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 쉰다는 주말에 왜 이리 할일이 많은지 모르겠다(하긴 주로 방구석에 있으니 바쁘다는 티도 안 나지만). 어느새 자정이 다가오고 있지만, '자정'의 의미도 예전같지 않다. 9시에 자고 6시에 일어나던 때가 인생의 어느 시절에는 분명히 있었던 듯한데 요즘은 아이가 잘 자는 걸로 대신 위안을 삼는다. 그리고는 내게 주어진 일을 해나가야지. '작가와 문학사이' 이번주는 지난 연말 '자정의 픽션'론을 들고 나온 작가 박형서 편이로군. 자정엔 픽션을 읽으란 얘기인가?..  

경향신문(07. 05. 26) [작가와 문학사이](19) 박형서-‘무색함’ 뒤의 새로움이여

이야기가 주인공인 소설이 있다. 머리에서 하루 200만배럴의 원유에 해당하는 고농축 유분이 흘러나오는 두유(頭油)청년에 관한 황당한 이야기(‘두유전쟁’), 화재 현장에서 많은 인명을 구해낸 의로운 소방대원들이 사실은 불에 탄 신체의 일부를 즐겨먹는 엽기적인 집단이라는 기이한 이야기(‘불 끄는 자들의 도시’), 이 세상에는 망자들이 저승으로 넘어가는 길이 있다는 다소 엉뚱한 이야기(‘노란 육교’), 바위구멍에 머리를 박고 죽게 된 어느 마을 사람들의 기막힌 이야기(‘너의 마을과 지루하지 않은 꿈’). 여항(閭巷)의 가담항설(街談巷說)이나 전기수(傳奇수)의 넉살좋은 입담을 연상시키는 이 이야기들을 박형서는 ‘자정의 픽션’이라고 부른다. 작가의 말을 빌려 이에 관해 조금 들어보자.

“내가 생각하는 ‘자정’이란 가라타니 고진이 그리워하는 ‘요란했던 근대’ 이후의 시간이다. 동시에 서사문학이라는 대가족 안에서 소설이 태동하던, 태아처럼 웅크린 채 자신의 미래에 대해 홀로 자문해보던 근대 이전의 저 먼 ‘새벽’을 의미하기도 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자정’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얕은 꿈을 꾸거나 혹은 잠을 이루지 못해 고단하게 중얼거리는 시간이다. 어느 쪽이든, 아침은 바로 거기서 시작된다고 믿는다.”

여기서 ‘자정’은 근대 이후(post-modern)이면서 근대 이전(pre-modern)을 의미한다. 즉 근대 이후의 시간은 근대 이전의 시간과 만난다. 박형서는 이 구부러진 원환의 시간띠 속에서 바로 지금이야말로 새로운 소설을 시작할 수 있는 때라고 말하는 듯하다. 모든 시간은 반복된다. 박형서의 ‘자정의 픽션’이 근대 이전의 이야기들, 우리가 패설(稗說)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연상케 한 데는 이런 저간의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첫번째 단편집 ‘토끼를 기르기 전에 알아두어야 할 몇 가지 것들’에 이어 최근 ‘자정의 픽션’이라는 단편집을 출간한 박형서에게 소설은 이야기다. 그래서인지 그의 소설은 흔히 단편소설을 읽었을 때 얻게 되는 삶에 대한 새로운 통찰이나 어떠한 정서적 여운도 우리에게 주지 못한다. 아니 주지 않는다. 작가는 최소한의 주제의식조차 거부한다.

그는 ‘은근히 겁주고 얄밉게 웃다가 말 돌리고, 상대가 모르는 예를 들면서 정신없이 들이대고, 무턱대고 말허리를 자르더니 갑자기 반말하면서 몰아세우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 딴청을 부린다.’(‘논쟁의 기술’) 이 ‘막나가기’ 신공 끝에 누군가는 “피범벅이 되어 떡볶이마냥” 나뒹굴지만, 박장대소하며 웃던 독자들은 “그래서, 뭐?” 하면서 어깨를 으쓱한다. 그러거나 말거나다. 누군가의 말처럼 거장들(루카치 골드만 지라르 등등)의 소설에 관한 모모한 정의가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다시 한번 말하거니와 이런 무색한 순간이야말로 작가에게는 새로운 소설의 아침을 열 수 있는 시간이다. 이 모든 무색함이야말로 작가가 의도한 것임을 잊지 말자. 만약 굳이 박형서 소설에서 주제를 끄집어낼 수 있다면 아마도 새로운 소설에 대한 이런 무색한 열망이 아닐까. 그것은 소설에 부과된 규범과 문법을 무색케 하면서 자기 자신마저도 하찮은 농담거리로 무색케 하고야 말겠다는 의지에 다름 아니다.

