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한겨레에 실은 '언어의 경계에서' 꼭지를 옮겨놓는다. 플로베르의 마지막 작품이자 미완성 유작 <부바르와 페퀴셰>(1881)에 대해서 적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여러 면에서 대조되는 작품인데, 러시아문학사에 견주면 고골의 문학세계(가령 <죽흔 혼>)와 오히여 친화적이다. 작가적 세계관의 유사성이 작품의 유사성으로 이어지지 않나 싶다. 플로베르와 고골을 비교한 연구가 있는지 궁금하다...
한겨레(19. 11. 29) '두 천치'의 무용한 지적 여행
문학 강의에서 곧잘 프랑스문학과 러시아문학 간의 평행이론에 대해 언급한다. 프랑스 근대소설사의 출발점이 되는 작가 발자크와 러시아 국민문학의 아버지 푸시킨의 생년이 똑같이 1799년이라는 사실에 덧붙여 그 뒤를 잇는 플로베르와 도스토옙스키의 생년이 1821년으로 같다. 발자크와 플로베르의 관계를 푸시킨과 도스토옙스키의 관계와 비교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두 나라 문학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한 인식을 가능하게 한다. 정확히 동시대를 살았던 플로베르와 도스토옙스키의 문학적 여정 역시도 당연히 대비해서 살펴볼 수 있다.
플로베르와 도스토옙스키는 똑같이 의사 아버지를 둔 차남이었고 간질 발작의 경험도 공유한다. 그렇지만 더 많은 대목에서 차이점을 보여주는데, 비밀 정치서클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시베리아에서 10년 가까운 수감과 유형생활을 했던 도스토옙스키의 경험을 플로베르는 갖고 있지 않다. 또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플로베르와 달리 도스토옙스키는 두 차례의 결혼에서 네 자녀를 둔 가장이었다. 이러한 간단한 차이점만으로도 두 작가의 마지막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플로베르의 유작 <부바르와 페퀴셰>(1881)의 두 주인공이 독신인 데 반해서 도스토옙스키의 마지막 작품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1880)이 부친살해 사건을 다룬다는 점은 자연스러운 차이로 보인다. 물론 두 소설은 그 이상의 차이점을 갖는다.
가장 큰 차이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부바르와 페퀴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두 주인공을 포함하여 내면성을 갖추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반면에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는 주요 인물들은 물론이고 주변적인 인물들조차도 복잡한 내면성의 소유자로 등장한다. 무더운 어느날 길거리 벤치에서 만나 대번에 의기투합하여 친구가 되는 부바르와 페퀴셰만 하더라도 필경사라는 직업으로 어림할 수 있듯이 남다른 개성의 소유자로 보기는 어렵다. 마흔일곱의 동갑내기 필경사인 두 사람은 각자의 사무실에서 반복적이고 단조로운 일상을 살아왔다. 그렇다고 불행했던 건 아니고 그런대로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존심을 갖게 되면서부터 그들은 자신들의 직업에 굴욕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던 차 부바르가 뜻밖에 막대한 유산의 상속자가 되면서 두 사람은 그동안의 생활을 청산하고 시골로 내려가 새로운 인생을 기획한다. 그들은 굴욕에서 벗어나 진짜 삶을 살 수 있을까.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반복적인 모든 시도에서 실패만을 거듭한다. 가령 게걸스럽게 책을 읽고 농사를 지어보지만 결과는 이들의 기대를 벗어나기 일쑤다. 게다가 읽는 책마다 다른 주장을 내놓아서 둘은 낭패감을 느낀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순진하고도 끝없는 지적 호기심은 온갖 학문으로의 지식순례에 나서게 만든다. 화학과 해부학, 생리학, 위생학, 천문학, 동물학, 지질학에 문학과 연극, 미학에 이르기까지 끝없이 이어지는 지식여행은 그렇지만 놀랍게도 어떠한 종착점에도 이르지 못한다. 부바르와 페퀴셰의 지적 편력은 다른 속물적인 부르주아들에 비하면 평가할 만하지만 궁극적으로 그들을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게 해주지는 않는다. 플로베르의 ‘두 천치’는 다만 지적인 천치가 될 뿐이다. 그들이 다시금 필경에 착수한다는 결말은 플로베르의 도저한 회의주의를 읽게끔 한다. “카라마조프 만세!”로 끝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세계와는 너무도 다른 세계다.
19. 11.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