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려진 바이지만, 김훈의 신작 <남한산성>(학고재, 2007)이 상반기 한국문학 최고의 베스트셀러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문학의 전반적인 위기/침체론과 일본문학의 지속적인 강세 속에서 사뭇 이례적인 '스코어'이다. 그와 견주자면 이미 많은 리뷰들이 나와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평단의 미적지근한 모양이다(정말로 그런 기이한 무관심에 의해서 김훈과 공지영은 묶이는 것일까?). 현장 평론가인 이명원씨의 리뷰를 읽어보니 그렇다. 평론가들에게는 이미 '견적'이 다 나와있는 작가인 탓일까?(하지만 같은 기준을 적용한다면 평론을 쓸 일 자체가 드문 것 아닐까?) 다른 이유도 있는 것인지는 더 두고봐야겠다...

한겨레(07. 05. 10) 김훈의 소설은 유령인가?
문학평론가라는 자가 왜 문학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이 마음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질 때가 있다. 특히 요즘처럼 한국 소설의 침체가 심각하게 운위되는 때는 더욱 그러하다. 대중적인 차원에서 일본 소설 읽기가 선풍인 것처럼 말해질 때, 그 현상에는 동의하지만, 한국 소설도 아직 살아있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출판평론가 한기호씨의 견해를 들어보면, 위기의 원인은 명료해 보인다. 가장 우선적으로 언급되는 것은 비평의 신뢰성 상실이다. 그간의 한국 소설 비평이 작품에 대한 나침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덕담과 주례사로 일관하고 있는 비평가들의 발언을 신뢰했던 독자들이, 오히려 지금 한국 소설에 대한 불신을 노골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소설의 단편장르에의 집중현상도 위기의 한 요인으로 분석되기도 한다. 이러한 주장은 <한겨레>의 최재봉 문학전문기자나 문학평론가 남진우씨 등에 의해 제기된 바 있는데, 한국 문단과 문학상 제도가 단편소설에 편중됨으로써, 시장에서 독자적으로 생존 가능한 장편소설의 미학적 혁신과 문학성이 취약해졌다는 견해로 요약될 수 있다(*이 문제에 대해서는 연초에 몇 차례 페이퍼로 다룬 바 있다). 설득력이 있는 견해인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로 단편소설이 집중적으로 게재되고 있는 문예지 시장이 침체일로를 겪고 있는 것을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소설 독자층의 변화에서 위기의 원인을 찾는 견해도 존재한다. 문학평론가 천정환씨는 현재 한국의 소설 독자층은 대단히 협소한 경계를 이루고 있다고 말한다. 문학지망생 그룹과 20~30대의 여성 독자들은 여전히 한국 소설의 유력한 독자층이지만, 1970∼80년대의 소설시장의 활황을 가능하게 했던 30대 이상의 남성 독자들과 소설에서 ‘재미’ 이상의 것을 추구했던 계몽독자 또는 지식인 독자들이 대거 소설 시장에서 이탈해버렸다는 것이다. 일리 있는 주장인 것이 소설보다는 역사 전기물과 인물평전류가 인문학의 위기 속에서도 폭넓게 읽히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나는 ‘재미’도 중요하고, ‘의미’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재미와 의미가 정교하게 결합된 소설의 출현을 기대하는 것은, 베스트셀러 외국 소설들이 그간 보여주었던 문학시장의 사정에서 유추할 수 있다. 한때 폭발적 독서붐을 일으켰던 쿤데라와 베르베르의 소설들, 쥐스킨트와 하루키, 그리고 에코의 소설들은 재미와 결합된 소설적 의미의 파급력을 잘 보여주었고, 한국 독자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러한 사실과 함께, 나는 유독 소설에 대해서는 깊은 실망감을 표출하고 있는 성인남성 독자들을 견인할 수 있는 성숙한 고민을 담은 소설도 더 많이 출현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소설시장에서 독자들의 이 압도적인 성적 불균형이 얼마간이라도 시정되기 위해서는, 소설 읽기에서 이탈한 성인남성 독자들과 계몽독자들에게, 소설을 읽는 일이 단지 ‘시간 때우기’의 수단만이 아니고 성숙한 인간세계에 대한 심원한 고민의 산물일 수 있다는 기대를 충족시키는 소설의 출현이 필요하다.

