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려진 바이지만, 김훈의 신작 <남한산성>(학고재, 2007)이 상반기 한국문학 최고의 베스트셀러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문학의 전반적인 위기/침체론과 일본문학의 지속적인 강세 속에서 사뭇 이례적인 '스코어'이다. 그와 견주자면 이미 많은 리뷰들이 나와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평단의 미적지근한 모양이다(정말로 그런 기이한 무관심에 의해서 김훈과 공지영은 묶이는 것일까?). 현장 평론가인 이명원씨의 리뷰를 읽어보니 그렇다. 평론가들에게는 이미 '견적'이 다 나와있는 작가인 탓일까?(하지만 같은 기준을 적용한다면 평론을 쓸 일 자체가 드문 것 아닐까?) 다른 이유도 있는 것인지는 더 두고봐야겠다... 

한겨레(07. 05. 10) 김훈의 소설은 유령인가?

문학평론가라는 자가 왜 문학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이 마음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질 때가 있다. 특히 요즘처럼 한국 소설의 침체가 심각하게 운위되는 때는 더욱 그러하다. 대중적인 차원에서 일본 소설 읽기가 선풍인 것처럼 말해질 때, 그 현상에는 동의하지만, 한국 소설도 아직 살아있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출판평론가 한기호씨의 견해를 들어보면, 위기의 원인은 명료해 보인다. 가장 우선적으로 언급되는 것은 비평의 신뢰성 상실이다. 그간의 한국 소설 비평이 작품에 대한 나침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덕담과 주례사로 일관하고 있는 비평가들의 발언을 신뢰했던 독자들이, 오히려 지금 한국 소설에 대한 불신을 노골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소설의 단편장르에의 집중현상도 위기의 한 요인으로 분석되기도 한다. 이러한 주장은 <한겨레>의 최재봉 문학전문기자나 문학평론가 남진우씨 등에 의해 제기된 바 있는데, 한국 문단과 문학상 제도가 단편소설에 편중됨으로써, 시장에서 독자적으로 생존 가능한 장편소설의 미학적 혁신과 문학성이 취약해졌다는 견해로 요약될 수 있다(*이 문제에 대해서는 연초에 몇 차례 페이퍼로 다룬 바 있다). 설득력이 있는 견해인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로 단편소설이 집중적으로 게재되고 있는 문예지 시장이 침체일로를 겪고 있는 것을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소설 독자층의 변화에서 위기의 원인을 찾는 견해도 존재한다. 문학평론가 천정환씨는 현재 한국의 소설 독자층은 대단히 협소한 경계를 이루고 있다고 말한다. 문학지망생 그룹과 20~30대의 여성 독자들은 여전히 한국 소설의 유력한 독자층이지만, 1970∼80년대의 소설시장의 활황을 가능하게 했던 30대 이상의 남성 독자들과 소설에서 ‘재미’ 이상의 것을 추구했던 계몽독자 또는 지식인 독자들이 대거 소설 시장에서 이탈해버렸다는 것이다. 일리 있는 주장인 것이 소설보다는 역사 전기물과 인물평전류가 인문학의 위기 속에서도 폭넓게 읽히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나는 ‘재미’도 중요하고, ‘의미’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재미와 의미가 정교하게 결합된 소설의 출현을 기대하는 것은, 베스트셀러 외국 소설들이 그간 보여주었던 문학시장의 사정에서 유추할 수 있다. 한때 폭발적 독서붐을 일으켰던 쿤데라와 베르베르의 소설들, 쥐스킨트와 하루키, 그리고 에코의 소설들은 재미와 결합된 소설적 의미의 파급력을 잘 보여주었고, 한국 독자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러한 사실과 함께, 나는 유독 소설에 대해서는 깊은 실망감을 표출하고 있는 성인남성 독자들을 견인할 수 있는 성숙한 고민을 담은 소설도 더 많이 출현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소설시장에서 독자들의 이 압도적인 성적 불균형이 얼마간이라도 시정되기 위해서는, 소설 읽기에서 이탈한 성인남성 독자들과 계몽독자들에게, 소설을 읽는 일이 단지 ‘시간 때우기’의 수단만이 아니고 성숙한 인간세계에 대한 심원한 고민의 산물일 수 있다는 기대를 충족시키는 소설의 출현이 필요하다.



