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중한이라는 말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또 아주 틀린 말은 아니어서 그렇게 적는다. 바쁜 일이 많은 틈에 때때로 다른 궁리를 하기 때문에. 다른 궁리란 장기적인 작업계획을 뜻하는데, 가령 세계문학사나 세계문학의 이론 등을 구상하는 일이 그에 해당한다.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생각할 수 없었을 테지만, 지금은 국내외 연구 현황을(언어의 한계가 있지만 적어도 목록은 볼 수 있다) 대략 가늠해볼 수 있어서 일의 견적을 내는 일이 가능해졌다. 어떤 일에서건 그 규모를 가늠하는 일이 '시작이 반'이라고 할 때의 그 시작이기에.   
















어제오늘 자료를 찾고 수집하고 일부를 프린트한 주제는 '문학의 실패'인데, 우연히 <철학의 실퍠>라는 책을 구하게 되어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제목만으로도 영감을 던져준다). <철학의 종언>이나 <문학의 종말>을 다룬 책들이 한때 유행했었다('책의 종말', 더 구체적으로 종이책의 종말 담론이 얼마나 극성했던가). 아서 단토의 예술의 종말론도 그러하고. 그 연장선상에서, 그와는 초점을 조금 달리하는 주제가 '실패'다. 
















종말 혹은 끝이라는 말은 중의적이어서 '마지막'을 뜻하기도 하지만 '완성'이라는 의미도 갖는다. 서양 형이상학의 종말이란 한편으로 그 완성이란 뜻도 되는 것이다(데리다는 항상 그 중의성에 주목한다). 어제오늘 갖게 된 생각은 그 종말/종언 테제가 실패나 부적응에 대한 교묘한 정당화일지도 모르겠다는 것이다. 혹은 책임 회피에 대한 교묘한 자기방어. 세련된 완곡어법. 실패의 수사학. 
















문학사에 적용하자면, 두 가지 서사가 가능하다. 탄생에서 죽음(종말)에 이르는 자연스러운 경로(유기체적 모델)와 도입과 적용, 작동과 실패로 기술될 수 있는 기계론적 모델. 전자는 문학을 그를 둘러싼 환경 속에 갖다놓는다면, 후자는 문학을 과제상황 속에 위치시킨다. 전자가 가치중립적인 기술을 허용한다면, 후자는 평가적인 언어를 불가피하게 요구한다. 이미 문학 혹은 세계문학을 보는 나의 관점 자체가 후자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되었다. <로쟈의 한국문학 수업>에서 제시한 판단과 평가가 이미 그런 입장을 전제하고 있기에. 
















이미 많은 종말이 예견되었고 현실화되고 있다. <과학의 종말>에서 종말은 어떤 연구 패러다임의 완료를 뜻하지만 <자연의 종말>이나 <탄소 사회의 종말>에서 종말은 우리 문명의 한계와 결함에 대한 경고를 함축한다. 달리 말하면 새로운 과제상황에 대한 대응의 실패다. 문학이라는 발명품 역시 비슷한 운명에 처해질 수 있다(이미 문학에 대한 기대를 접은 평론가들도 있잖은가). 


 


 












때로 자연(본성)도 실패한다. 적응의 무수한 본보기가 있듯이, 부적응의 사례도 차고 넘친다. 철학과 문학 역시 그러한 적응과 부적응(실패)의 사례로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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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3 13: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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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3 14: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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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3 14: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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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3 21: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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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3 22: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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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4 10: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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