이 점에서 소설가 김훈의 작품들에 대한 대중들의 뜨거운 독서열에 대해 치밀한 비평적 분석이 가해질 필요가 있다. 김훈의 소설들은 그가 써내려간 에세이들을 포함하여, 산다는 일의 치욕과 개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구조화된 권력의 냉혹한 질서에 대한 정교한 보고서다. 그런데 거기서 멈추지 않고, 무력한 개인이 몰락할 것이 분명한 운명 앞에서조차, 그것과 치열하게 싸우고 또 패배를 끝없이 자기화하는 면모를 드라마틱하게 형성화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김훈 소설에 대한 비평가들의 무관심은 실로 기이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김훈의 소설은 유령인가?(이명원/문학평론가·<비평과 전망> 편집주간)
07. 05. 11-12.
P.S. 온라인 학술저널 '담비'에서도 김훈에 대한 특집기사를 엊그제부터 연재하고 있다(기사가 회원전용으로 돌려져 있어서 붙여놓았던 링크주소는 지운다. 대신에 무화과나무님이 옮겨놓은 기사를 참조하시길. http://www.aladin.co.kr/blog/mylibrary/wmypaper.aspx?PaperId=1114273). 기자는 마지막 문단에서 예전에 '로쟈'가 쓴 '김훈론'을 인용하고 있어서 이채롭다.
이처럼 그는 자기에게만큼 타인에게도 애정을 베푸는데 거기서 발생하는 장점이자 단점 중의 하나는 손만 대면 작품으로 만들어버린다는 데에 있다. 인터넷서점 알라딘에서 독특하고 깊이 있는 북 리뷰로 필명을 떨치고 있는 ‘로쟈’라는 분은 김훈의 문체가 기본적으로 에세이스트의 것이고 소설가의 문체는 아니라고 지적한 바 있는데, 그 이유는 아름다워도 적당히 아름다워야지 너무 아름다우면 소설이 안 된다는 데 있었다. 평범한 것도 김훈이 묘사하면 평범함의 극단이 된다는 것을 잘 알기에 공감이 가는 지적이라 해두고 싶다.
아마도 인용출처는 '문체, 혹은 양파에 대한 생각'(http://www.aladin.co.kr/blog/mylibrary/wmypaper.aspx?PCID=2040596&paperId=841840)인 듯하다. 기자가 참조한 듯한 인용문이 포함돼 있는 원래 문단은 이렇다.
"카뮈와의 논쟁에서 사르트르-장송이 지적했던 바는 카뮈의 아름다운 문체가 ‘앙가주망’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달’이 아니라 ‘손가락’만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김훈의 소설에도 똑같은 말을 할 수가 있다. 그의 아름다운 문체, 그리고 그걸 뒷받침하는 허무주의적 세계관(“내가 무어라 말했을 때, 그 반대로 말을 해도 다 말이 되는 것 아닌가.”)은 소설에 적합하지 않다. 소설가의 문체는 적당히 아름다워야 한다. 다르게 말하면 적당히 지저분해야 한다. 그것이 ‘산문적 일상’을 묘사/기술하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즉 소설가가 자신의 얼굴, 필체, 문체를 갖는 건 바람직하며, 동시에 좋은 소설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긴 하지만, ‘너무 아름다운 문체’이어서는 안된다(<내겐 너무 예쁜 당신>이란 프랑스 영화의 문제의식이기도 한데, ‘너무 아름다운 여자’는 ‘아내’로서 적합하지 않다. 결혼생활은 ‘산문적’이기 때문이다)." '독특'하다기보다는 상식을 재확인하는 수준의 내용이다...
P.S. 김훈의 문장에 대한 평 한 가지를 더 옮겨놓는다.
국민일보(07. 05. 18) 김훈 소설의 문장
소설가 김훈은 우리 문단에서 특이한 작가다. 오래 전부터 그는 신문 기사나 산문 등을 통해 문장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오다가, 2000년대 들어 장편소설 '칼의 노래'를 통해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을 개척하고 있다. 그가 발표하는 작품에는 거의 모든 매체들이 비중있게 지면을 할애할 만큼 그는 스타작가가 됐다. 우리나라의 주요한 문학상도 하나하나 차지하고 있다.
