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한겨레에 실었던 '언어의 경계에서' 칼럼을 옮겨놓는다. 일본문학 강의차 다시 읽은 모리 오가이의 <아베 일족>에 대해 적었다. 순사를 소재로 한 오가이의 역사소설은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과 비교거리인데, 일본문학에서 근대적 개인의 형상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한겨레(20. 12. 11) 중세와 근대의 충돌이 빚어낸 것
모리 오가이는 나쓰메 소세키와 함께 일본 근대문학의 대표 작가다. 두 사람은 신분과 작품세계에서 많은 차이점을 보여주는데, 그 차이보다 중요한 공통점도 갖고 있다. 서구 유학의 경험이다. 유학 시절 접한 서구의 문학과 사회상이 두 사람의 작가적 출발과 지향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음은 물론이다.
근대문학을 ‘근대의 문학’으로 이해한다면 자연스레 근대라는 새로운 시대적 사회적 조건의 형성이 근대문학의 탄생 조건이다. 그리고 그러한 근대가 서구에서 먼저 형성되고 발전돼온 사정을 감안하면 오가이나 소세키의 유학경험을 과소평가할 수 없다. 그 경험에서 두 작가 모두 근대적 개인으로서의 자각을 갖게 되는데, 그 자각이 작품에 어떻게 반영되는지는 흥미로운 비교 거리다. 예컨대 오가이의 데뷔작 <무희>(를 포함한 ‘독일 3부작’)와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오가이의 <학생>과 그보다 앞서 발표된 소세키의 <산시로>가 자연스럽게 비교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오가이의 <아베 일족>(을 포함해 순사를 주제로 한 역사소설들)과 소세키의 <마음>은 공통의 계기를 갖고 있으면서 두 작가가 살았던 메이지 시대에 대한 인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좋은 비교 대상이다. 공통의 계기라고 한 것은 메이지 천황의 장례식 날 노기 마레스케 육군 대장 부부가 순사한 사건(1912)이다.(노기는 사무라이 전통에 따라 할복자살한다) 가신들이 주군의 죽음을 뒤따른 데서 비롯한 순사는 분명 중세적 생사관의 표현이다. 근대적 개인주의의 관점에 서자면 시대착오적인 행위로까지 치부된다. 그렇지만 위로부터의 급진적인 근대화가 추진된 메이지 시대는 전통적인 가치와 서구에서 유입된 근대적 가치가 혼합돼 있던 시기다. 황국의 신민이라는 의식과 개인이라는 자각은 서로 충돌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 두 가지는 그들의 동시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오가이와 소세키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였다.
순사의 모티브를 간접적으로 다룬 <마음>과 비교하면, <아베 일족>에서 오가이는 아예 17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이를 직접 다룬다. 주군의 허락을 받지 않은 순사가 결국에는 일족의 몰살까지 가져오게 된 실제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오가이는 순사를 둘러싼 이해관계와 순사자의 내면을 묘사함으로써 이 역사소설이 역사적 기록 이상의 의미를 갖게 한다. 일례로, 영주의 음식 시중을 들던 초주로라는 청년은 영주의 병상에서 간곡하게 청하여 순사의 허락을 받는다. 그렇다고 주군에 대한 충의에서만 순사를 조른 건 아니었다. 주변의 시선을 고려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족이 될 노모와 아내가 순사자의 가족으로서 받게 될 상향된 처우를 계산했다. 그러한 계산 속에서 죽음의 슬픔과 비장함은 무게를 잃는다.
그렇지만 그러한 개인적 내면과 계산은 여전히 제한적으로만 나타난다. 아베 일족 몰락의 계기가 되는 아베 야이치에몬의 경우도 그러한데, 임종을 앞둔 영주에게 여러 차례 순사 허락을 받고자 했지만 얻어내지 못한 그는 비록 주군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았더라도 자기 운명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은 무사이고 무사는 첩과는 다른 존재이기 때문이다. 야이치에몬의 이러한 자각에 오가이는 근대적 개인의식을 살짝 겹쳐놓는다. 하지만 이는 곧 화를 부르게 된다. 주군의 허락을 받지 않은 야이치에몬의 순사는 비록 중세 무사도를 따른 모양새이지만 주변의 험담과 조롱에 맞서는 것이면서 동시에 자발적인 의지의 표명이다. 그렇지만 그의 순사는 새 주군의 불만을 사고 그에 대한 장남의 항의는 일족의 몰살을 가져온다. 새롭게 고안한 ‘역사소설’을 통해서 오가이는 메이지 시대 근대인이 처한 모순과 곤궁, 그리고 한계를 우회적으로 그려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