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주간경향(1378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조지 기싱의 <이브의 몸값>(1895)에 대해 적었다. <뉴 그럽 스트리트>(1891)가 최근에 다시 나와서 반가운데, 두어 작품 정도는 더 번역되면 좋겠다...
주간경향(20. 05. 25) 열정이 아닌 재산에 따라 정해지는 운명
영국 자연주의 문학의 대표 작가로 통상 토머스 하디를 꼽지만, 그의 소설들은 주로 영국 남서부 농촌 지역을 배경으로 한다. 다른 무엇보다 ‘런던의 작가’로 평가할 만한 찰스 디킨스의 적통을 잇는다고 하기에는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자본주의 근대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는 근대소설의 핵심 공간은 아무래도 런던과 같은 대도시여야 하기 때문이다. 역동적인 변화의 공간으로서 도시야말로 산업화의 중심이며, 이 도시의 다양한 군상들이 자연스레 근대소설의 주인공이 된다. 그러한 기대로 주목하게 된 작가가 19세기 말에 정력적으로 작품을 써낸 조지 기싱이다.
무려 23편의 장편소설을 포함해 다양한 장르의 글을 발표했지만, 국내에서 기싱이라는 이름은 주로 자전적 에세이 <기싱의 고백>(원제는 ‘헨리 라이크로프트 수상록’이다)의 저자로만 알려졌다. 대표 소설들의 번역이 잘 이루어지지 않아서였는데 그나마 지난해에 <이브의 몸값>이, 그리고 올해는 <뉴 그럽 스트리트>(‘꿈꾸는 문인들의 거리’라는 제목으로 한 차례 나왔다)가 다시 나와서 궁금증을 조금 덜었다. <뉴 그럽 스트리트>가 19세기 말 후기 빅토리아 시대 생계형 작가들의 실상을 다룬 일종의 예술가소설이면서 세태소설이라면, <이브의 몸값>은 연애소설이다. 주인공은 미술교사의 아들 모리스 힐리아드. 예술가가 되기를 갈망했지만 아버지의 불운과 죽음으로 포기하고 기계 제도공이 되었다. “손재주로 돈을 버는 직업과 빈털터리 예술가 사이의 타협책”이었다.
어느 날 힐리아드는 사업에 실패하고 파산을 선언함으로써 채권자였던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한, 그렇지만 다시금 재기하여 부자가 된 사업가로부터 뒤늦게 436파운드의 빚을 상환받는다. 그에게는 형이 죽은 뒤 부양해온 형수와 조카가 있지만, 재혼을 결심한 형수가 도움을 마다하면서 그 돈을 온전하게 자신을 위해 쓸 수 있게 된다. 그는 그 돈을 통해서 단 2년이라도 삶다운 삶을 살아보기로 결심한다. 그리하여 파리로 떠나지만 혼자만의 여유로운 생활은 생각만큼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는 런던으로 돌아와 사진으로만 알고 있던 동향 출신의 이브 매들리라는 여자를 찾아나서고 만남을 갖는다. 가난한 집안 출신의 이브는 런던에서 장부를 정리하는 저임금의 노동자로 어렵사리 살아가고 있었다. 자신과 처지가 비슷하다는 생각에서 힐리아드는 이브에게 파리 여행을 제안한다. 짓눌린 일상에서 탈출하여 그녀에게도 휴식과 만족을 선사하고 싶어서다.
이브가 힐리아드의 제안을 수용하고 둘 사이에 사랑이 싹트기 시작했다면 통상적인 연애소설이 되었겠지만, 이야기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다. 힐리아드는 차츰 열정에 빠져들지만, 가난에 대한 공포감을 갖고 있는 이브에게 장래가 보장되지 않는 힐리아드와의 결혼은 미더운 선택지가 되지 못한다. 힐리아드의 관심과 도움에 고마워하지만, 그 이상의 감정은 품고 있지 않던 이브는 삼촌에게 상속받은 5000파운드의 유산을 바탕으로 사업가로 변신한, 힐리아드의 친구 나래모어로부터 구혼을 받자 허락한다. 힐리아드와의 관계가 장애가 될 수 있었지만 힐리아드는 이브의 행복을 가로막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고 힐리아드는 친구의 초대로 상류 사교계의 지적인 숙녀로 변신한 이브를 만나게 되고, 이브는 그의 관대함에 사의를 표한다. 자연주의 소설답게 주인공들의 운명은 열정의 강도가 아닌 재산의 규모에 따라 정해진다. ‘이브의 몸값’이란 제목에 어울리는 결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