이 점에서 소설가 김훈의 작품들에 대한 대중들의 뜨거운 독서열에 대해 치밀한 비평적 분석이 가해질 필요가 있다. 김훈의 소설들은 그가 써내려간 에세이들을 포함하여, 산다는 일의 치욕과 개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구조화된 권력의 냉혹한 질서에 대한 정교한 보고서다. 그런데 거기서 멈추지 않고, 무력한 개인이 몰락할 것이 분명한 운명 앞에서조차, 그것과 치열하게 싸우고 또 패배를 끝없이 자기화하는 면모를 드라마틱하게 형성화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김훈 소설에 대한 비평가들의 무관심은 실로 기이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김훈의 소설은 유령인가?(이명원/문학평론가·<비평과 전망> 편집주간)

07. 05. 11-12.

P.S. 온라인 학술저널 '담비'에서도 김훈에 대한 특집기사를 엊그제부터 연재하고 있다(기사가 회원전용으로 돌려져 있어서 붙여놓았던 링크주소는 지운다. 대신에 무화과나무님이 옮겨놓은 기사를 참조하시길. http://www.aladin.co.kr/blog/mylibrary/wmypaper.aspx?PaperId=1114273). 기자는 마지막 문단에서 예전에 '로쟈'가 쓴 '김훈론'을 인용하고 있어서 이채롭다.

이처럼 그는 자기에게만큼 타인에게도 애정을 베푸는데 거기서 발생하는 장점이자 단점 중의 하나는 손만 대면 작품으로 만들어버린다는 데에 있다. 인터넷서점 알라딘에서 독특하고 깊이 있는 북 리뷰로 필명을 떨치고 있는 ‘로쟈’라는 분은 김훈의 문체가 기본적으로 에세이스트의 것이고 소설가의 문체는 아니라고 지적한 바 있는데, 그 이유는 아름다워도 적당히 아름다워야지 너무 아름다우면 소설이 안 된다는 데 있었다. 평범한 것도 김훈이 묘사하면 평범함의 극단이 된다는 것을 잘 알기에 공감이 가는 지적이라 해두고 싶다.

아마도 인용출처는 '문체, 혹은 양파에 대한 생각'(http://www.aladin.co.kr/blog/mylibrary/wmypaper.aspx?PCID=2040596&paperId=841840)인 듯하다. 기자가 참조한 듯한 인용문이 포함돼 있는 원래 문단은 이렇다.

"카뮈와의 논쟁에서 사르트르-장송이 지적했던 바는 카뮈의 아름다운 문체가 ‘앙가주망’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달’이 아니라 ‘손가락’만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김훈의 소설에도 똑같은 말을 할 수가 있다. 그의 아름다운 문체, 그리고 그걸 뒷받침하는 허무주의적 세계관(“내가 무어라 말했을 때, 그 반대로 말을 해도 다 말이 되는 것 아닌가.”)은 소설에 적합하지 않다. 소설가의 문체는 적당히 아름다워야 한다. 다르게 말하면 적당히 지저분해야 한다. 그것이 ‘산문적 일상’을 묘사/기술하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즉 소설가가 자신의 얼굴, 필체, 문체를 갖는 건 바람직하며, 동시에 좋은 소설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긴 하지만, ‘너무 아름다운 문체’이어서는 안된다(<내겐 너무 예쁜 당신>이란 프랑스 영화의 문제의식이기도 한데, ‘너무 아름다운 여자’는 ‘아내’로서 적합하지 않다. 결혼생활은 ‘산문적’이기 때문이다)." '독특'하다기보다는 상식을 재확인하는 수준의 내용이다...

