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달 '내셔널 지오그래픽 트래블러'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문학기행에 관한 원고를 제안 받고서 첫번째로 떠올린 주제가 프라하의 카프카여서, 프라하 여행의 기억을 상기하며 적은 글이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트래블러(20년 5월호) 프란츠 카프카의 도시, 프라하를 걷다
중부유럽의 아름다운 도시 프라하를 찾아가는 데 특별한 이유가 필요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내게 프라하는 '카프카의 도시'였고(밀란 쿤데라까지 포함하면 '두 명의 K'다), 카프카의 발자취를 따라가보기 위해 수년 전에 프라하를 찾았다. 두 차례였는데, 한번은 가족과 함께한 자유여행이었고, 나중에는 카프카 문학기행을 이끌면서였다. 체코의 수도인 프라하는 현재 인구 130만 명의 대도시이지만 언덕에서만 내려다보아도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기에 아담해 보이기까지 한 도시다. 그건 아마도 내가 천만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서울에 익숙해서 갖게 된 착시일 것이다.
1883년 프라하에서 유대인 가계의 장남으로 태어난 프란츠 카프카에게 프라하는 지금보다 훨씬 인구가 적었음에도 위압적인 느낌을 주는 도시였다. 그의 작품들을 통해서 읽을 수 있는 그 위압적인 분위기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나는 궁금했다. 가령 미완의 마지막 장편 <성>이 주는 인상을 떠올려보라. 궁금증은 쉽게 풀렸다. 처음 프라하를 찾을 때는 한밤에 프라하공항에 도착해서 미리 예약해둔 택시를 타고 호텔로 갔던지라 그 이튿날에야 프라하의 전경과 대면할 수 있었다. 한여름이어서 햇빛이 환하게 비쳐드는 아침에 호텔방의 커튼을 열어젖혔는데 비명과 경탄이 교차했다. 비명은 유리창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거미들을 보고 아이가 내뱉은 것이었고 경탄은 그 너머의 프라하성을 보며 내가 속으로 내지른 것이었다.

압도적 권위의 상징, 프라하 성
프라하를 찍은 어떤 사진에서건 프라하성은 빠지지 않는다. 아마도 블타바강을 가로지르는 카를교와 함께 프라하를 대표하는 상징물이리라. 9세기 중반부터 건설되기 시작해 14세기에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는 프라하성은 현재도 대통령궁으로 사용된다. 그렇게 실제로 사용되는 성 가운데서는 전세계에서 가장 큰 성이다. 관광객들에게는 매우 아름다운 야경을 제공하는 인상적인 건축물이 프라하성인데, 나는 그 아름다움과 함께 규모가 주는 압도감을 느꼈고 카프카문학을 이해하는 실마리라고 생각했다. 흔히 정신분석에서도 성을 남성 상징이라고 얘기하지만 더 구체적으로는 권력과 가부장적 권위의 상징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것은 카프카의 우화 '법 앞에서'에 등장하는 법의 상징이기도 하다.
권력기계로서의 아버지와 법. 그리고 그것을 매개해주는 상징적 형상으로서의 성. 프라하성을 실물로 처음 보자마자 내가 이해하게 된 '커넥션'이다. 카프카의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는 동화된 유대인으로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상인이었다. 장사수완을 발휘해 자기 가게를 내고 교양시민계급의 여성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다. 첫아들 프란츠에 이어서 두 아들이 태어났지만 일찍 죽고 이어서 세 딸이 차례로 태어났다. 부부 사이에 6남매가 태어난 것이지만 결과적으로는 1남 3녀가 되었고 카프카가 장남이자 유일한 아들이었다. 자연스레 아버지 헤르만의 기대는 아들 카프카에게 집중됐다. 그는 자녀들을 모두 독일학교에 보냈는데 당시 프라하의 상류층은 독일인들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4년, 직장생활과 작품집필을 병행하다
유대인도 체코인도 아닌 상류층 독일인이 되는 것이 헤르만의 목표였다. 독일학교를 다닌 까닭에 카프카가 일상에서는 체코어를 쓰면서도 작품은 독어로 썼으니 아버지의 영향이 결코 작다고 볼 수 없다. 문제는 카프카가 아버지의 가업보다는 문학에 더 관심을 둔 작가 지망생이었다는 데 있다. 김나지움을 마치고 대학에 진학할 때 카프카는 문학을 공부하러 독일의 대학으로 유학을 가고자 했으나 아버지의 반대로 무산되고 프라하의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다. 카프카는 아버지의 뜻에 따르면서도 자기의 고집 또한 지키고자 했다. 절충책이 법학박사 취득 후에 노동자상해보험공사에 취업하여 직장인이 되는 것이었다. 카프카는 이 직장에 1908년에 입사하여 1922년 건강악화로 사직하기까지 14년간 재직한다. 그런 장기간의 재직이 가능했던 건 카프카의 입장에서는 근무조건이 잘 맞아떨어졌고, 공사 입장에서는 카프카의 근무성적이 좋았기 때문이다.
