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의 주말판에는 '서양사상의 뿌리를 찾아서'가 연재되는데, 서양고전학 전공자 두 사람이 번갈아가면서 집필하고 있다. 한 면의 2/3를 차지하고 있으므로 나름 파격적인 지면구성이라고 할 만하다. 얼마전 니체의 <비극의 탄생>에 관한 연재를 옮겨온 바 있는데, "'삶에 대한 앎'은 삶의 강제다"라는 주장을 내건 이번 주 꼭지도 옮겨놓는다.

경향신문(07. 04. 28) 지식의 궁극적 쓸모
지식의 쓸모는 궁극적으로 어디에 있을까? 권력 획득의 도구에, 재산 증식에, 박학다식함의 자랑에 있을까? 지식이 자본인, 지식-자본(scientia-capitalismus)의 시대에 쓸모없는 물음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 쓸모없는 물음과 잠시 씨름하고자 한다. 우리는 도대체 왜 뭔가에 대해서 알려고 하는가? “인간은 본성상 알기를 원하기”(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980 a 21) 때문이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년)에 따르면, 지식은 “어떤 쓸모”가 있어서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모르는 것과 부딪혔을 때 자신이 모른다는 자각과 함께 그것을 알고자 하는 호기심이 생겨나고, 이는 생활의 유용성 때문이 아니라, 앎 자체의 욕구에서 기인한다고 한다. 이 ‘앎 자체’에 대한 욕구는, 그것이 욕구인 한, 욕구의 주체인 인간에 속하지만, 이 욕구는 좀 특이해서, 욕구 자신의 진정한 자유를 추구하는 ‘무엇’이라 아리스토텔레스는 전한다. 재미있는 생각이다. 대체로 지식의 습득 여부가 학력을 결정하고, 학력이 삶의 수준(?)을 결정하는 오늘날의 기준에서 보면 좀 이상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좀더 읽어 보자.
“가장 보편적인 것이 사람들에 있어서 가장 알기 어려운 것이다. 감각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것이기에. 지식 중에서 일차적인 것에 가장 가까운 지식이 가장 정확하다. 더 적은 수의 원리로 구성된 지식이 추가적인 원리를 필요로 하는 지식보다 더 정확한 지식이기에 그렇다. 예를 들면 산술학이 기하학보다 더 정확하듯이 말이다. 원인에 대한 이론적 지식은 또한 가르침을 더 준다. 각각의 것에 있어서 원인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더 많은 가르침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를 목표로 하는 앎과 지식은 지식을 대상으로 삼는 지식에 속한다. 그 자체로의 지식을 선택한 사람은 무엇보다도 ‘자체로’ 지식인 것을 선택할 것이다. 이 지식은 무엇보다도 대상에 대한 지식의 지식이다.” (‘형이상학’ 982b 21-982b10)

읽다보니 어느 사이에, “사물들의 일차적인 원인들과 원리들에 대한 이론적 지식”의 세계에 도달해 버렸다. 여기가 형이상학의 세계다(Ecce! hic est metaphysica). 지식이 지식을 대상으로 놓고 따지는 세계이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을 묻고 싶다. 형이상학의 세계에 온 소감을! 어렵고, 무슨 소린지 감을 못 잡겠고, 철학하는 사람들 정말 쓸모없는 짓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김에 한 가지만 확인하고 이론(理論)의 세계에서 현실(現實)의 세계, 삶의 세계로 돌아가자.
어떤 이가 무엇에 대한 정보를 습득했다 해서, 그 정보가 완전한 지식일까? 적어도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에 대해서 그것이 단편적 정보는 될지언정, 진정한 앎은 아니라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무엇에 대한 지식이 앎으로 성립하려면, 그 지식에 대한 앎의 체계(학문)가 성립해 있을 때만이 가능할 것이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앎이 앎으로 설 수 있도록, 앎에 대한 앎의 세계에 대한 기초를 마련한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다. “어떤 쓸모” 없는 앎, “앎 자체”의 욕구가 펼쳐낸 이론의 세계가 “학문(scientia)”의 세계다. 학문은 ‘쓸모없음’이 만들어낸 세계인 셈이다. 하지만 ‘진리(veritas)’가 상주하는 공간이 또한 학문의 세계다.
이렇게 앎의 세계에서 위엄과 권리를 자랑하던 진리를 삶의 세계로 끌어 내린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다. “철학(지혜의 사랑, 학문)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피타고라스다. 뿐만 아니라, 그는 사물에 실제 지식을 넓혀준 현인(賢人)이기도 한다. (중략) 그러나 학문이 처음 생겨났던 고대로부터 소크라테스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학문은 수(數)와 운동(運動)만을 대상으로 삼았다. 만물이 어디에서 기원하는지, 어디로 되돌아가는지 그리고 별자리의 크기와 별자리 사이의 거리와 ‘별들의’ 운행 행로 등 온통 천문(天文)에만 정성을 기울였다. 물론 소크라테스도 ‘자연학자’ 아낙사고라스의 제자인 아르케라오스의 강의를 들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첫 번째다. 처음으로 학문을 하늘의 세계에서 도시(국가)로 끌어 내렸고 또한 집안으로 끌고 들어왔던 사람이 바로 그다. 그는 삶(vita)에 대해서, 사람 사는 법(mores)에 대해서, 선과 악에 대해서 따지고 캐물었다. 다양한 관점에서 따지고 캐묻는 방식과 다루었던 주제들의 폭넓음과 그가 보여주었던 지성의 크기는, 이는 플라톤의 기억과 기록을 통해서 신적 경지의 반열에 올랐다.”(‘투스쿨라눔의 대화’ 제5권 10~11장).
키케로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삶의 문제를 걸어서 앎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접근한 첫 번째 사람인 셈이다. 앎의 세계에 비판적으로 접근한다는 점에서 소크라테스는 이전의 학문 세계와는 다른 종류의 앎의 세계를 열고 있다. 삶의 입장에서 앎의 문제를 다루고 있고, 기존 앎 중심의 지식 세계가 삶의 통제를 받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를 통해서 앎의 세계와 삶의 세계 사이에는 서로 교통할 수 있는 통로가 생겨나는데, 이 통로가 “철학”이라는 길(via)이다.
키케로가 말하듯이,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피타고라스의 철학(앎)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삶과 앎을 연결해준다는 점에서, 앎을 일차 대상으로 추구하는 분과 학문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렇다. 삶의 요구를 앎의 세계에 요구하고 전달한다는 점에 삶의 지킴이로서, 앎의 세계의 파수꾼으로서 역할을 담당하는 학문인, 철학이 세상에 등장하는 순간인 셈이다. 앎 일반을 지칭하는 의미로서의 철학이 아닌, 비판적 기능의 수행자로서의 철학이 말이다.
비판적 의미에서 “철학”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했던 사람이 소크라테스다. 그는 이 말 속에 담긴 의미를 삶에 실천한 철인(哲人)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안다는 것과 철학한다는 것이 근본적으로 다름을 일깨워 준 이가 소크라테스다.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앎과 삶의 관계에 대해서 좀더 따져보면 어떨는지? 곧 삶과 앎은 어떤 관계에 있어야 하는지를 말이다. 소크라테스의 말대로 앎은 삶의 통제를 받아야 하는가? 아니면 삶이 앎의 통제를 받아야 하는가?