이런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근작 장편 '남한산성'을 보면 그가 얼마나 도저하게 세상을 바라보는지, 그 깊고 비장한 인식이 얼마나 촘촘한 문장으로 표현돼 나오는지,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사(私)소설화·여성화돼가는 우리 소설계에서 얼마나 튼실한 웅성(雄性)으로 남다른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지를 맛볼 수 있다.
그러나 더 뛰어난 소설의 출현을 고대하는 독자로서 한가지 주문을 하고 싶다. 문장을 아끼고 인물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김훈에게서 문장을 버리라는 것은 가혹한 주문일 것이다. 그는 2000년대 우리 문단에 나타난 문장의 검객(劍客)이다. 그의 칼은 유례없이 예리하다. 군더더기 없이 매끄럽고 신속하게 베어버리는 검법으로 강호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는 최근 한겨레 신문에 실린 한 대담에서 "저는 사실 글을 쓴다는 일에 대해서 아주 잔혹한 훈련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가 문장에 얼마나 집요한 관심을 갖는지 엿볼 수 있게 해주는 말이다.
그러나 이야기가 살아나기 위해서는 때론 그런 문장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예를 들어보자. 청나라 장수의 역관(譯官)이 되어 병자호란 때 매국행위를 했던 정명수를 묘사하는 문장- "눈치로 단련된 천례(賤隷)의 총기는 예민했다. 정명수는 여진말과 몽고말을 쉽게 배웠다. 사람의 마음에서 비롯하는 정처 없는 말과 사물에서 비롯하는 정처 있는 말이 겹치고 비벼지면서, 정처 있는 말이 정처 없는 말 속에 녹아서 정처를 잃어버리고, 정처 없는 말이 정처 있는 말 속에 스며서 정처에 자리잡는 말의 신기루 속을 정명수는 어려서부터 아전의 매를 맞으며 들여다보고 있었다."(72쪽)
산문으로는 아름다운 글이지만 소설로서는 애매한 표현이다. 이런 문장에 의지하면 소설의 형상화는 힘들게 될 것이다. 반면, 김상헌이 임금의 격서를 대장장이 서날쇠에게 전하는 장면은 '남한산성'에서 가장 돋보이는 대목 중 하나로 읽혀진다. 떠나는 서날쇠가 눈 위에서 김상헌에게 큰 절을 하고 김상헌이 땅에 엎드려 맞절을 받는 장면은 특히 뛰어나게 다가오는 데, 이 부분에는 김훈 특유의 관념과 유미(唯美)의 극한을 탐색하는 문장이 개입하지 않고 있다.
소설은 아무래도 등장 인물들의 성격을 만드는 게임이다. 그래서 소설의 도처에서 유미한 문장이 기승을 부리면 등장인물의 성격은 살아나기 어렵다. '남한산성'의 하이라이트는 왕조의 운명을 가르는 주전파 김상헌과 주화파 최명길의 논리 대결이다. 이 작품에서 두 사람의 논쟁은 장엄하다. 그러나 문장에 눌려서 인물이 살아나지 않는 흠이 있다.
요즘 보도되고 있는 이 소설에 관한 많은 기사들을 보면 딱히 삼전도 굴욕의 무엇을 형상화한 내용이라고 자신있게 쓴 내용을 만나기 어렵다. 문장이 작품을 압도하는 데서 나타난 현상이 아닌가 생각된다. 소설의 독자는 작품 속의 등장인물과 연애할 권리가 있다. 이것은 소설 독자의 중요한 특권이다. '남한산성'이 역사적 사실에 대한 장대한 인식은 보여주었지만, 연애하고 싶고 두고두고 생각나게 하는 인물을 만들어내는 데까지도 이른 것인지는 의문이다. 앞으로 김훈 소설이 오랜 세월에 걸쳐 더 빛나기 위해서는 이 지점에서 씨름해야 할 것이란 생각이다.(임순만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