카프카는 아침 8시까지 출근해서 오후 2시에 퇴근했는데, 덕분에 직장생활과 작품집필을 병행할 수 있었다. 물론 이러한 '이중생활'이 아무래도 그의 건강에 무리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고, 결국 그를 죽음으로 이끈 폐결핵의 중요한 원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건강이 상할 정도로 카프카는 문학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지만 아버지 헤르만은 그런 아들에 단 한번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가족 가운데서는 막내 여동생 오틀라만이 유일하게 카프카의 작품활동에 관심을 갖고 응원했으며 작은 작업실을 임대해 마련해주기도 했다. 프라하성에서 내려오는 길(황금소로)에 위치한 이 작업실이 지금은 카프카기념품 가게가 되어 있는데 카프카를 찾아 프라하를 방문한 여행자라면 반드시 들러봐야 하는 명소이기도 하다.
결혼, 창작 활동의 기로에서
부모의 무관심 속에서도 창작에 대한 의지를 꺾지 않았던 카프카가 창작의 결정적인 돌파구를 찾은 것은 1912년 9월의 일이다. 그 해 8월 중순 친구인 막스 브로트의 집에서 처음 만난 펠리체 바우어에게 한달 뒤에 편지를 쓰고서 연이어 하룻밤 만에 '선고'라는 단편을 완성하는데, 이 작품이 바로 그 돌파구에 해당한다. 펠리체는 당시 베를린에 직장을 갖고 있었고 프라하의 인척 브로트의 집에는 잠시 들른 것이었다. 카프카는 자신이 선망하던 도시 베를린의 직장여성이라는 데 호감을 느꼈고 그녀여게 열정적인 편지를 써보내기 시작했다. 결국 두 사람은 1914년 6월에 약혼까지 하지만 불과 한달 뒤에 카프카의 변심으로 파혼하게 된다. 이후에도 카프카가 펠리체와 한번 더 약혼했다가 파혼하게 되기에 두 사람은 문학사에서도 드문 인연으로 기록된다.
카프카가 두 차례나 펠리체와 약혼한 것은 물론 결혼한 의사가 있었기 때문이고 그것이 또한 아버지의 바람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헤르만은 아들이 번듯한 직장과 가정을 가짐으로써 중산층 가계를 이어주기를 바랐다. 카프카는 그 뜻에 따르려 했지만 동시에 결혼생활이 자신의 창작과 양립할 수 있을지에 대해선 자신이 없었다. 더구나 자식까지 갖게 돼 집필 시간을 빼앗기는 것은 카프카에게 악몽이었다. 아버지의 뜻에 따르면서 동시에 창작에 대한 욕망도 포기할 수 없었던 카프카의 딜레마가 펠리체와의 두차례 약혼과 파혼의 배경이다. 사실 두번의 약혼과 파혼으로 모든 것이 일단락된 것도 아니다. 카프카는 이후에 율리에 보리체크라는 여성과도 약혼했다가 이번에는 아버지의 반대로 파혼하며, 나중에는 당시 유부녀였던 밀레나 예젠스카에게 구혼했다가 거절당한다.
아버지, 카프카 문학의 밑바탕이 되다
흥미로운 건 이러한 이력이 카프카 문학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는 점이다. 다르게 보면, 카프카의 문학은 그의 실존적 상황의 문학적 번역 혹은 번안으로 여겨진다. '선고' 이후 '화부'와 '변신' 세 작품을 연이어 완성한 뒤에 카프카가 이를 묶어서 '아들들'이라는 표제의 작품집으로 내려고 했던 건 시사적인데(성사되지는 않았다) 그의 문학의 핵심이 바로 아버지와의 관계, 곧 부자관계에 있다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1914년 펠리체와 파혼 이후에 쓰게 되는 장편소설 <소송>을 통해서 카프카의 문학은 한 단계 도약하게 된다. 인상적이게는 <소송>에는 '아버지'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아비지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법의 형상으로 변모하기 때문이다. 프라하성은 그리한 변모의 배경이자 매개다. 카프카가 프라하의 작가가 아니었다면 그러한 변모와 도약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카프카의 책을 끼고서 프라하를 방문하는 여행자들과 같이 토론하고 싶은 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