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총선이 여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대통령의 지지율도 큰 역할을 했지만, 결국엔 지난 대선의 연장전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는 조금 지연된 정의의 사례가 아닌가 싶다. 2년여 임기를 남겨놓고 있는데, 대통령과 여당한테는 너무 늦지 않은 정의이기를 기대한다. 총선에 대한 소감은 간단히 적고, 이달 '출판문화'에 실은 칼럼을 옮겨놓는다. 오늘 받아보니 그 사이에 판형과 디자인이 바뀌었다(꽤 깔끔해져서 보니, 워크룸프레스에서 디자인을 맡았다). 기억에는 수년만에 쓴 글이다. 


















출판문화(20년 4월호) 리커버판과 초판본의 유행에 대하여


오랜만에 <출판문화>의 권두 칼럼을 제안 받고서 어떤 주제를 다룰지 고심했다. 서평가로서 어떤 책에 대해서건 다룰 의향이 있지만, 권두 서평을 쓸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때로 출판평론가라고도 불리지만 서평가는 주로 출판계라는 숲을 보기보다는 책이라는 개개의 나무들에 주목하는 편이어서 출판산업의 향방이나 출판문화의 트렌드에 그리 민감하지 않다. 때문에 평소에 깊이 생각해보지 않아서 출판문화와 관련한 이슈에 어떤 것이 있을지 궁리하다가 최근에 맞닥뜨린 문제를 다루기로 했다. 문제라기보다는 현상인데, 수년 전부터 번지고 있는 리커버판과 초판본 유행 현상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보려고 한다(초판본은 초판표지본까지 지칭하는 말로 쓰겠다).


리커버판과 초판본의 공통점이 있다면 둘 다 책의 내용과는 무관하게 포장(표지)만 바꾼 것이라는 데 있다. 어떤 책을 이미 읽은 독자가 그 책을 다시 읽기 위해서 리커버판이나 초판본을 구입하는 일은 드물 것이다. 그럼에도 베스트셀러나 간판도서들이 리커버판의 형태로, 혹은 초판표지본으로 다시 나오는 것은 독자의 독서욕보다는 소유욕을 겨냥한 것이겠다. 당연하게도 책은 독서용으로서만이 아니라 소장용으로도 의미를 갖는다. 이것을 책의 이중적 의미라고 한다면, 그 이중성에 상응하는 것이 책의 두 가지 존재방식이다. 작품으로서의 책과 상품으로서의 책. 그럼 책은 언제 상품이 되는가. 표본적인 사례로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일본 문학시장의 기념비적인 베스트셀러로 꼽히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이다.















일본에서 <노르웨이의 숲>이 처음 출간된 건 19879월이다. 작가 자신이 장정을 맡았다고 하는데, 빨간색과 녹색 표지 두 종으로 출간하면서 띠지에는 ‘100퍼센트 연애소설이라는 문구를 박았다. 두 가지 표지로 출간된 <노르웨이의 숲>은 그해 크리스마스 시즌에 폭발적인 인기를 모은다. 소장용이건 선물용이건 독자들이 앞 다투어 두 권씩 구입했고 이러한 구매가 증후군처럼 번져갔다. 책의 내용도 물론 한몫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하루키의 전작들이 10만부 정도의 판매고를 올린 데 비하면 <노르웨이의 숲>은 하루키 자신도 전혀 예상치 못한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되었기 때문이다(현재까지 <노르웨이의 숲>의 누적 판매부수는 1000만부를 훌쩍 넘어선다). 유럽 여행중에 작품을 쓴 하루키는 그러한 성공이 부담스러워 다시금 일본을 떠나게 된다.


책을 출간하면서 애초에 하루키가 염두에 둔 홍보문구는 ‘100퍼센트 리얼리즘소설이었다. ‘100퍼센트 연애소설이란 문구와 달리 ‘100퍼센트 리얼리즘소설은 그의 전작들을 읽어온 독자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전작들과 같은 환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아주 사실적인 이야기라는 뜻을 전달하고자 했던 것인데, 출판사 쪽에서 난색을 표하면서 바뀌었다. 생각해보면 크리스마스 시즌에 연인들이 ‘100퍼센트 리얼리즘소설을 선물로 주고받는다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 선물용이 되기 위해서라도 ‘100퍼센트 연애소설이란 문구는 아주 적절하면서 동시에 불가피했다. 비록 하루키의 본뜻과는 맞지 않았더라도 말이다.



