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재의 첫 시집 <나는 되어가는 기분이다>(창비)에서 표제시를 찾다가, 따로 없다는 걸 알고서 그냥 둘러보다가(야구경기장을 둘러보듯이) 나는 ‘생각되되 생각될 것‘ 같은 시가 시인의 태도나 문제의식을 잘 보여준다고 느꼈다.

공이 던져지고

나는 관객된 도리로, 연기되는 나를 잘 지켜보는 편이다. 지루함을 견디는 것마저 장점이 될 수 있다고 독백하며 저 쪽의 내가
떨어지는 공을 받는다

놀라운가, 아니다
박수가 터지기 전에 다음 독백을 시작할 것이다 던져진 대답이 돌아오기 전에 다시 공을 던지기로 약속되었다

생각이 가해지는 공과
생각이 사라지고
다시 생각이 가해지는 공 사이에

(...)

생각되되
생각될 것이다 우연 없이도 던져진 공은 떨어지는 공으로 약속되었으므로, 건너의 내가 건너의 내 역할을 독백할 필요조차 없으니
어떤 자학도 하지 말 것

보라, 던져질 공이 이제 내 손 위에 있다

중간에 다섯 연을 건너뛰었지만 시의 인상을 전하는 데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일단 그의 시는 무엇을 묘사하거나 어떤 감정을 드러내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지 않다. 말씨에도 관심이 없다(말씨를 고려하면 ‘생각되되‘ 같은 표현은 쓸 수 없다). 관심은 공처럼 던져진 말(언어)을 관찰하는 데 있다. 공을 말의 비유라 치고 교체해보자.

생각이 가해지는 말과
생각이 사라지고
다시 생각이 가해지는 말 사이에

우리가 보통 말을 할 때 생각을 말에 싣는다고(가한다고) 생각하는데, 과연 말을 함으로써 우리는 어떤 생각을 전달하는가? 그래서 공을 던지고 받는 것처럼 말을 주고받는가? 독백과 같은 자문자답에서라면 일인이역이 되어 공을 주고받는 것에 견줄 수도 있겠다. 그런데 그러한 전달이 목적이라면 공의 물성은 어떻게 되는가? 어떤 의미를 갖는가?

또 거꾸로 언어 이전에 사유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유의 언어의존성이란 관점에서 보자면 사태는 좀더 복잡해진다. 이 경우에 우리는 말을 갖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말에 의해 생각되는 것이기에. 생각이란 하는 게 아니라 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사유의 주체가 아니라 객체다. 공은 던져지고 우리는 다만 떨어지는 공을 받는다. 그것은 약속이고 필연이다. 그리고 이 필연의 세계는 지루함의 세계다. 생락한 연 가운데 두 연은 이렇다.

하품이 난다 참아야 한다 하품이 나지 않는다
참을 필요가 없다

하품을 하며
하품하는 역할에 충실한 나를 바라볼 필요가
이봐, 저 시체는
약속 이상으로 피를 많이 흘린다

약속 이상으로 피 흘리기? 나는 그것이 필연성의 세계에 낀 주체의 자리 같다. ˝생각되되 생각될 것˝에 불과하지만 그렇다는 사실을 생각하는 ‘나‘는 어떤가? 의심되되 의심될 것으로서의 나. 그래서 공의 주고받기에 견주어진 말의 주고받기는 주체가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는 변증법의 공간을 연출한다. 마지막 연은 그래서 자연스럽고 필연적이다.

보라, 던져질 공이 이제 내 손 위에 있다

언어의 지시성 문제를 물고늘어지려 한다는 점에서 이영재의 시는 오규원을 떠올리게 한다(이상에서 오규원으로 이어지는 한국시의 계보에서 한국어는 정서가 실린 말보다는 중성적 ‘기호‘에 해당한다). 실제로 테이블이나 토마토 같은 전형적인 오규원 시의 오브제들을 등장시킨 시도 있다.

뒷표지에는 오규원 계보에 속하는 이원 시인의 추천사도 실려 있는데 나는 이원과 이영재, 두 시인 모두 같은 과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오규원 시의 행방이 궁금한 독자라면 <나는 되어가는 기분이다>를 반길 만하다. 제목에 빠진 보어를 채워넣는다면, ‘나는 오규원이 되어가는 기분이다‘로 읽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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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24 10: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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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24 10: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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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24 12: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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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25 00: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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