P.S. 김훈의 문장에 대한 평 한 가지를 더 옮겨놓는다.

국민일보(07. 05. 18) 김훈 소설의 문장

소설가 김훈은 우리 문단에서 특이한 작가다. 오래 전부터 그는 신문 기사나 산문 등을 통해 문장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오다가, 2000년대 들어 장편소설 '칼의 노래'를 통해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을 개척하고 있다. 그가 발표하는 작품에는 거의 모든 매체들이 비중있게 지면을 할애할 만큼 그는 스타작가가 됐다. 우리나라의 주요한 문학상도 하나하나 차지하고 있다.

이런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근작 장편 '남한산성'을 보면 그가 얼마나 도저하게 세상을 바라보는지, 그 깊고 비장한 인식이 얼마나 촘촘한 문장으로 표현돼 나오는지,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사(私)소설화·여성화돼가는 우리 소설계에서 얼마나 튼실한 웅성(雄性)으로 남다른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지를 맛볼 수 있다.

그러나 더 뛰어난 소설의 출현을 고대하는 독자로서 한가지 주문을 하고 싶다. 문장을 아끼고 인물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김훈에게서 문장을 버리라는 것은 가혹한 주문일 것이다. 그는 2000년대 우리 문단에 나타난 문장의 검객(劍客)이다. 그의 칼은 유례없이 예리하다. 군더더기 없이 매끄럽고 신속하게 베어버리는 검법으로 강호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는 최근 한겨레 신문에 실린 한 대담에서 "저는 사실 글을 쓴다는 일에 대해서 아주 잔혹한 훈련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가 문장에 얼마나 집요한 관심을 갖는지 엿볼 수 있게 해주는 말이다.

그러나 이야기가 살아나기 위해서는 때론 그런 문장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예를 들어보자. 청나라 장수의 역관(譯官)이 되어 병자호란 때 매국행위를 했던 정명수를 묘사하는 문장- "눈치로 단련된 천례(賤隷)의 총기는 예민했다. 정명수는 여진말과 몽고말을 쉽게 배웠다. 사람의 마음에서 비롯하는 정처 없는 말과 사물에서 비롯하는 정처 있는 말이 겹치고 비벼지면서, 정처 있는 말이 정처 없는 말 속에 녹아서 정처를 잃어버리고, 정처 없는 말이 정처 있는 말 속에 스며서 정처에 자리잡는 말의 신기루 속을 정명수는 어려서부터 아전의 매를 맞으며 들여다보고 있었다."(72쪽)

산문으로는 아름다운 글이지만 소설로서는 애매한 표현이다. 이런 문장에 의지하면 소설의 형상화는 힘들게 될 것이다. 반면, 김상헌이 임금의 격서를 대장장이 서날쇠에게 전하는 장면은 '남한산성'에서 가장 돋보이는 대목 중 하나로 읽혀진다. 떠나는 서날쇠가 눈 위에서 김상헌에게 큰 절을 하고 김상헌이 땅에 엎드려 맞절을 받는 장면은 특히 뛰어나게 다가오는 데, 이 부분에는 김훈 특유의 관념과 유미(唯美)의 극한을 탐색하는 문장이 개입하지 않고 있다.

소설은 아무래도 등장 인물들의 성격을 만드는 게임이다. 그래서 소설의 도처에서 유미한 문장이 기승을 부리면 등장인물의 성격은 살아나기 어렵다. '남한산성'의 하이라이트는 왕조의 운명을 가르는 주전파 김상헌과 주화파 최명길의 논리 대결이다. 이 작품에서 두 사람의 논쟁은 장엄하다. 그러나 문장에 눌려서 인물이 살아나지 않는 흠이 있다.

