론 가장 흥미를 갖는 시대이기 때문이다(아무래도 가까운 시대에 흥미를 갖게 된다). 게다가 '개역판 역자 후기'를 읽어보니 번역도 다시 손질했고 책의 만듦새도 좋은 편이다.

 

 

 

 

나귀님의 페이퍼에서 봤을 때는 초판이 <지성의 대이동>이었는데, 역자후기를 보니까 <파시즘과 지식인>으로 돼 있다. 같은 출판사에서 두번 책을 낸 것인가 해서 도서관 소장도서를 검색해보니 <지성의 대이동>(한울, 1983)과 <파시즘과 지식인: 지성의 대이동, 1930-1965년의 서구사회사상>(한울, 1992)이라고 뜬다. 그러니까 처음 나온 <지성의 대이동>이 '대단히 신통치 않은' 성적으로 일찍 절판된 이후 거의 10년만에 다시 나오면서 한번 '제목 갈이'를 했던 것. 해서, 출판사를 달리하여 이번에 새로 나온 개정판의 제목 <지식인들의 망명>은 세번째 타이틀이 되겠다.  

어제 읽은 경향신문의 리뷰에서도 최근에 나온 <다른 곳을 사유하자>(푸른숲, 2007)와 같이 읽어볼 것을 권유했는데, <지식인들의 망명>의 목차를 보니 아주 잘 맞아떨어진다는 생각이 든다(이럴 땐 성찬을 앞에 두고 물수건으로 손을 닦는 기분이다). 하지만 책을 통독할 여유는 없기에 서문만 읽어보려다가 저자가 감사를 표하는 이름들에서 또 '걸려들었다'. 또 몇 자 수다를 늘어놓게 된 이유이다(나의 타협안은 경쟁후보였던 '파슨스 vs 밀스'란 페이퍼를 다음으로 연기하는 것이다). 휴즈의 서문을 읽다가 얼핏 떠오른 그 동네의 풍경을 잠시 들여다본다.

<지식인들의 망명>은 <의식과 사회>(1958)과 <막다른 길>(1968)의 후속편으로 1977년에 출간됐는데(10년 터울로 한권씩 낸 셈이군), 서문에서 휴즈는 자신에게 도움을 준 몇 사람의 이름을 들고 있다. "나의 집필 마지막 해에는, 만약 그들이 나의 원고를 읽었더라면 상당히 중요한 지적들을 많이 해주었을 세 명의 인물을 죽음이 앗아가버리고 말았다."(6쪽) 음, 그러니까 '도움을 준' 이들이 아니라 '도움을 줄 뻔했던' 이들이 되겠다. 그 이름들은 리히트하임(1912-1973), 뢰벤슈타인(1891-1973), 그리고 잉게 베르너 노이만 마르쿠제(1913-1972)이다.

 

 

 

 

"그 중 리히트하임은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나의 지식을 여러 각도에서 풍요롭게 해준 인물이었으며," 게오르그 리히트하임은 루카치 전문가이기도 한데, 그의 책으로 <루카치>(시공사, 2001) 등 여러 권이 국내에 소개된 바 있다. "베버 서클의 마지막 중요인물이었던 뢰벤슈타인은 당시 앰허스트 대학 4학년이던 나를 처음으로 독일 사회사상계로 안내해준 사람이었다." 이 뢰벤슈타인의 책으론 <현대헌법론>(교문사, 1975), <비교헌법론>(교육과학사, 1991)이 번역돼 있다. 법학자 칼 뢰벤슈타인이 동명이인이 아니라면.

"또한 이 연구의 중요 등장인물들 중의 한 사람(프란츠 노이만)의 미망인이자 또 다른 한 사람(허버트 마르쿠제)의 부인이기도 한 잉게 베르너 노이만 마르쿠제는 내가 그녀의 신념의 생명력을 충분히 표현하는 데에 그녀와 나의 우정이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1937년에 찍은 한 사진을 보니 세 커플이 등장하는데, 왼쪽부터 프란츠/잉게 노이만, 골드/레오 뢰벤탈(리오 로웬달), 허버트/소피 마르쿠제 부부이다. 잉게 노이만(왼쪽에서 두번째)이 미망인이 되고 나서 허버트 마르쿠제(오른쪽에서 두번째) 재혼했던 모양이다. 