<노르웨이의 숲>은 한국에서도 번역돼 대형 베스트셀러가 되는데, 그 맥락은 일본과 다르다. 일본에서처럼 빨간색과 녹색, 두 가지 장정으로 나온 것도 아니고(나중에 문학사상사에서는 기념판으로 그렇게 펴내기도 했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대박을 터뜨린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일본의 흥행작이어서 1988년 발 빠르게 처음 소개되긴 했는데, 첫 번역본 <노르웨이의 숲>은 전혀 주목을 끌지 못했다. 한국 독자들에게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이름이 각인되는 건 그 이듬해인 1989년 원제와는 다르게 <상실의 시대>(문학사상사)란 제목으로 출간되면서다. 비록 역자가 다르더라도 <상실의 시대>가 베스트셀러가 된 건 전적으로 변경된 제목의 덕이 크다. 물론 1988년과 1989년이 갖는 시대적 배경의 차이도 감안해야 한다. 1988년은 서울올림픽이 열린 해였던 데 반해, 1989년은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동구권 사회주의가 몰락하면서 세계사의 극적인 전환점이 된 해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게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이었고, 하루키가 즐겨 다루는 텅빈 인간의 이야기였다. 즉 한국에서 <상실의 시대>를 베스트셀러로 만들어준 것은 두 가지 표지나 ‘100퍼센트 연애소설같은 홍보문구와는 전혀 무관한 시대적 배경, 혹은 분위기였다. <상실의 시대>가 팔려나가면서 원제 <노르웨이의 숲>을 표지에 박은 여러 번역본이 더 등장했지만 독자들의 반응을 얻어내지는 못했다. 한국 독자에게 하루키는 ‘<노르웨이의 숲>의 작가가 아니라 ‘<상실의 시대>의 작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 작품상품개념을 도식적으로 적용하면, 일본에서 하루키가 ‘100퍼센트 리얼리즘소설이라고 발표한 것은 작품이고, ‘100퍼센트 연애소설로 팔려나간 것은 상품이다. 작품이 작가-작품-독자라는 소통구조를 갖는 데 반해서 상품은 생산자(작가와 출판사)-상품()-소비자(독자)’라는 유통구조 속에 놓인다. 작품-책은 독서를 목적으로 하지만 상품-책은 여러 목적의 소비와 소장의 대상이다. 작품-책의 성공 비결은 읽히는 데 있지만, 상품-책의 성공 비결은 안 읽히는 데 있다. 읽을 생각이 없는 독자까지도 구매 대열에 나설 때 책은 상품이 되고 베스트셀러가 된다. 리커버판과 초판본이 겨냥하는 이상적인 독자가 있다면 모순형용이기는 하지만 책을 읽지 않는 독자. 읽을 목적이 아니어도 책을 구매하는 독자를 그렇게 부른다면 말이다.
















리커버판과 초판본의 출현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닐 듯싶지만, 눈에 띄는 분기점이 된 건 2015-2016년이다. 소와다리 출판사에서 2015년말에 소월의 <진달래꽃>을 필두로 하여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백석의 <사슴> 등을 연이어 복간본으로 냈고 이 시집들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에 따라 20162월부터는 이러한 초판본의 반향이 복고 유행현상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그해 5월에 민음사에서 세계문학전집 콜라보에디션으로 제인 오스틴과 에밀리 브론테, 버지니아 울프, 3인의 영국 여성작가 책을 여성의류 브랜드 키이스(KEITH)의 비주얼 컷을 입힌 리커버판으로 출간해 호응을 얻는다. 리커버판 유행의 계기였다고 생각되는데, 나는 이것이 초판본의 유행과 무관하지 않은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는 복고 유행이라는 말로 다 설명되지 않는다. 대신 초판본과 리커버판에 대한 반응을 동시에 설명하자면 상품-책과 읽지 않는 독자층의 부상을 지목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징후적이었던 것은 인터넷서점 알라딘 사은품(굿즈)의 인기다. 2015년부터 소위 알라딘 굿즈가 알라딘의 가장 인기 있는 서비스로 부상했고, 서비스 품질지수 조사에서 인터넷서점 1위를 유지하게 했다. 이에 따라 알라딘서점의 간판도 독자들의 소통공간인 알라딘서재(알라딘마을)에서 알라딘 굿즈로 넘어갔다. 돌이켜보면 주변에서 목도할 수 있었던 현상인데, 굿즈를 받기 위해서 장바구니에 책을 모아두었다가 한꺼번에 주문하거나 순전히 굿즈를 얻기 위해서 책을 구매하는 독자들도 생겨났다. ‘책보다 굿즈라고 할까.