요즘 보도되고 있는 이 소설에 관한 많은 기사들을 보면 딱히 삼전도 굴욕의 무엇을 형상화한 내용이라고 자신있게 쓴 내용을 만나기 어렵다. 문장이 작품을 압도하는 데서 나타난 현상이 아닌가 생각된다. 소설의 독자는 작품 속의 등장인물과 연애할 권리가 있다. 이것은 소설 독자의 중요한 특권이다. '남한산성'이 역사적 사실에 대한 장대한 인식은 보여주었지만, 연애하고 싶고 두고두고 생각나게 하는 인물을 만들어내는 데까지도 이른 것인지는 의문이다. 앞으로 김훈 소설이 오랜 세월에 걸쳐 더 빛나기 위해서는 이 지점에서 씨름해야 할 것이란 생각이다.(임순만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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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80 2007-05-11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훈 스스로 사유의 계통없음을 공시한 이상 비평가의 어떠한 지적도 피해갈 방편을 마련했기 때문은 아닐까요. 미당이 스스로를 무당이라 칭했듯 말이죠.

로쟈 2007-05-12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훈식 허무주의가 어떤 '사상'의 정립과도 거리를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한데요, 저는 미당식 초월주의와는 그래도 계보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김훈은 그래도 '전장(戰場)'에 있는 작가라서요...

이비 2007-05-13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담비 기사의 말미가 로쟈님으로 마무리되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덕분에, 로쟈님의 글도 찾아서 읽게 되었네요(‘진행중’ 꼬리표를 떼기 전이시라 전 본의 아니게 담비 회원가입의 수고를 치러야 하였지요. 아, 그리고 ‘양파’ 페이퍼 너무 길어서 읽다가 눈 빠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옮겨 놓으신 담비 기사, 그리고 기사에서 언급되었던 로쟈님의 글을 연이어 읽고 난 뒤 몇 가지 의문점이 들었습니다. 로쟈님은 김훈이 에세이스트는 될 수 있어도 소설가는 될 수 없는 이유로 그의 문체가 아름답다는 점(즉, 문체가 지저분하지 않다는 점)과 작가가 허무주의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는데, 담비 기사에서는 둘 중 첫 번째 이유만을 옮겨 놓고 있습니다(그리고 그 이유도 ‘지저분하지 않다’는 로쟈님의 부연은 생략하고 ‘적당히 아름다운 게 아니라 너무 아름다워서’ 라고 다소 완곡하게 표현되었네요). 하지만 저는, 문체가 지저분하지 않기 때문에 소설이 아니다, 소설은 문체가 아름다워서는 안 된다 라는 단언이 언뜻 이해가 잘 안 됩니다. 저의 이러한 혼란은 아마도, 지저분하다 라는 형용어가 갖는 윤리적 함의 때문일 텐데요, 즉, 지저분하다는 우선 더럽다는 뜻을 가장 먼저 떠올리게 만들고 그것은 상식의 수준에서는 결코 애호의 요건이 될 수 없기 때문이지요. 담비 기사에서 로쟈님의 글을 언급하면서 그냥 너무 아름다워서 라고만 표현했던 것도 이런 곡해의 가능성을 염려한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됩니다. 그렇다면 1)로쟈님의 표현, 소설은 ‘문체가 지저분해야 한다’도 ‘문체가 너무 아름다워서는 안 된다’는 말의 강조형 정도로 받아 들이고 그 외에 다른 뜻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이해해도 될까요?

