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한겨레에 실린 '언어의 경계에서' 칼럼을 옮겨놓는다. 최근 강의에서 다시 읽은 모리악(모리아크)의 <테레즈 데케루>(1927)의 주제를 간략히 짚었다. 테레즈의 운명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다룬 속편 <밤의 종말>(1935)은 이번 강의에서도 읽지 못했다. 언젠가 다룰 기회가 있으리라..
















한겨레(21. 02. 19) 가문의 정신보다 중요한 것


프랑스 작가로는 앙드레 지드(1947년)에 이어서 195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수아 모리아크는 세대로도 지드의 뒤를 이은 프랑스의 간판 작가다. 하지만 바로 뒤이은 사르트르와 카뮈 같은 실존주의 세대 작가들에 가려진 면이 없지 않다(1957년에 카뮈가, 그리고 1964년에 사르트르가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된다. 사르트르는 거절했지만). 프랑스 문학의 한국 수용에서도 그렇게 앞뒤 세대 작가들 때문에 모리아크는 소홀한 대접을 받은 편인데, 그럼에도 작가로서 얼마간 존재감을 갖는다면 <테레즈 데케루>(1927)에 빚진 바가 크다. 테레즈 데케루는 어쩌면 작가 모리아크보다도 유명한 작품이고 그 주인공이다.


비록 모리아크가 자신의 최고작으로 꼽은 건 아니지만 대중과 평단은 <테레즈 데케루>를 그의 대표작으로 지목해왔다. 작품을 바라보는 관점에 어떤 불일치가 있는 것인데, 줄거리만 보자면 남편을 독살하려 했던 아내의 이야기인 이 소설을 오늘날 작가가 의도한 대로 ‘신을 믿지 않는 인간의 비극’으로 읽는 독자는 드물 것이다. 작품의 의미를 다른 데서 찾을 수 있다는 뜻도 되는데, 그런 가능성은 모리아크가 이 소설의 제목을 처음에 고려했던 ‘가문의 정신’ 대신에 ‘테레즈 데케루’로 바꾸면서 열어놓은 것이기도 하다.



‘가문의 정신’은 이 작품이 묘사하는 사회적 공간을 지배하는 정신이다. 프랑스 랑드 지역의 유력한 집안 출신인 테레즈는 같은 지역의 대지주 베르나르와 결혼한다. 정략적이지만 자연스러운 결혼이었다. 베르나르는 그 지역 남자치고는 세련된 데다가 부자였고 아주 못생긴 남자도 아니었다. 게다가 그의 여동생 안과 누구보다 절친한 사이였던 테레즈는 빠른 안정을 위해 베르나르보다도 결혼을 서둘렀다. 그러나 결혼식 당일부터 그녀의 기대는 어긋나기 시작했고 테레즈는 분노와 환멸을 품게 되었다. 신혼여행지에서 집으로 돌아가면서는 여생을 감옥에서 보내야 하는 유형수의 심정이 되었다. 별다른 교제나 연애감정도 없이 시작하게 된 결혼생활의 불행이었다.


비록 베르나르와의 결혼이 기대와 다른 불행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다른 선택지가 없다면 체념하거나 적응하는 방도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애꿎게도 이제는 시누이가 된 안이 몰락한 집안의 장 아제베도라는 청년과 사랑에 빠진다. 테레즈와 달리 책도 좋아하지 않고 생각도 없었던 안이지만 장에 대한 사랑에 들떠 벅찬 행복감을 느낀다. 안의 편지를 받은 테레즈는 가족의 반대에 봉착한 그녀의 사랑을 응원하는 게 아니라 질투한다. “그녀도 테레즈처럼 행복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테레즈까지 어깃장을 놓으면서 안은 연인과 헤어지고 다시금 가문의 정신에 따르게 된다. 문제는 테레즈가 안과의 관계를 떼어놓기 위해 만난 장에게서 베르나르가 갖고 있지 않은 능력과 매력을 발견한 데 있다. 지적이고 명석한 두뇌를 가진 이 청년은 테레즈가 만난 사람들 가운데 “정신적 삶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테레즈와 장의 불륜관계가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많은 남편 살해 이야기와 <테레즈 데케루>의 차이점이다). 다만 테레즈는 아버지와 남편이 절대적으로 삼는 가문의 정신과는 다른 선택지도 가능하다는 사실에 눈뜨게 될 따름이다. 그것은 테레즈의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는 일이기도 하다. 


아이러니하게도 남편을 독살하려던 테레즈의 시도는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아버지와 남편의 방책으로 법적 책임을 피하게 된다. 그렇지만 그것이 이야기의 끝은 아니다. 이 소설의 열린 결말에서 테레즈는 남편과 별거하면서, 가문의 이름이 아닌 자기의 이름을 갖기 위한 도정의 출발점에 선다. 비록 작가 모리아크의 응원을 받지는 못하지만 독자는 그녀를 응원할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