아마도 가능하다면 앎이 삶을 통제하는 것이 가장 좋을 듯싶다. 앎은 예측 가능하고, 항상성(constantia)을 보장하기에. 하지만 앎이 삶의 영역을 얼마나 포괄해 낼 수 있을까? 그리고 안다는 것의 경계는 어딜까?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은 것은 아닐까? 결국 앎의 구경(究竟)은 결국 미지(未知)의 바다가 아닐까? 그런데 삶은 이 미지의 바다에 던져진 것이라면, 앎은 삶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결국 삶은 앎의 통제를 받고 싶어도 받을 수 없는 인간조건(conditio humana)의 근본적인 제약에 부딪히고 만다. 그러니까 앎이 삶의 전 영역을 모두 포섭해 낼 수 없다는 말이다.
예컨대 아름다움에 대해서, 과연 보편의 앎이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을까? 정확한 계산이 가능하지 않은 그리고 일률적인 척도와 기준을 허용해선 안 되는 영역이기에 그렇다. 곧 앎의 보편 세계가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 없고 마구잡이로 개입해선 안 되는 공간이 삶의 공간엔 있고, 실은 그것이 ‘사람살이’이기 때문이다. 어려운 문제다. 그럼에도 삶은 앎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처지임은 분명하다. 아는 것이 힘(Knowledge is power)인 시대를 넘어, 모르면 생존이 불가능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기에 그렇다. 어찌 되었든 배워야 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독자 여러분의 판단을 믿는다.
그러면 앎은 삶의 통제를 받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따져보자. 앎이 앎의 세계 안에서만 머무르고, 삶의 세계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문제에 대해선 이미 소크라테스가 비판했다. 그는 앎의 세계만을 중시하는 학문(Wissenschaft)의 세계를 비판적으로 접근해, 삶의 영역에서의 앎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했다. 곧 철학(Philosophie)을 정초했다. ‘삶 안에서의 앎’의 문제에 대한 길잡이가 철학이라는 점에 대해선 키케로는 다음과 같이 동조한다. “철학에 의해서 삶 전체는 교정 받고 지도되어야 한다. (중략) 삶의 지도자인 철학이여, 덕의 탐구자요 악덕의 방어자여, 철학 없이 우리 자신을, 우리의 삶을 도대체 어떻게 유지할 수 있었고 (미략)” (‘투스쿨라눔의 대화’ 제5권 5장).

삶의 입장에서 탐구 결과에 대한 아무런 반성을 하지 않은 채, 지식만을 생산하는 앎의 지식생산 공장으로서의 학문이 아닌, 삶의 길잡이로서 철학을 찬양한다는 점에서, 키케로는 소크라테스 철학의 계승자로 보인다. 곧 앎은 삶의 조정과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앎이 없는 삶’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삶이 없는 앎’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나 매일 저녁 뉴스를 통해 접하는 현대적 비극의 배경에는 아마도 ‘삶 없는 앎’이 결정적인 작용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누구나 느끼고 있을 것이다. ‘삶에 대한 앎’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을 절실하게 여기지 않는 풍토가 한 원인일 것이다. 따라서 ‘삶에 대한 앎’을 배우는 일, 곧 인문 교양은 삶의 장식이 아니라 삶의 강제이다. 그것이 장식이 아니라 강제인 것은 삶의 어느 중요한 순간에 삶을 결정짓는 지혜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행운이 지배하는 삶의 세계에서 말이다.
특히 삶의 지배자가 행운이 아니라 지혜임을 배우는 일은, 어느 순간 삶의 강제가 아니라 삶의 지혜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삶에 대한 앎’에 대해선 최소한의 “삶의 강제”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듣기 싫고 거북해도 말이다. 물론 그러다가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들어야만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더불어 살아야 하는 한, 삶의 강제는 필요하다.(안재원|서울대 협동과정 서양고전학과 강사)
07. 04.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