만약 된다고 말씀하신다면, 전 더 이상 ‘지저분하다’라는 표현에 연연해 하지 않고 이제 ‘문체가 (너무) 아름답다면 왜 소설이 아닌가?’ 라는 한 문장에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우선 로쟈님이 사용하신 a이면 b가 아니다 라는 명제에 내포된 의미가 궁금합니다. “어떻게 문체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담! 이래서는 도대체 ‘소설’이라고만 규정하기에는 너무 아까운데 말이야” 이라는 뜻의 찬사는 아니겠지요?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보게 된다’는 로쟈님의 지적을 떠올린다면 김훈의 아름다운 손가락(문체) 때문에 정작 보아야 할 아름다운 주제(달)에는 눈길을 줄 수 없다 로 풀이할 수 있을 터인데 여기서 세 번째 의문이 생깁니다. 3)그럼, 아름다운 손가락과 아름다운 달의 조합은 현실적으로(소설의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건가요? 아무리 손가락이 아름답다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어쨌든-달이 아름답기만 하다면-우리는 그 달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손가락이 아름답다면 당장은 손가락에 눈이 먼저 가겠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영 달을 볼 수 없게 된다는 식의 인과관계는 저로서는 얼른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만약 아름다운 손가락을 가진 것이 문제가 된다면, 그것은 아마도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달이 전혀 아름답지 않은 경우일 것입니다. 그건 기만이 될 테지요. 진정 알아보아야 할 아름다운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독자의 시선을 아름다운 손가락을 이용하여 현혹시키는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혹시 4)로쟈님이 처음에 언급했던 두 번째 이유, 김훈의 허무주의적 세계관이 아름답지 않은 달과 유비 관계에 있는 것일까요? 그의 손가락이 가리킨 것이 결국 허무주의적 세계관에 지나지 않으므로 그것은 소설이 아니다 라는?

그런데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하면 과연 소설이 표방해야 마땅할 세계관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라는 의문에 다다릅니다. 이러한 의문은 로쟈님이 샤르트르의 앙가주망을 언급하셔서 더욱 깊어지는 기분이에요. 그는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참여를 이야기하며 engage와 embarque를 구분하였지요. 전자는 (사회에) “끌려드는 상태를 능동적, 자의적으로 수용하고 그것에 대처해 나가는 태도를 의미”하고 그에 반해 후자는 “수동적, 강제적으로 끌려드는 상태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말입니다. 허무주의적 세계관도 나름의 의지표현이 될 수 있지만 샤르트르의 분류대로라면 앙가주망이 될 수는 없겠지요. 제가 파악한 것으로는 샤르트르가 카뮈를 비판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구도는 1947년 프랑스 라는 특수한 환경 하에서 이루어진 논의인데 이것을 문학(로쟈님의 글에 따른다면, 산문 또는 소설) 전반에 대한 일반론으로 결론내릴 수 있을지요. 그러니까, 적극적으로 앙가주망하지 않는 소설은 소설이 아니다 라고 말입니다. 5)그럼 사회적 목소리를 내지는 않아도 미학적 성취를 이루내었거나 인간 내면의 성찰을 행한 소설(제가 여기서 들고 있는 이 두가지 예가 특별히 김훈의 작품을 지시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의 거취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 의아해집니다.

언젠가 로쟈님이 페이퍼의 덧글에서 ‘김훈은 스스로를 타자화할 수 없는 작가이기 때문에 아무리 소설을 써도 그건 에세이에 불과하다’라는 요지의 말을 하였던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하니 로쟈님이 알라딘 페이퍼에서 했던 말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전혀 상관없는 다른 사람이 했던 말을 제가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여 영 자신이 없습니다(그 덧글을 찾기 위해 로쟈님의 엄청난 수의 페이퍼를 뒤질까 잠시 망설였지만^^ 그랬다가는 정말로 제 눈알이 제 자리에 가만 있지 않을 같아 포기했습니다). 어쨋거나 개인적으로 저는, 작가가 스스로 타자화가 불가능하면 소설을 쓸 수 없다 라는 단언에 더 고개가 끄덕여지거든요.

이비 2007-05-13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길어서 잘렸습니다)타자화 되지 못한 혹은 스스로를 타자화하는 데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는 작가라면 그 사람이 쓴 소설은 자전적 수기의 알레고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고, 자전적 수기의 대부분이 그러하듯, 자신의 과거에 대한 미화 혹은 변명 혹은 자기 도취 등 지극히 개인사적 진단에 머무르고 말 테니까요.

