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주간경향(1420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중남미문학 강의에서 멕시코 작가 후안 룰포의 <뻬드로 빠라모>를 다루면서 그에 대해 적었다. 룰포는 미겔 아스투리아스(과테말라), 알레호 카르펜티에르(쿠바)와 함께 붐세대 문학의 물꼬를 튼 작가로 평가된다. 다른 작가들은 하반기 강의에서 다룰 예정이다...
주간경향(21. 03. 29) 화자가 죽은 후에도 계속되는 이야기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거장으로 떠올리는 이름들이 있다. 소설가로 범위를 좁히면 아르헨티나 작가 보르헤스와 콜롬비아 작가 가르시아 마르케스 그리고 페루 작가 바르가스 요사 등이다. 국적을 같이 적었지만, 스페인 식민지였던 역사 때문에 이들의 문학어는 공통적으로 스페인어다. 언어의 장벽이 없기에 스페인문학뿐 아니라 라틴아메리카 문학 전체가 공통의 자산이다. 그렇더라도 지역적으로 낙후된 소위 제3세계에서 어떻게 세계문학의 정점을 이루는 걸작들이 나오게 됐는가는 해명될 필요가 있다.
특히 궁금한 것은 나란히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마르케스와 요사의 성취다(비록 수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는 못했지만, 카를로스 푸엔테스나 훌리오 코르타사르 등도 거장으로 꼽힌다). 라틴아메리카 지역의 소설 붐을 주도했던 ‘붐소설’의 대표 작가들이기도 하다. 보르헤스는 단편소설에만 전념했기에 붐소설 세대 작가들의 직접적인 스승으로 보기 어렵다. 그런 궁금증을 품고 있던 차에 마주한 작가가 후안 룰포다. 1917년생의 멕시코 작가로 1950년대에 대표작 2편을 발표했다. 단편집 <불타는 평원>(1953)과 짧은 장편 <뻬드로 빠라모>(1955)다. 단 2권에 불과하지만, 멕시코 현대문학뿐 아니라 세계문학사의 고전으로 자리매김한 작품들이다.
일반론에 따르면 한 작가가 자기 세계를 정립하는 데 필수적인 두가지 요건은 경험과 언어다. 멕시코 혁명기에 태어난 룰포는 어린시절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차례로 잃는다. 아버지의 형제들까지도 모두 내란 중에 피살당하고 룰포는 불우한 성장기를 보냈다. 가족의 비극과 멕시코의 참담한 현실에 대한 깊은 고민과 숙고가 결국 그의 창작으로 이어지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젊은시절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독학으로 문학을 공부하고 틈틈이 습작했다는 사실이다. 이때 룰포에게 영향을 준 것은 당대의 멕시코문학이 아니라 서구의 모더니즘 문학이었다. 1940년대까지도 찾아볼 수 없었던 실험적 시도가 그의 소설에 나타날 수 있었던 배경이다.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1967)을 예고한 작품으로도 평가되는 <뻬드로 빠라모>만 하더라도 매우 낯설고 전위적인 서사적 실험을 보여준다. 70편의 서사적 조각들의 몽타주적 구성으로 돼 있는 이 소설에서 사건들을 연대기적으로 재구성하는 일이 쉽지 않다. 당장 주인공이자 화자로 등장하는 후안 쁘레시아도가 작품의 중반쯤에서 숨을 거둔다. 화자가 죽은 이후에도 계속되는 이야기!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후안이 아버지 뻬드로 빠라모를 찾아 꼬말라라는 마을을 찾아가 겪는 일들이 줄거리인데, 이 마을은 이미 폐허가 됐고, 그가 만나는 이들은 대부분 죽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아버지 뻬드로 빠라모 역시 저세상 사람이다.
그렇지만 아들 후안의 죽음 이후에 주로 전개되는 것은 마을의 흉포한 권력자였던 아버지 뻬드로의 이야기다.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토지를 빼앗아 부를 축적하고 폭력과 전횡을 일삼는다. 그리고 자신이 평생 사랑했지만 마음은 얻지 못했던 여인이 죽자 마을 사람들에 대한 복수로 꼬말라를 황폐하게 만든다. 그랬던 뻬드로 빠라모도 죽어 저승으로 인도되는 것이 소설의 결말인데, 아들의 이야기보다 더 뒤에 배치됨으로써 소설에서도 어떠한 미래도 차단되는 결과를 낳는다. 멕시코의 비극적 역사에 정확하게 대응하는 소설적 형식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