찾아보니, 프란츠 노이만(1900-1954)은 레오 뢰벤탈(1900-1993), 허버트 마르쿠제(1898-1979)와 함께 망명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일원으로서 역시나 파시즘 분석으로 잘 알려진 정치학자인데 1954년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단행본 저작은 국내에 소개된 적이 없는 듯하며 <정치이론과 이데올로기 입문>(돌베개, 1984)이 공저로 나와 있다. 그리고 프란츠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던 잉게 노이만은 1956년에 마르쿠제와 재혼했다(그녀 또한 <유럽의 전쟁범죄> 등의 저작을 갖고 있다). 참고로, 뢰벤탈(로웬달)의 책으론 <문학과 인간의 이미지>(종로서적, 1983)과 <문학과 인간상>(이화여대출판부, 1984)이 출간됐었다(같은 책의 두 번역서이다).

 

 

 

 

이어지는 휴즈의 감사. "나의 감사하는 마음은 우선, 계속되는 원고를 세심하면서도 항상 유머를 잃지 않고 타이핑해준 도로시 스킬리 양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며, 두번째로는 박사학위 과정 때 나에게 배운 두 학생 제이와 로빈슨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다." 사실 이 대목 때문에 페이퍼 아이템을 잡은 것인데, 여기서 두 학생 제이와 로빈슨은 각가가 마틴 제이와 폴 로빈슨을 가리킨다. "나는 그들의 책 <변증법적 상상력>과 <프로이트 좌파>를 4장과 5장의 각주에서 상당히 많이 활용했다."

인문학 서지에 밝은 이라면 이 두 권의 책이 국내에 번역/소개되었다는 걸 단박에 알 수 있을 것이다. 전자는 <변증법적 상상력: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역사와 이론, 1923-1950>(돌베개, 1979)로 나온 책이고 저자의 박사학위논문이기도 하다(제이의 책으론 <아도르노>가 출간돼 있고, <시각의 헤게모니>에도 그의 논문이 실려 있다). 공역자 중 한 사람인 황재우는 시인 황지우의 본명이었다. 그리고 <프로이트 좌파>는 <프로이트 급진주의>(종로서적, 1981)라고 번역된 책으로, 빌헴름 라이히, 게자 로하임, 허버트 마르쿠제에 대한 유익한 입문서이다.

언젠가 소개한 적이 있는데, 마틴 제이의 '20세기 프랑스 사상에서 시선의 절하'란 부제를 갖고 있는 <내려뜬 눈(Downcast Eyes)>(1993)이 프랑크푸르트학파를 다룬 학위논문에 이어서 스승의 작업을 떠올리게 하는 지성사 탐구의 역작이다. 분량이 만만찮지만 마틴 제이의 책들도 재출간/번역되면 좋겠다...

07. 06. 09.

P.S. <지식인들의 망명> 책날개에 실린 저자 소개는 '1961년 뉴욕 출생.'으로 시작한다. 바로 옆에는 붉은 글씨로 'H. Stuart Hughes, 1916-1999'라고 써놓고 말이다. 번듯한 표지에 이런 '깔끔한' 오타라니!..

한편, 오늘자 한겨레에는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공화국으로>(도서출판b, 2007)와 함께 이 3부작에 대해서도 비중 있는 리뷰가 실렸는데(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14691.html), 어인 일인지 저자를 '스튜어트 휴스'라고 표기했다. 물론 'Hughes'를 '휴스'라고 읽는 건 자유이지만 모든 번역본과 다른 언론리뷰들에서 '휴즈'라고 읽는 걸 굳이 독불장군처럼 '휴스'라고 읽는 배짱은 무엇인지?(존경해주어야 할까?) '베냐민'의 경우도 그러하고, 이게 한겨레의 고집인지 고기자의 고집인지 모르겠지만(*한겨레 교열부의 고집이라 한다), 그리고 가라타니 고진에게 갖다붙인 '삐딱이는 나의 힘!'도 나쁘진 않지만, 보기 흉한 건 어쩔 수 없다(이 리뷰는 '스튜어트 휴즈'로는 검색되지 않는다). '에세이'를 굳이 '에쎄이'라고 적는 창비식 표기를 떠올리게도 하는데, 그런 게 '진보'라면 그건 '당신들의 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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