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한겨레 실은 '언어의 경계에서' 칼럼을 옮겨놓는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발표에 즈음하여 1964년 노벨문학상 거부로 화제가 되었던 사르트르를 다시 떠올렸다. 단편 <벽> 이야기를 거기에 덧붙였다...

















한겨레(20. 10. 16) 우연 앞에서 터지는 폭소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 발표가 지난주에 있었다. 미국 시인 루이즈 글릭에게 돌아갔는데 아직 단독 시집이 한권도 소개되지 않은 터라 한국 독자들에게는 미지의 시인이다. 미국 시인으로는 2016년 가수 밥 딜런이 수상한 이후 4년 만이다. 평소 강의에서 미국 작가들의 빼어난 소설들을 읽으며 수상가능성을 점쳐온 처지에서는 조금 머쓱한 결과다. 미국 국적으로는 소설가 대신 시인(가수)이 연거푸 노벨상을 거머쥐었기 때문이다.


문학을 평가하는 궁극의 잣대가 될 수는 없지만 1901년 첫 수상자를 배출한 이래 노벨문학상은 나름의 권위가 되었고 이즈음에는 프랑스의 공쿠르상, 영국의 부커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지목된다. 그렇다면 노벨문학상을 기준으로 문학 최강국은 어디일까? 유럽 편중적이라는 비판은 감안하고서 살펴보면 단연 프랑스가 돋보인다. 제1회 수상자인(그러나 거의 기억되지 않는) 프랑스 시인 쉴리 프뤼돔을 포함하여 15명의 수상자를 배출했다(올 수상자를 포함 13명으로 미국이 그 뒤를 잇는다). 국내에서 많이 읽히는 상당수 프랑스 작가들이 노벨문학상이라는 후광도 거느리고 있는 것이다.

문학적 라이벌이기도 했던 카뮈(1957년 수상)보다는 늦게 수상했지만 철학자 사르트르(1964년 수상)도 알려진 대로 노벨문학상 수상자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는 수상 거부자다. 상의 공정성을 문제 삼았다던가. 그렇지만 노벨상은 수상을 거부한다고 취소되는 건 아니어서 사르트르는 여전히 노벨상을 거부한 수상작가로 기록된다. 게다가 뒷이야기에 따르면 상금은 받았다고도 하니 수상 거부의 진의도 따로 따져볼 문제다.


노벨문학상은 작품이 아니라 작가에게 주어지는 상이기에 수상작이 따로 있는 건 아니다. 간혹 작가의 업적으로 특정 작품이 지목된다 하더라도 원칙상으로는 수상 작가의 모든 작품이 ‘수상작’으로 호명될 수 있다. 사르트르의 경우 1964년에 발표된 자서전 <말>이 수상작으로 일컬어지기도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베르그송 같은 철학자의 수상 전례도 고려하면 사르트르의 문학작품뿐 아니라 <존재와 무> 같은 철학서도 수상작 범주에 들어가는 것 아닌가도 싶다.


사르트르의 문학작품으로는 소설 <구토>와 <닫힌 문> <더러운 손> 등의 희곡 작품이 유명한데, 다섯 편의 단편을 묶은 단편집 <벽>(1939)도 거기에 더할 수 있다. 표제작 ‘벽’은 스페인 내전기에 적에게 포로가 된 주인공 파블로가 총살 직전에 운명의 아이러니로 살아남게 된 이야기다. 아나키스트 조직의 일원인 그는 동료의 은신처를 고발하면 총살을 면해주겠다는 제안을 받는다. 파블로는 특별한 이유 없이, 동료를 위해 희생하겠다는 명분에서가 아니라 순수한 고집으로 제안을 거절한다. 하지만 총살 집행 직전에 장난으로 엉뚱한 은신처를 댄다.


그런데 적을 골탕 먹이려는 의도와 달리 파블로는 살아남는다. 얄궂게도 동료가 원래의 은신처에서 묘지로 옮겨갔는데, 파블로가 둘러대면서 가보라고 한 장소가 묘지였던 것이다. 황당한 자초지종을 알게 된 파블로가 눈물이 날 때까지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는 게 이야기의 결말이다. 흔히 사르트르를 자유의 철학자라고 일컫지만 ‘벽’에서 읽게 되는 건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우연의 놀림감이 된 인간이다. 파블로에게 더 나은 선택이 가능했을까? 자유와 그에 대한 책임이라는 사르트르의 윤리적 교설이 파블로의 상황에도 적용 가능한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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