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한국문학 강의에서 읽은 작가는 최인훈이다. 데뷔작인 <그레이구락부 전말기><라울전>과 <광장><회색인>, 그리고 마지막 장편소설 <화두>를 읽었다. 분량으로는 그렇지 않지만 의의상으로는 최인훈 문학의 8할을 읽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작가 자신이 <광장>과 <화두>의 작가로 기억되고 싶다고 했으니까. 
















개인적으로 <화두>의 완독에는 16년의 시간이 걸렸다. 1994년 초판이 나왔을 때 1권을 읽었고, 이유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2권의 독서는 미뤄두었다가 흐지부지 되었다(여러 번의 이사를 하면서 1994년판은 어디론가 숨어버렸고).




























최인훈은 개작에 공을 들인 대표적 작가인데, 대표작 <광장>을 여섯 차례 이상 개작(보완과 수정)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마지막 작품 <화두>도 3종의 판본이 있는데, 1994년 민음사판을 개정하여 2002년에 다시 출간할 때도 주로 한자어를 우리말로 고치는 등 많은 수정을 가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후 문학과지성사의 전집판(2008년)으로 나올 때도 수정이 가해졌는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여전히 교정되지 않은 오타나 착오가 남아 있어서 놀랐다. 이번에 처음 읽은 2권에서 나오는 대목으로 푸슈킨 시(뿌쉬낀 시)의 여름궁전을 방문한 일을 적으며 작가는 이렇게 썼다. 



"이 궁전의 주인이었던 예까쩨리나 여제의 초상이며, 1912년 나폴레옹 침공전쟁 그림 등이 기억에 남을 만한 큰 작품들이며 이 궁전은 소장품이 중심이 되어 있는 듯한 에르미따즈와는 달리 궁전 자체가 전시품인 성격이 짙었다."(465쪽)


민음사나 문이재판과 비교해봐야겠지만, 앞선 판본들에서도 '1912년 나폴레옹 침공전쟁'(1812년 전쟁이다)이라고 돼 있다면 작가의 착오이고(편집과정에서 걸러지지 않은 건 유감이다), 전집판에서만 오기돼 있는 거라면 담당 편집자가 엄중히 문책받을 만한 일이다. 인문서라면 눈감아줄 수 있는 일이지만 <화두>는 '작품'이다.  


그와는 별도로 나는 나폴레옹 전쟁 그림이 예카테리나궁(여름궁전)에 걸려 있었는지 의문이다. 두 차례 방문했지만 기억에 없어서인데, 인터넷상으로 둘러봐도 눈에 띄지 않는다. 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국립국어원 표기로는 '예르미타시', 최인훈의 표기로는 '에르미따즈')에는 걸려 있다. 확실치는 않지만 작가의 기억에 착오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에서 중학교와 고등학교(1학년까지)를 다닌 최인훈은 북한에서 배운 러시아어를 뒤늦게 떠올리며 러시아어 단어들과 알파벳(키릴문자)을 상당수 본문에 적어놓기도 했는데, 유감스럽게도 여러 곳에서 오타를 범했다. 추정으로는 육필 원고를 타이핑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실수로 보이는데(대표적으로는 러시아어 철자 П가 뒤집혀서 표기되었다) 소위 '정본'격인 전집판에 이런 오타나 오기가 남아있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생전에 작가가 왜 체크하지 않았을까?). 설마 94년판에서부터 그랬다면 미스터리한 일이고. 


<화두>는 김명인 평론가의 말을 빌리면 :한국 현대소설사에서는 참으로 찾아보기 힘든 깊은 지적 사유가 담겨 있는 지식인 소설"이다. 그렇지만 이 지극히 '독백적인' 소설(작중 화자 '나'는 최인훈 과 거의 일치하기에 소설은 회고록이나 자서전으로 읽혀도 무방하다)이 에세이가 아닌 '소설'로서 별도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사유의 높이와 소설의 높이를 작가는 구별하지 않는 듯싶다. 이미 관념이 소설적 육체를 대신해온 최인훈 문학의 종착점이라고 하면 기대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아쉽게 여겨진다.   







 









최인훈 전집(전15권)에는 소설과 희곡 외에 세 권의 수필 내지 산문집에 포함돼 있다. <화두>는 그 뒤에 붙어 있는데, 공식으로 표현하면 <광장>과 이 산문집들의 확장 내지 융합 형태가 <화두>이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떨어져 나간 것도 있는데, <광장>에 나왔던 사랑이다. 애초에 사랑이라는 주제가 최인훈 문학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온 터라 <화두>에서 '윤애'나 '은혜'가 등장하지 않는다고 해서 놀랄 건 아니다. 대신 <화두> 후반부의 러시아여행기에는 두 명의 통역사가 등장하는데, 알렉산드르와 블라디미르다. 특히 페테르부르크 가이드를 맡은 블라디미르는 작가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다. 


"버스가 출발하자 앞자리에서 러시아 젊은이가 일어서서 한국말로 여러분을 모시게 되어 기쁘다면서 자기는 블라디미르라는 이름이며, 레닌그라드 대학 역사학과 4학년생이며 한국 역사를 전공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 역사의 어느 분야인가고 묻는 말에 가야 역사 전공이노라는 대답에, 차 안은 순간 차분해졌다. 알맞게 큰 키에 말랐으며, 금발에 유별나게 어려 보이는 젊은이다."(450쪽)
















블라디미르와의 첫 만남을 묘사하는 대목이다. 알려진 사실인데, 이 장면에 등장하는 블라디미르는 블라디미르 티호노프, 곧 (나중에 한국으로 귀화했고 현재는 노르웨이 오슬로대학에 있는) 박노자 교수다. 1973년생이기에 최인훈의 러시아여행(1992년 가을)시에 만 스무살이 안된 나이였다(유별나게 어려 보인 게 당연하다). <전환의 시대>(2018)를 내면서 가진 한 인터뷰를 보니 아직 <화두>를 읽지 않았다고 하는데(<광장>에 대해서는 학술발표를 한 적도 있다), 자신도 모르게 인물로 등장한 소설에 대해서 어떤 소감을 가질지 궁금하다(앞서 적은 오타들이 걱정되는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