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주간경향(1360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책세상)을 골랐는데, 3월에 예정된 스위스문학기행을 앞두고 루소의 대표 저작들을 읽어보려는 계획의 일환이면서 동시에 최근에 나온 알튀세르의 <루소 강의>(그린비)를 읽기 위한 사전 준비이기도 하다(알튀세르의 강의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의 대략을 간추렸다...
주간경향(20. 01. 13) 문명이 초래한 끊임없는 분쟁, 그리고 불평등
18세기 프랑스의 대표적 사상가 장 자크 루소가 처음 명성을 얻은 건 디종 아카데미의 공모 당선작 <학문예술론>(1750)을 발표하면서다. ‘학문과 예술의 부흥이 풍속의 순화에 기여했는가’라는 현상공모 제목에 어깃장이라도 놓듯이 루소는 학문과 예술의 연마가 오히려 용기와 덕성을 파괴하고 도덕적 자질을 약화시킨다고 주장했다. 뒤이어 발표한 <인간 불평등 기원론>(1755)에서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류의 역사를 인간의 도덕적 타락의 기원이 어디에 있는지 탐구한다. 그것은 본래 평등했던 인간이 어떻게 불평등한 사회를 건설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탐색이기도 하다.
‘본래적 평등’이란 말이 자연적 불평등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루소는 자연에 의해 정해지는 여러 차이를 자연적 또는 신체적 불평등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사람들의 동의로 정해지거나 용납되는 도덕적 또는 정치적 불평등이 있다. 루소의 관심사는 이 두 번째 불평등의 탄생과정이다. “어떠한 기적의 연쇄로 인해 강자가 약자에게 봉사하고 인민이 현실의 행복을 대가로 하여 관념 속에서 안식을 찾기로 결심했는가를 설명하는 일”이 그의 과제다.
널리 알려진 대로 루소는 그 기점이 사적 소유의 발생이라고 본다. 자연상태의 인간은 자기 보존만을 유일한 관심거리로 삼는다. 굶주림이나 그 밖의 다른 욕구가 충족된다면 부부나 가족조차 필요하지 않았다고 루소는 추정한다. 그렇지만 정착과 농경이 시작되면서 변화가 일어난다. 루소는 야금술(철)과 농업(밀)을 변화의 두 가지 동력으로 지목하는데, 땅에 울타리를 치면서 자기 땅임을 선언할 때 최초의 소유와 함께 가족이 형성되고 문명이 탄생한다. 그리고 함께 생활하는 습관은 부부애와 부성애를 낳게 된다. 생활의 규모가 커지고 여러 인간관계가 성립되면서 차츰 평등은 사라지고 소유와 함께 노동이 도입된다.
그런데 이런 과정을 통해서 문명을 루소는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문명이 가져온 것은 가장 강한 자와 최초 점유자 간의 끊임없는 분쟁이며 이는 투쟁과 살인으로 귀결되는 끔찍한 무질서를 초래한다. 국민 간의 전쟁과 살육의 역사로 점철된 것이 문명의 역사가 아니던가. 이러한 변화의 최종단계가 루소는 당대의 전제군주제라고 본다. 곧 인민에게는 절대복종만이 강요되는 맹목적인 전제군주제가 불평등의 마지막 도달점이다.
불평등의 기원에 대한 탐색을 통해서 루소가 환기시키는 것은 자연상태와 사회상태(문명)의 차이와 간극이다. 더불어 그는 미개인과 문명인을 새로운 각도에서 대비한다. 가령 미개인이 자기 자신 속에 살고 있는 데 반해 사회인은 언제나 자기 밖에 존재하며 타인의 평판 속에서만 살아간다고 지적한다. 루소는 사회인 혹은 문명인의 그러한 모습이 인간의 본원적 상태가 아니며 사회의 불평등이 낳은 결과라고 말한다. “대다수 사람이 굶주리고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최소한의 것마저 갖추지 못하는 판국인데 한 줌의 사람들에게서는 사치품이 넘쳐난다는 것은 명백히 자연법칙에 위배”된다는 주장에 동감한다면 루소는 여전히 우리와 동시대인이다.
20. 01. 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