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주간경향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E. M. 포스터 원작의 소설들이 영화로 재개봉됐거나 개봉될 예정인데(<전망 좋은 방>과 <하워즈 엔드> 그리고 <모리스> 등) 영소설 강의에서 최근에 <전망 좋은 방>과 <하워즈 엔드>를 읽었다. 대표작 <하워즈 엔드>는 여러 가지 면에서 빼어난 모범적인 소설로 여겨져 리뷰에서 간단히 살펴보았다.
주간경향(20. 06. 22) 영국 중산층 세 부류 계급 전쟁의 해법
사후에 출간된 <모리스>까지 단 여섯 편의 장편소설을 남겼을 뿐이지만, E. M. 포스터는 20세기 초반 영국 소설사에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작가다. <하워즈 엔드>(1910)를 정점으로 한 그의 소설들은 여전히 소설이란 무엇이고, 사회적 문제를 어떻게 다룰 수 있는지 좋은 참고가 된다. ‘사회적 문제’라고 한 것은 구체적으로 계급 문제다. 미국의 비평가 라이오널 트릴링은 <하워즈 엔드>를 일컬어 “영국의 운명에 관한 소설로서, 계급 전쟁을 다룬 이야기”라고 정확하게 규정했다. 소설은 중산층 내부의 세 부류를 제시한다. 헨리를 가장으로 하는 윌콕스가는 문명의 건설자를 자부하는 전형적인 사업가 집안이다. 헨리는 사업가 한 명이 열두 명의 사회개혁가보다 세상에 유익하다고 생각하며 여성 참정권이니 사회주의니 하는 주장을 헛소리로 치부한다.
반면에 아버지가 귀화한 독일인인 슐레겔가의 자매, 마거릿과 헬렌은 교양있는 시민계급을 대표한다. 자매는 범게르만주의 역시 영국의 제국주의와 마찬가지로 전혀 창조적이지 못하며, 저속한 정신의 악덕만을 보여줄 뿐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하게 보면 소설은 이렇듯 대립적으로 설정된 슐레겔가의 자매와 윌콕스 집안의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진 해프닝과 인연을 따라가는 것으로 읽힌다. 동생 헬렌이 윌콕스가의 막내아들과 벌인 약혼 소동이 해프닝이라면 언니 마거릿이 상처한 헨리 윌콕스의 청혼을 받고 결혼하게 되는 것이 인연이다.
그렇지만 두 집안의 대립과 인연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 설정은 도시 중산층의 밑바닥을 구성하는 사무직 노동자 레너드 바스트의 존재다. 레너드는 신사 계급의 맨 끝자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신사 계급처럼 행동해야 한다. 즉 자신이 열등하지 않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 신사적 교양을 악착같이 습득해야 한다. 독서와 음악회 관람을 빼놓지 않는 이유다. 그런 레너드가 한 음악회에서 슐레겔 자매와 만나면서 이야기의 또 다른 축이 마련된다.
자본가인 윌콕스에게 세상이 부자와 빈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설사 부를 균등하게 나눈다 하더라도 빈부의 격차는 다시금 생겨날 수밖에 없다고 그는 믿는다. 반면 슐레겔 자매는 레너드와 같은 하층계급 사람에게 어떤 식으로든 도움을 주고자 한다. 자매는 레너드가 다니는 직장의 전망이 어둡다는 윌콕스의 조언에 따라 레너드로 하여금 이직하게 하지만, 오히려 그는 옮긴 직장에서 해고당하고 곤궁에 처한다. 헬렌은 윌콕스에게 책임을 물으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레너드의 아내가 과거 윌콕스의 정부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상황은 더 꼬인다. 급기야는 동정심에, 책임감까지 더해져 헬렌은 레너드의 아이를 갖게 되고, 그런 사실도 모른 채 레너드는 어이없는 사고로 죽는다.
그렇게 마무리된다면 사회 비극이 될 뻔한 이야기지만 결말에서 윌콕스는 저택 ‘하워즈 엔드’를 아내 마거릿에게 양도하고 나중에는 헬렌의 아이에게 상속되게끔 한다. ‘단지 연결하라’는 구호를 모토로 내건 소설에서 포스터가 제시하고 있는 계급 전쟁의 해법이다.
20. 06. 17.
P.S. 국내에는 단편소설집까지 한 권 더해서 일곱 권의 E. M. 포스터 전집이 출간됐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절판되었고 세 권만 현재 세계문학전집판에 들어가 있다. 초기 두 작품을 포함해 <하워즈 엔드>와 함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인도로 가는 길>까지 현재 번역본이 없는 상황이다(나는 하는 수 없이 중고본으로 구했다). 어떻게든 다시 나오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