한국의 순수 서정소설을 대표하는 주요섭의 ‘사랑손님과 어머니’를 19금(禁)의 음란물로 만들어버린 ‘‘사랑손님과 어머니’의 음란성 연구’는 이러한 작가의 의도를 가장 노골적이면서도 자기비하적으로 연출한 소설이다. 여기서 노골적이라 하는 것은 ‘달걀’을 ‘불알’로 재해석하거나 ‘달걀먹기’가 옥희와 옥희 어머니가 ‘사랑손님’과 벌이는 성교행위임을 폭로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소설이 노골적인 이유는 한국문학의 연구풍토와 모모한 문학론들에 대한 경멸과 야유를 퍼붓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경멸과 야유는 작가 자신에게도 그대로 돌아간다. 박형서의 이 거침없으면서도 다소 우울한 시도가 어디까지 이어질지는 아직 미지수다. 그러나 끝까지 가보기를….(심진경|문학평론가)

07. 05. 26.

P.S. '소설'이라고 통칭되고 있지만 작가가 쓴 건 '단편'들, 곧 '짧은 이야기(short story)'들이고, 이건 '거장들(루카치 골드만 지라르 등등)'이 정의한 소설(로만)과 무관하다. 내 생각에 소설에 관한 담론들의 많은 혼선/혼동이 이 두 장르/종류를 구별하지 않아서 빚어진다. 재미있고 유쾌한 '이야기들'은 근대 이전에도 있었고, 근대 이후에도 있을 것이다. 정오와 자정을 따로 가리지 않고. 박형서의 이야기들이 예증하는 것도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그 이상의 거창한 의미부여는 좀 음란해 보인다. 아래는 <자정의 픽션> 출간 당시의 서평기사 중 하나이다.

동아알보(06. 11. 04) "소설이란 원래 재미를 주는 거짓말”

소설에 자정의 시간이 오는가? 젊은 작가 박형서(34·사진) 씨의 새 단편소설집 ‘자정의 픽션’(문학과지성사)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이다. 박 씨는 ‘독특하고 극단적인 상상력’으로 호평받아 온 젊은 작가. 새 소설집에서 그는 특유의 상상력에 포복절도할 유머를 섞어 놓았다.

이를테면 ‘'사랑손님과 어머니'의 음란성 연구’라는 제목으로 논문 형식의 단편소설을 썼다. 주요섭의 유명한 단편 ‘사랑손님과 어머니’가 실은 사랑손님과 딸 옥희의 성애를 교묘하게 다뤘다는 주장이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등 유명한 저서의 부분 부분을 이어 모은 실험도 주목할 만하거니와, 독자에게 전하려는 메시지가 무엇인가에 대한 작가의 답변이 흥미롭다. “요즘같이 바쁜 세상에 독자들이 메시지를 찾아가면서 읽겠느냐”는 것. ‘그렇다면 독자는 무엇을 얻는가’라는 질문에 그는 더욱 흥미로운 답을 내놓았다. “재미요.”

이야기꾼은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이야기를 한다는, 소설이 출발했던 때의 모습을 박 씨는 새롭게 일깨우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소설은 재미와 감동을 주는 ‘거짓말’이 아니었던가. 사실 ‘사랑손님과 어머니의 음란성 연구’에서 아버지뻘 되는 사랑손님과 소녀 옥희의 원조교제로 얘기를 끌어가는 것도 황당하지만, ‘사랑손님이 자신의 달걀을 옥희에게 주는 행위’를 ‘사랑손님이 옥희에게 정액을 발사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부분에 이르면 말도 안 되는 주장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배를 잡게 된다.

“저는요, 작가는 결국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사람들한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주는 사람요. 소설을 보고 뭘 의미할까, 뭘 상징할까 생각하는 걸 말리지는 않겠지만, 저의 가장 큰 목표는 사람들이 읽고 재미있어 하는 이야기를 쓴다는 거예요.”

또 다른 단편 ‘논쟁의 기술’은 말싸움에서 승리하는 방법을 설명하는 소설. ‘유리한 주제의 선정’ ‘은근히 겁주기’ ‘상대가 모르는 예를 들기’ 등 실전에 도움 되는 기술을 소제목으로 나열하고 부합하는 사례들을 유쾌하게 늘어놓는다. “우리 사회 어느 곳에서나 논쟁이 벌어지잖아요. 억지도 말만 잘하면 성립되고. 그런 모습을 비꼰 것일 수도 있겠는데,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진 마시고 재미있게 읽어주시면 제 바람이 이뤄지는 것이죠.”

소설에 자정의 시간이 오는가에 대한 그의 답변은 “그렇다”이다. “그러나 자정은 하루의 끝이 아니라 새 아침이 시작되는 시간”이라고 작가는 설명한다. 순도 높은 재미로 가득 찬 소설 쓰기로 그는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고 있다.(김지영 기자)

P.S.2. 영화를 맞수를 상대하는 작가들이 드물지 않듯이 때론 개콘을 라이벌로 꼽는 작가도 있는 법. 그의 선전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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