출판시장도 시장인 이상 거래품목인 책이 상품으로 유통되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이전에는 책이 상품이면서 상품 이상의 것으로 대우받았다면(‘작품이란 말이 그런 위상을 표현해줄 수 있다) 이제는 한갓 상품으로서 다른 상품들과 구별되지 않는 쪽으로 나아가는 듯싶다. 이것이 돌이킬 수 없는 방향성인지는 더 두고봐야겠지만, 전통적인 의미의 독자로서는 불가불 염려의 마음을 갖게 된다. 소와다리 출판사에서 시작되었지만 초판본 유행을 주도하고 있는 또다른 출판사 더스토리의 행태를 보면서 갖게 된 염려다(‘더스토리는 미니북으로 세계문학시장을 일부 점유하고 있는 더클래식의 자회사이거나 자매회사로 보인다).
















더스토리도 2016년에 <초판본 님의 침묵><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등을 펴내면서 초판본 경쟁에 뛰어들었다. 그러다가 더클래식에서 펴낸 헤세의 <데미안><초판본 데미안>으로 표지를 바꿔서 재출간하는데(리커버판과 초판본의 결합!) 이것이 TV 책프로그램 홍보효과에 힘입어서 베스트셀러가 된다. <데미안>의 사례로 살펴보자면 더스토리의 전략은 한 가지 번역본을 다종의 판본으로 펴내는 것으로 2016-20172년간 무려 12종의 <데미안>을 다양한 표지와 장정으로 출간한다. 결과적으로는 베스트셀러로 등극하게 했으니 성공한 전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최근 더스토리의 새로운 전략상품은 셰익스피어의 <햄릿>인데, 패턴은 <데미안>과 비슷하다. 2012년 더클래식에서 출간된 <햄릿> 번역본을 2017년에 <초판본 햄릿>이라고 표지를 교체하여 출간한다. 이후에 <4대 비극>판까지 포함하면 같은 번역본을 7종으로 펴낸다(더클래식에서 낸 것까지 포함하면 25종이다). ‘방송도서라는 홍보문구를 앞세우면서.
















한국 시인들의 시집 초판본에서 세계문학의 고전으로까지 분야를 확장한 것까지는 사업확장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쳐도, 문제는 책의 기본을 망각한다는 데 있다. 더스토리에서 처음에 낸 <초판본 햄릿>‘1611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이라고 강조했다. 1611년판은 <햄릿>의 판본으로는 세 번째 판본(3사절판)에 해당한다. 간단한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인데, 그조차도 건너뛴 것이다. 나중에야 착오를 알았는지 다시 나온 초판본은 ‘1603년 오리지널 표지 디자인이라고 해서 표지색을 바꿔 펴냈다. 초판 출간연도만 바로 잡으면 되었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햄릿>의 최초본이 나온 건 1603년이 맞지만 이때 나온 제1사절판은 흔히 나쁜 햄릿으로 불리는 판본으로 현행본 <햄릿>과 다르고 분량도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나쁜 햄릿의 번역본은 따로 나와 있고, 대다수 <햄릿> 번역본은 1604년에 나온 제2사절판을 따르거나, 작가 사후 1623년에 나온 전집판(1이절판), 혹은 이 두 가지 판본을 절충한 비평판을 따른 것이다. 더클래식판 혹은 더스토리판 <햄릿>은 절충판을 옮긴 것이기에 애초에 초판본을 운운하는 것은 말이 안 되지만, 그래도 최소한 1604년판이라고 해야 했다.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달에 나온다고 예고된 <초판본 셰익스피어 4대비극>은 무려 ‘1577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금장 양장 에디션이다. 4대 비극이 모두 1600년 이후에 공연되고 출간된 작품들인데, 1577년은 어떤 의미의 연도인가 뜨악할 수밖에 없다. 어차피 책을 읽지 않을 독자들을 상대하는 것이라 이 정도의 구라는 허용되는 것일까. ’리커버와 초판본의 막장 콜라보 에디션의 등장을 보면서 우리에게 출판문화가 있는지 다시 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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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eicher 2022-02-07 0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연히 보고 댓글 남깁니다.

더스토리 출판사는 1577년이라는 연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네요.

˝더스토리의 <초판본 셰익스피어 4대 비극-햄릿, 오셀로, 맥베스, 리어왕> 표지는 셰익스피어가 그의 작품에 많은 부분 영감을 얻은 <홀린셰드의 연대기(Holinshed‘s Chronicles)>의 1577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를 모티베이션한 작품입니다.˝

즉, 셰익스피어의 저 네 작품의 오리지널 초판본이 아니라 <홀린셰드 연대기>의 오리지널 초판본이라는 뜻입니다. 광고 이미지를 보면 출판사가 오해하기 좋게끔 광고를 한 건 맞는 것 같습니다만, 어쨌든 1577년이라는 연도는 저런 의미라는 것을 설명은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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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린셰드의 연대기
https://wblog.wiki/ko/Holinshed%27s_Chronic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