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주간경향(1366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스티븐 스미스의 <정치철학>(문학동네)을 두 차례 강의에서 읽은 김에 그에 관해 적었다. 정치철학 입문서, 내지 정치철학 조전 입문서로서 제 역할을 하는 책이다. 강의중에는 마이클 샌델의 관점과 비교하기도 했는데, 더 나아가 알튀세르의 정치철학 강의와 대조하며 읽어봐도 좋겠다. 예일대교수인 저자는 시카고대학에서 학위를 받았으며 레오 스트라우스의 제자다... 
















주간경향( 20. 03. 02) 스미스가 애국주의를 옹호하는 이유


<정치철학>은 미국 예일대 명강의 시리즈인 ‘오픈 예일 코스’의 하나로 출간되었고, 저자는 예일대 정치학과 교수다. 미국 명문대의 명강의를 직접 접해볼 수 있다는 게 이 시리즈의 매력인데, 이 책도 예외는 아니다. 플라톤에서부터 토크빌까지 고전의 반열에 오른 정치사상가들의 대표 저작을 해설해주고 그 현재적 의미까지 요령 있게 짚어준다. 비슷한 성격의 소개서들이 많이 나와 있지만 내용의 포괄성과 깊이에 대한 요구를 모두 충족시켜주는 입문서로서 훌륭하다. 플라톤의 <국가>나 홉스의 <리바이어던>,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 같은 원전을 직접 읽어보려는 독자들에게도 유익한 참고와 자극이 된다. 


저자가 다루고 있는 정치철학 고전들의 내용을 다시 음미하고 그에 대한 저자의 견해와 평가를 따라가보는 것은 짧은 리뷰가 감당할 수 없기에 여기서는 ‘애국주의를 옹호하며’라는 마지막 장의 내용만 살펴보려고 한다. 정치철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소개에 이어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를 정치의 기원적 문제를 다룬 비극으로 해설하는 책의 서두와 함께 종장은 저자의 개성과 입장을 가장 강하게 드러낸다. 정치철학 개론서의 마지막 장 주제가 애국주의인 경우는 분명 흔치 않을 것이다. 대학 캠퍼스에서 애국주의를 논하는 것은 “애국주의는 무뢰한의 마지막 피난처”(새뮤얼 존슨)라는 힐난을 듣기 쉽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그는 애국주의를 중요한 주제로 다시 검토하고, 또 옹호하고자 한다.

무엇이 애국주의인가. 저자는 오해를 피하면서 문제를 분명히 하기 위해 애국주의를 국가주의·세계주의와 대조한다. 국가주의를 잘 대변하는 사상가는 독일의 법철학자 카를 슈미트다. 그의 유명한 정의에 따르면 정치란 친구와 적의 구분에 근거한다. 정치적 감정이란 “가장 강렬하고 극단적인 적대감”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슈미트에게 정치적 합의나 평화는 가짜이고 오직 당파심과 전쟁만이 현실이다. 이러한 입장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세계주의다. 세계주의를 대변하는 사상가로서 칸트는 우리의 도덕적 의무가 인종·계급·민족과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널리 알려진 대로 칸트는 국가 간의 전쟁을 끝내고 영구평화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국제연합을 제안하기도 했다. 칸트에게 국민국가란 세계공화국으로 가는 도정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두 가지 입장에 대해 저자는 부정적인 평가를 내놓는다. 그에 따르면 “친구와 적을 나누는 슈미트식 구분이 정치를 전쟁으로 축소시키는 결과를 낳는다면, 칸트의 세계주의는 정치와 도덕을 혼동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국가주의는 부정적이지만 세계주의는 당장 실현가능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지향점이 되어야 하지 않느냐는 반론이 가능한데, 저자에 따르면 아이러니하게도 세계주의 이상은 우리를 오히려 도덕적 타락으로 이끌 수 있다. 실제로 각자가 어떤 삶을 사는지와 무관한 세계주의 국가에서는 몸 바쳐 싸울 만큼 가치 있는 것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세계는 엔터테인먼트의 세계, 재미의 세계, 쇼핑의 세계, 도덕적 진지함이 없는 세계이다.” 

저자는 국가주의냐, 세계주의냐라는 양자택일을 거부한다. 그 두 가지 입장이 모두 애국주의의 본질을 흐리게 만든다고 판단해서다. 애국주의가 반드시 편협함을 뜻하지는 않으며, 우리는 가까운 사람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하여 타인에 대한 관심으로 나아간다. 특정한 생활방식에 대한 헌신과 도덕적 보편주의를 모두 포용할 수 있다는 것이 저자가 특정한 종류의 사랑으로서 애국주의를 옹호하는 이유다. 

20. 02. 26.


P.S. <정치철학>은 번역도 훌륭한 편인데, 다만 한 곳의 번역은 동의하기 어렵다.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의 현재적 의의를 언급한 대목으로 5장의 마지막 문장이다. 


"노골적으로 또 필연적으로 가치평가적인 접근법, 정치질서, 즉 동시대 정치철학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조언해주고 권고해주는 접근법, 중립적이고 무당파적이라고 주장하면서 뒷문으로 슬그머니 그 가치와 우선권을 끌어들이는 접근법, 바로 그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접근법이다."(165쪽) 


수식관계가 잘못되었는데, 굵은 글씨로 표시한 부분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접근법이 아니라 '동시대 정치학'을 수식한다. 그리고 "노골적으로 또 필연적으로 가치평가적인 접근법"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접근법이다. 이에 맞게 조정하면 최소한 아래와 같이 옮겨질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접근법은 노골적으로 또 필연적으로 가치평가적인 접근법으로 정치질서, 혹은 중립적이고 무당파적이라고 주장하면서 뒷문으로 슬그머니 그 가치와 우선권을 끌어들이는 동시대 정치철학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조언해주고 권고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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