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달 국립극장 소식지 미르(364호)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애초에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발레 공연과 관련하여 원작 해제 성격의 글을 청탁받았으나 공연은 코로나 사태로 취소되어 글만 남았다. 에이프만의 발레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유튜브에서 일부 장면을 볼 수 있다...
미르(20년 5월호)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의 모색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트는 서양문학사의 3대걸작을 꼽으면서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 셰익스피어의 <햄릿>과 함께 바로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들었다. 개인적인 선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건 이 작품들이 부친살해라는 공통주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프로이트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해설 제목이 '도스토옙스키와 부친살해'이기도 하다. 이때 부친살해는 단지 한 가지 주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류사의 전개와도 연결되는 핵심 주제다.
인류사의 전개라고 하면 다소 거창하지만 소포클레스보다 조금 더 거슬러올라가서 그리스비극의 첫번째 거장 아이스킬로스와 만나보자(알려진 대로 그리스비극의 계보는 아이스킬로스에서 소포클레스로, 다시 에우리피데스로이어진다). 아이스킬로스의 대표작 '오레스테이아 3부작'은 언속적인 복수혈전의 드라마다. 3부작을 구성하는 첫 작품 <아가멤논>은 트로이 원정을 떠난 그리스군의 총사령관 아가멤논이 딸을 제물로 바친 일에 앙심을 품고서 10년만에 돌아온 남편을 아내가 살해하는 이야기다. 두번째 작품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에서는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가 세월이 흐른 뒤 아버지에 대한 복수로 어머니를 다시 살해한다. 마지막 작품 <자비로운 여인들>에서는 복수의 여인들에게 쫓기던 오레스테스가 아테네 법정에서 무죄판결을 받고서 풀려난다.
결과적으로 아이스킬로스의 3부작은 아들이 아버지의 복수를 통해서 부권적 질서와 법의 통치체제를 구축하는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이에 대해 엥겔스는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라고 평했다. 인류사가 원시 모권 사회에서 부권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을 아이스킬로스의 비극이 포착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류사의 단계에 대응하여 부친살해 이전에 모친살해가 있었다. 모친살해와 함께 여성이 정치적 장에서 배제되고 권력은 아버지와 아들의 상속-계승관계로 환원된다. 부친살해라는 주제는 이러한 문명사적 전환을 배경으로 한다.
프로이트가 3대걸작으로 꼽은 <오이디푸스왕><햄릿><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부친살해 테마의 변주이면서 각 국면에 대응한다. <오이디푸스왕>과 <햄릿>이 부친살해 테마를 각각 자기인식의 과정과 개인으로서의 자기발견에 대응시키고 있다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부친살해 이후 형제애(인류애)의 가능성 탐색이라는 과제를 다룬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대한 가장 흔한 독법은 이 작품이 무신론의 도전에 맞서 기독교적 인간 구원론을 변호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주제는 좀더 복잡하게 해석돼야 한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는 먼저 타락한 아버지 표도르가 등장한다. 호색한인 그는 두 아내에게서 얻은 세 아들, 드미트리와 이반, 그리고 알렉세이를 방치했는데, 이들이 장성하여 차례로 그를 찾아온다. 장남 드미트리는 어머니의 유산 문제로 아버지와 법적 분쟁을 벌이던 차에 아버지가 점찍은 여성을 두고서도 아버지와 연적으로 대립한다.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인 둘째 이반은 드미트리로부터 중재역을 부탁받고, 막내 알렉세이는 신앙이 깊은 청년으로 조시마 장로의 암자에서 지낸다.
작품에서 무신론의 주제는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라는 이반의 사상으로 표현되며 이는 그의 서사시 '대심문관'에 집약돼 있다.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것은 어떠한 금지도 가능하지 않다는 의미이며 이것은 도덕의 불가능성을 함축한다. 부친살해 금지는 가장 강력한 도덕적 금지의 하나인데 그것이 허용된다는 뜻이고 표도르의 사생아 스메르쟈코프는 이를 직접 실행에 옮김으로써 이반의 하수인을 자처한다. 말하자면 이반은 부친살해의 이론적, 논리적 근거를 제시함으로써 부친살해의 사주자가 된다.
드미트리도 직접 살인을 저지르지는 않지만 표도르가 피살되자 그에 대한 혐의를 받고 체포된다. 그리고 재판에서 농민 배심원단의 오판으로 말미암아 유죄판결을 받고 시베리아 유형길에 오를 처지가 된다. 이반이 직접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지만 사주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처럼 드미트리 역시 범죄의 책임에서 아주 벗어나지는 못한다. 아버지 표도르에 대한 살의를 공공연하게 내보이고 다닌 인물이 다름아닌 드미트리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책임을 부인하면서 정신분열 상태에 빠지게 되는 이반과 달리 드미트리는 책임을 기꺼이 수용하면서 갱생의 가능성을 얻는다.
아버지와 아들들간이 대립 속에서 주로 심부름꾼 역할을 하는 알렉세이는 조시마 장로의 생애전을 기록하며 그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한다. 그런 알료샤도 시험을 겪게 되는데 성자처럼 존경해온 조시마 장로가 세상을 뗘난 뒤 기적을 기대하지만 좌절된다. 장로의 시신에서 향기는커녕 더 심한 악취가 나면서 알렉세이조차도 회의에 빠지게 된다. 이반이 '대심문관'에서 지적한 대로 인간은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신앙을 갖기 위해서는 '기적과 신비와 권위'가 필요하다. 다르게 말하면 "기적이 없다면 신앙은 불가능하다"가 될 것이다. 조시마 장로의 유훈대로 더 넓은 세상에 나가게 될 알렉세이는 기적 없이도 신앙이 가능하다는 것을 긴 우회를 거치더라도 입증해나가야 할 것이다(이것이 쓰이지 않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두번째 이야기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이 부친살해 이후 형제애의 가능성을 모색한다는 것은 신의 죽음 이후에도 사랑은 가능한지를 탐색한다는 것과 같다. 흥미롭게도 프로이트는 <토템과 터부>에서 그 윤곽을 제시해놓았다. 여자들을 독점한 강한 원초적 아버지에 맞서서 아들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그를 살해한다. 하지만 그로 인한 죄책감에 살인을 금기한다. 두 가지 형태의 인간관계가 여기서 제시되는데 하나는 수직적이고 위계적인 부자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수평적인 형제관계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신과 인간이라는 부자관계를 다시 회복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고 평등한 형제적 관계를 모색하려는 시도로서 더 의미깊은 작품이다.
러시아의 세계적 안무가 보리스 에이프만의 발레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1995) 내한 공연이 5월에 예정돼 있었지만 전세계를 휩쓴 코로나19 사태로 취소됐다. 하지만 추후 무대에 오를 작품을 심도 있게 이해하려면 원작을 파악하는 게 우선이다. 따라서 도스토옙스키의 원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문제성과 의의에 대해 고민해 봤다. 연극과 발레 등의 공연작품으로 활발하게 무대에 올려지고 있지만 아무래도 대작 장편의 일부만을 무대화할 수 있을 뿐이어서 사건의 전체 내용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