몇 가지 물어본다고 해놓고 어처구니없이 긴 덧글이 되었습니다. 조용한 서재에 들어와서 괜히 분위기만 산만하게 만든 것은 아닌가 약간 걱정이 되는군요. 너무 산뜻한 봄날이네요. 남은 일요일 오후 즐겁게 보내시길 바랍니다.(아, 저는 왜 안부메일 식의 인사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로쟈 2007-05-14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우 드문 댓글을 달아주셨네요.^^ 진지하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길게 질문을 주셨지만 여건상 간략하게 답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로쟈님의 표현, 소설은 ‘문체가 지저분해야 한다’도 ‘문체가 너무 아름다워서는 안 된다’는 말의 강조형 정도로 받아 들이고 그 외에 다른 뜻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이해해도 될까요? -> 다른 뜻이라고 하면 '시장의 언어' 정도의 뜻이 포함된 것으로 보시면 좋겠습니다.

2) 문체가 너무 아름다우면 소설이 되지 않는다, 라는 제 주장은 시적인 것과 산문적인 것(소설적인 것) 사이의 구별에 근거한 것입니다. 김훈의 경우엔 에세이적인 것과의 구별일 텐데, 시적인 것을 무엇보다도 자기지시적인 것으로 저는 이해합니다('시적 기능'에 관한 야콥슨의 정의를 따릅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더 주목하도록 만든다는 것이죠(미모의 여성운동가 스타이넘의 사례도 같은 맥락에서 든 것입니다. 저는 이런 주장을 '호소'하는 것이므로 '공감'하지 않으신다면 할 수 없는 것이고요.

3)그럼, 아름다운 손가락과 아름다운 달의 조합은 현실적으로(소설의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건가요? ->2)와 연계해서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가능하지만(카뮈의 소설이나 김훈의 소설처럼), '소설'로서는 실용적이지 않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조세희의 소설에 대해서 황순원 선생이 '문체'는 쳐줄만하다고, 했는데 작가에 대한 상찬임에는 분명하지만 '소설가'에 대한 멘트로서도 그러한가는 좀 다른 문제라고 봐요.

4)로쟈님이 처음에 언급했던 두 번째 이유, 김훈의 허무주의적 세계관이 아름답지 않은 달과 유비 관계에 있는 것일까요? 그의 손가락이 가리킨 것이 결국 허무주의적 세계관에 지나지 않으므로 그것은 소설이 아니다 라는? -> '아름답지 않은 달'과 관련된 말씀은 제 취지와는 무관합니다. 김훈의 세계관과 소설양식의 관계는 좀더 자세하게 다뤄줘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그럼에도 아웃라인 정도는 제시했다고 생각하고요).

5)그럼 사회적 목소리를 내지는 않아도 미학적 성취를 이루내었거나 인간 내면의 성찰을 행한 소설(제가 여기서 들고 있는 이 두가지 예가 특별히 김훈의 작품을 지시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의 거취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 의아해집니다. -> 저는 그것이 긴장관계에 놓인다고 생각합니다. 러시아문학작품으론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 같은 소설이 문제적인데, 저는 기본적으로 그 작품이 '소설로 씌어진 서정시'라고 생각합니다. 해서, 뛰어난 작품이긴 하나 '소설'이라는 기준으로 봤을 땐 불만족스럽다는 것이죠(이건 제 의견만은 아닙니다). 김훈의 '소설들'도 저는 뛰어난 '에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소설'로는 아니라는 것이구요.

끝으로, 김훈은 스스로를 타자화할 수 없는 작가이기 때문에 아무리 소설을 써도 그건 에세이에 불과하다, 같은 진술은 김훈 자신의 것이기도 합니다. 그는 3인칭으로는 소설을 쓰지 못하겠다고 고백한 바 있으니까요. 김훈도 그렇겠지만, 본격적인 소설이란 건 '3인칭'의 세계입니다... 부족하다 싶은 대목들에 대해서는 다시 질문해주시면 저도 보충하겠습니다...

