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 김애란 소설에 관한 페이퍼를 적었는데 내친 김에 오정희 소설의 의의에 대해서도 적는다. ‘의의‘라는 말이 거창하게 들린다면 ‘윤곽‘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최근에 대표작품선으로 <저녁의 게임>(문학과지성사)이 출간된 게 계기다.

연구자에게는 특별한 사건이 아니지만 문학강사에게는 이러한 ‘실물‘이 중요하다. 어떤 책, 어느 출판사의 책을 교재로 삼을 것이냐라는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저녁의 게임>이 당분간은 그런 교재 역할을 해주지 않을까 싶다. 물론 더 많은 작품을 읽고자 하는 독자라면 2017년에 나온(작가의 칠순기념이었겠다) ‘오정희 컬렉션‘(전5권)을 구비하면 된다. 그렇지만 모든 독자에게 요구하거나 기대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한국여성작가만을 다룬 문학강의를 히반기에 책으로 내려한다고 적었는데(목표는 늦가을이다) 실제 강의를 진행한 건 2017년 여름이었다. <인간문제>의 강경애를 제외하면 전후 대표 여성작가 10명을 선정하는 일이 일차적 과제였는데 선택의 여지가 없는 작가가 내 생각에 세 명 있었다. 박경리와 박완서, 그리고 오정희(박경리와 오정희는 김동리 문하에 속한다).

박경리(1926-2008)
박완서(1931-2011)
오정희(1947-)

생각하면 얼마전까지 동시대 작가였던 박경리와 박완서, 두 분의 나이차가 많지는 않다. 다만 박완서 선생이 늦게 등단한 탓에 문학사적으로는 한 세대 차이가 난다. 초기 대표작이나 작품집을 기준으로 하면 세 작가의 순번은 이렇게 된다.

박경리, <김약국의 딸들>(1962)
박완서, <나목>(1970)
오정희, <유년의 뜰>(1981)

세 작가 모두 수십 년간 작품활동을 했기에 세대구분은 의미가 크지 않을 수 있지만 내게는 각각 60년대, 70년대, 70년대말과 80년대 한국여성문학의 진화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여성문학‘이라고 특칭할 수 있는 것은 공통적으로 여성 주인공의 운명을 다루면서 여성 주체의 모색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 오정희 소설을 자리매김할 수 있는데 그때 두드러지는 특징으로 지목할 수 있는 건 대표 장편의 부재다. <새>가 장편소설로 분류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중편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오정희의 주요작은 이렇다(1968년 신춘문예로 데뷔했다).

<불의 강>(1975)
<유년의 뜰>(1981)
<바람의 넋>(1986)
<불꽃놀이>(1995)
<새>(1996)

이 다섯 권이 ‘오정희 컬렉션‘을 구성하고 있기도 하다. 2017년 강의에서는 이 가운데 <유년의 뜰>을 대표작으로 강의했는데 물론 특이한 선택이라고 할 수 없다. 다만 지금 시점에서 다시 교재를 고른다면 <저녁의 게임>(2020)이 좋은 선택지다. 게다가 ‘오정희 컬렉션‘에 들어있지 않은 작품도 포함돼 있다.

˝데뷔작 ‘완구점 여인‘(1968) 등 초기 소설과, 시대적 어둠을 통해 현재의 여성적 삶을 비추는 대표 작품인 전쟁 3부작 ‘유년의 뜰‘(1980), ‘중국인 거리‘(1979) ‘바람의 넋‘(1982)을 포함해 총 11편의 중단편소설이 실렸다. 특히 오정희 소설에서 두드러지지 않았던 아버지를 좀더 선명하게 재현한 ‘저 언덕‘(1989), 작가 특유의 모순적 존재론이 두드러지는 ‘얼굴‘(1999), 떠돌며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 원천을 조망한 ‘구부러진 길 저쪽‘(1995)은 <오정희 컬렉션>(문학과지성사, 2017)에 미수록된 작품들로, 작가와 해제자, 출판사의 면밀한 검토와 협의를 통해 새롭게 다듬어 실었다.˝

다른 여성문학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주체 형성과정에서는 이버지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가 관건이다. 오정희적 특이성도 그 관계의 특이성에 대한 해명을 필요로 한다. 이미 한차례 강의에서 다룬 것이지만 책으로 내기 전에 한번 더 검토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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