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주간경향(1416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빌 설리번의 <나를 나답게 만드는 것들>(브론스테인)애 대해 적었는데, 오랜만에 다룬 과학책이다. 지난 서평강의에서 다룬 세 권의 책 가운데 하나였고, 번역상태가 가장 좋았다. 후성유전학과 미생물총에 대한 '입문'으로도 유익하다. 저자의 다음 책도 기대가 된다. 
















주간경향(21. 03. 01) 내 몸에 미생물이 수조마리나 산다고?


리어왕의 대사를 떠올리게 하는 책이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 누구인가?” 리어왕의 주변에서는 아무도 나서지 못했지만, <나를 나답게 만드는 것들>의 저자라면 자격이 있겠다. ‘나를 나답게 만드는 특이한 힘들’에 관해 다루면서 그는 우리가 가진 잘못된 자아감을 교정하고자 한다. 통상 우리 몸을 구성하는 유전자가 하나의 청사진으로서 많은 것을 결정하고, 또 조종한다는 사실까지는 상식이 됐다. 그럼에도 유전자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지는 않으며 우리의 자아는 각자가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견해도 상식에 가깝다. 책에서는 이러한 상식을 새로운 과학적 발견들을 바탕으로 보강하거나 전복한다.
















저자는 유전자 외에도 후성유전학과 미생물군유전체라 불리는 미생물 침입자들이 우리의 행동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다양한 실험결과를 토대로 밝힌다. 이에 따르면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많은 것에 의해 자아가 형성되고 행동이 조종된다. 후성유전학이란 DNA의 염기서열을 변화시키지 않으면서도 유전자 발현에 영향을 미치는 과정을 가리키는데, 이때 형성되는 후성유전적 변형은 자식은 물론 손자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즉 인생에서 부정적 경험이 DNA에 흉터를 남기면 이것이 다음 세대에까지 전달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일례로 아동기에 학대를 받으면 성장해 각종 건강상의 문제뿐 아니라 우울증이나 약물중독, 자살 같은 심리적 문제를 겪을 가능성이 커진다. 더구나 이러한 문제가 자식에게도 후성유전적 표지로 전달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유전학과 후성유전학적 요인의 영향에 대해서는 고개를 끄덕일 수 있지만 미생물의 영향에 대해서는 갸웃거릴 수 있겠다. 놀랍게도 우리 몸에는 세균, 곰팡이, 바이러스, 기생충 등의 미생물이 수조마리나 살고 있으며, 그 무게가 1.3㎏에 달한다고 한다. 이 세균 숫자는 사람의 세포 수보다 많다고 하기에 저자의 표현으로 “우리라는 존재는 인간이라기보다는 세균의 집합체에 더 가깝다.” 중요한 것은 이들 미생물 거주자들이 단지 우리 몸에 기생하는 것만이 아니라 행동에 직접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는 점이다. 위장관의 세균은 우리 몸에 유용한 비타민과 기타 화합물을 만들어내며 뇌에 작용하는 신경전달물질의 주요 원천도 된다. 이들 세균에 의해 기분과 성격, 기질이 조절될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오는 이유다.

요컨대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유전자나 후성유전적 프로그래밍, 그리고 미생물총(마이크로비오타)에 의해 우리가 만들어지며 우리의 행동이 결정된다. 그렇다면 서로의 잘나고 못남에 대해 더 겸손하고 더 관대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특히 중요한 것은 아동과 청소년들에게 긍정적인 자아발견의 기회를 공평하게 제공해야 하는 합리적 근거를 갖게 됐다는 점이다. 후성유전학적 발견에 기대자면 후천적인 환경의 큰 불평등을 개선하는 일이 범죄와 사회적 불안을 줄이는 최선의 방책이 될 수 있다. 저자의 이런 견해에 동의하는 건 어렵지 않아 보인다. “우리 아이들에게 주어진 선택이 물속으로 가라앉을 것이냐, 헤엄쳐 나올 것이냐가 되어서는 안 된다. 헤엄쳐 나올 것이냐, 구조받을 것이냐가 되어야 한다.”

















P.S. 흥미롭게도 저자는 후기에서 <기생충 제국>의 저자 칼 짐머가 지도교수였다고 밝히고 있다. 대중과학서로 잘 알려진 저자이고 국내에도 여러 권의 책이 번역돼 있다. 사제 간의 필력 대결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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