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본의 유행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푸시킨의 시집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써네스트)도 초판본이라고 다시 나와서 며칠전 페이퍼를 적었는데 오늘은 방에서 <초판본 햄릿>(더스토리)을 발견했다. 구매한 책은 아니고 선물받은 책 같다. 한데 띠지를 보니(빨간색표지) ‘1611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이라고 해서 코웃음이 나왔다.

이 무슨 ‘약장수‘의 헛소리란 말인가. 초판본 붐현상이 원래, 독서가 아니라 소장 목적의 독자들을 상대로 한 것이라 하더라도 최소한 기본은 지켜야하는 것 아닌가. 아무 표지나 갖다놓고 ‘초판본‘ 운운하는 건 사술(사기)에 해당한다(하긴 이런 책을 구입하는 독자의 관심사는 아니겠다).

<햄릿>은 셰익스피어 작품 가운데서 판본사가 가장 복잡한 작품이다(<햄릿>에 대해선 전공자 못지않게 많이 강의한 터라 나도 ‘업자‘축에 들어간다). 기본 상식까지는 아닐 수 있지만 <햄릿>의 독자라면 세 가지 판본 정도는 기억해두는 게 좋겠다(최소한 알아두는 게 좋겠다). 최초의 판본인 제1사절판(1603, Q1이라 불린다)은 우리가 아는 <햄릿>이 아니다. 언젠가 자세히 다룬 적이 있는데 좀 조야한 판본으로 분량도 현행본의 절반 남짓이다. 연구자들은 통상 ‘나쁜 햄릿‘이라고 부른다. 이 판본의 번역본은 허다한 번역본 가운데 두어종에 불과하다(내가 갖고 있는 게 두 종이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 나온 제2사절판(1604, Q2라고 불린다). 이게 셰익스피어 생전에 출간된 유일한 판본이다. 분량은 Q1의 두배 가량. 일부 연구자들은 이 Q2를 정본으로 보기도 한다(판본들에서 계속 문제되는 건 오탈자다). 생전 출간본이어서다. Q1과 대비해 ‘좋은 햄릿‘이라고 불린다. 그리고 셰익스피어 사후에 나온 전집판(1623) <햄릿>. 당시 알려진 전작품을 수록한 이절판이고 여기에 수록된 <햄릿>을 제1이절판(F1이라고 부른다). 분량은 의외로 Q2보다 약간 적다. ‘나쁜 햄릿‘을 제외하면 <햄릿>의 정본은 Q2이거나 F1 중에 선택해야 한다. 그게 아니면 제3의 선택지로 Q2와 F1에서 차이가 나는 행들을 취사선택해야 한다. 다양한 ‘비평판‘이 그래서 가능하다.

이것이 간략한 <햄릿> 판본사다. ‘1611년판 <햄릿>‘은 그냥 1611년에 찍은 <햄릿>을 가리킬 뿐 초판본과 무관하다. Q2를 다시 찍어낸 것으로 Q3라고 불린다. 현행본 <햄릿>에 준하자면 초판본은 1604년판 Q2를 가리키는 것이 상식적이다. 물론 Q1을 초판본이라고 우기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그건 다른 <햄릿>이다.

<초판본 햄릿>을 주장하는 또다른 퍈본은 올해 나왔는데 ‘방송도서‘라고 광고된다. ‘책읽어드립니다‘란 TV프로그램에서 다뤄진 모양이다(설민석이 나오는 프로인가? 나는 직접 본 적이 없다). ‘1603년 오리지널 표지 디자인‘이라고 해서 표지색이 노란색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출판사와 역자가 같고 분량도 비슷하다. 무슨 뜻이냐면 표지는 Q1이라고 해놓았지만 실제 번역은 Q2이거나 다른 판본의 번역일 거라는 얘기다. 앞서 ‘1611년 초판본‘을 갖다가 다시 ‘1603년 초판본‘이라고 갈아치운 것으로 보이니까.

추정하기에 ‘1611년 초판본‘이라고 내세울 때 ‘실수‘했다는 걸 알고 ‘1603년 초판본‘으로 부랴부랴 정정한 것이 아닐까. 다만 조사가 충분하지 못해서 <햄릿> 판본의 복잡성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못했던 것이리라. 물론 독자들의 관심사는 ‘초판본‘과 ‘방송도서‘라는 데만 두어질 테니 서로간의 완벽한 거래다. 내가 굳이 참견할 일은 아닐지도.

그렇지만 <초판본 셰익스피어 4대비극>이 예판으로 뜬 것을 보고서 참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어이없는 일로 치부하고 넘어가기에는 화가 나서다. 무려 ‘1577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금장 양장 에디션‘이다(정가는 24800원). 이건 무슨 작전세력을 보는 듯하다. 오래 생각할 것도 없다. 셰익스피어의 4대비극 가운데 가장 먼저 나온 것이 <햄릿>이다. <초판본 햄릿>이라고 앞서 펴낸 것이 1603년판과 1611년판인데, 이젠 4대비극 초판본이 1577년? 셰익스피어의 생애가 좀 불확실한 부분이 많지만 그래도 생년은 1564년으로 본다. 1577년이면 셰익스피어가 13살 때다. 그리고 그의 생전에 ‘4대비극‘이 따로 출간된 적도 없다. ‘1577년 오리지널 초판본‘?

내가 추정할 수 있는 건 두 가지다. 이 초판본 기획자가 정말 상식 이하일 정도로 무지하다는 것. 다른 하나는 상상을 넘어설 정도로 사악하여 독자를 우롱하고자 한다는 것. ‘1577년 초판본‘이라고 둘러대도 네들이 알겠어? 라는 식.(1577년은 셰익스피어의 가세가 기울어 학업을 중단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해다.) 이런 판본들이 버젓이 나오고 또 그걸 구매해서 읽는 독자들이 있다는 사실에 환멸을 느낀다...

PS. 환멸을 느낀다고 적었지만, 불량식품을 근절할 수 없듯이 불량도서도 출판 생태계에서 근절불가능할 것 같다. 다만 최소한의 질서를 위해서 ‘방송도서‘라는 딱지 대신에 ‘불량도서‘라는 표시 정도는 해주어야겠다. 허위과장 광고를 제재하는 차원에서. 알라딘도 선의의 독자(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이 정도 모니터링은 해주면 좋겠다. 거기까지는 서점의 본분이 아니라고 하면 할 수 없는 노릇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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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수 2020-04-02 20: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햄릿˝ 추천하시는 출판사가 있을까요?

로쟈 2020-04-02 20:47   좋아요 1 | URL
판본이 다양한 만큼 여러 번역본을 참고할 수밖에 없고요. 강의에서는 열린책들, 시공사, 문학동네판 등으로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