이비 2007-05-14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답변 잘 읽었습니다. 처음 로쟈님에게 질문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제 마음 속에 떠오른 문제는 사실 4번 하나뿐이었습니다. 그 앞에 드린 세 가지 질문은 4번 이야기를 꺼내기 위한 과정이었고요. 1번에서 3번까지의 질문에 대한 로쟈님의 답변 또한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고 말씀드리면 너무 외람될까요? 관점의 문제고 취향의 차이라고 결론내린다면 앞의 세 가지 문제는 어쩌면 '사소한 일'이 될지도 모릅니다(평론가 입장에서는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할 문제가 될 수도 있겠지만요). 사실, 소설이면 어떻고 에세이면 어떻겠습니까. 하지만 4번의 문제는 반드시 중요하게 짚고 넘어가야할 사항이라는 느낌입니다.

김훈의 작품을 두고 마치 기정 사실처럼 말해지고 있는 아름다운 문체라는 세간의 평에 저는 개인적으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저의 오독의 결과인지 아니면 제가 과문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문장이 조성하는 비장함은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것이 아니라 주제를 이미지로 형상화시키려고 부단하게 애쓴 흔적이 역력한, 절차탁마된 비장함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거든요. 조금 노골적으로 말해볼까요? 그것은 무협지의 정제된 환영을 불러일으킵니다(적어도 소설에서는 그렇습니다. 그의 에세이는 읽어보지 않아서 뭐라 말할 수는 없군요).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문체가 따로 뚝 떨어져서 이야기되어진다는 현재의 담론방향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문학이 그저 옷걸이에 걸려 있는 예쁜 옷은 아니니까요. 주제의식과 내용에 걸맞는 문체일 경우에만 아름다운 문체라는 어구가 칭찬이 되는 게 아닐까요. 문체가 아름답다 혹은 문체는 아름답다 라고만 말해지는 것은 문학이 임자 없는 예쁜 옷에 불과하다는 혹평에 다름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제가 김훈이 아름다운 문체 운운하는 말 때문에 제대로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어 애석하기 그지 없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매체에서 다루어지는 '김훈론'이 핵식을 비껴가고 있다는 지적을 하고 싶었습니다. 문체의 화려함이나 작품 바깥에서 조명되는 작가 개인의 행보에 지나치게 많은 무게가 실린다는 느낌이에요. 로쟈님의 말처럼, 김훈의 세계관과 소설양식의 관계가 앞으로 좀더 자세하게 다뤄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아웃라인만으로는 조금 부족해요^^)


로쟈 2007-05-14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의 에세이를 읽어보지 않으셨다니까 좀 의외이면서 왜 그런 의문을 가지셨는지 이해가 됩니다. 그의 소설의 문체는 곧바로 그의 에세이의 문체였습니다(에세이스트였을 때부터 그는 최고의 미문가였습니다). 소설이란 장르로 이동하면서 '절차탁마'한 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허무주의자가 미문가가 되는 것은 염세주의자가 미식가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생각됩니다. 특별히 독창적인 생각도 아니기에 자세히 다루지 않는 것인데요, 나중에 본격적인 김훈론이라도 쓰게 된다면 보완해볼 계획입니다...

주니다 2007-05-14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고재가 이번에 대박이 났겠네요. 어쩌다 학고재에서 책이 나오게 됐을까요? ^^

로쟈 2007-05-14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자와 무슨 인연이 있었겠지요.^^ 책도 잘 뽑았더군요. 몇 십만 부는 나갈 거 같습니다...

이비 2007-05-14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기대하겠습니다 ^^.

그 사이 몇 가지 의문이 또 생기기는 하였지만 로쟈님에게 질문하는 것은 그리 적절한 것 같지 않아서 제 서재에서 혼자 독백하는 걸로 대충 마무리하였습니다. ^^ 덕분에, 알라딘 인터페이스에도 많이 적응하게 된 의외의 수확이 있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