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에 있는 시립도서관에 갔다가 열람실에만 죽치고 있기에는 허전한 듯하여 대출카드를 다시 만들고 몇 권의 책을 대출했다(3권을 2주간 대여해준다). 그 중 하나가 전집판 니체의 <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책세상, 2005)이다. 번역본을 구입하지 않은 건 이미 청하출판사에서 나온 국역본과 영역본을 소장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예전에 읽었던 책이라도 '새 번역'으로 또 어떨까 싶어서 대출한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이 새 번역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평이 없지 않았다. 그리고 그에 대해서는 역자가 반론을 제기한 바도 있었다. <비극의 탄생>을 다시 읽어보기 전에 그러한 논란부터 먼저 챙겨둔다. 교수신문에 게재된 박찬국 교수의 번역비평은 <최고의 고전 번역을 찾아서>(생각의나무, 2006)에 재수록돼 있다.

교수신문(06. 01. 02) 고전번역비평-최고번역본을 찾아서(23)니체의 ‘비극의 탄생’

‘비극의 탄생’은 니체의 나이 불과 28세에 쓰인 처녀작으로 청년 니체의 열정과 고뇌를 강렬히 느낄 수 있는 책이다. 니체는 이에 대해 스스로 ‘청년의 용기와 우수(憂愁)가 가득한 책’이라고 평했다. 이 책에서 니체는 청년다운 대담함과 재기발랄함으로 그리스 비극의 기원과 본질에 대해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는 한편, 자신을 사로잡고 있던 염세주의로부터의 탈출구를 그리스의 비극정신에서 찾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비극의 탄생’은 당시 그리스 비극의 기원과 본질에 대한 고전문헌학적 연구를 넘어서 삶과 세계의 본질과 고통 그리고 그것의 극복방안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탐구이기도 하다.

이 책에 대해 니체는 나중에 일정 거리를 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가 그리스 비극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 여기서 제시하고 있는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이라는 개념은 니체 자신의 사상 전개 뿐 아니라 철학과 미학을 비롯한 인문학과 예술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 니체의 저작들 중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못지않게 고전으로서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사실을 입증하듯 국내에서 ‘비극의 탄생’ 번역본만 8종이나 나왔다. 이위범 역(양문사 刊, 1960), 김영철 역(휘문 刊, 1969), 이일철 역(정음사 刊, 1976 외), 김병옥 역(대양서적 刊, 1978 외), 박준택 역(박영사 刊, 1976), 곽복록 역(동서문화사 刊, 1978 외), 김대경 역(청하 刊, 1982), 성동호 역(홍신문화사 刊, 1989), 이진우 역(책세상 刊, 2005)이 그것이다.

이 글에서 번역본 전부를 살펴볼 순 없다. 번역자들 중 철학전공자로서 니체사상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박준택과 이진우를 제외하면 나머지 역자들은 주로 독문학(곽복록, 김대경)이나 심지어 영문학(이일철)을 전공했기에 일단 번역자로서 요구되는 전문성이 결여됐다고 할 수 있다. 사실상 이들 번역의 많은 곳에서 어렵잖게 오역과 부자연스러움을 발견하게 된다. 이 중 김대경 역은 1982년 이래 1997년까지만 해도 16쇄가 나왔을 정도로 가장 많이 읽히는 번역본이라 생각되기에 여기에선 박준택 역, 이진우 역, 김대경 역만을 살펴보겠다.

고전번역의 완전성을 평가하는 기준은 무엇보다 원전에의 충실성과 가독성이라고 여겨진다. 이 두 기준에 입각해 우선 박준택 역과 이진우 역을 비교하겠지만, 지면관계상 본문의 첫째 문장 번역만 검토할 것이다. 본문의 첫 문장은 보통 번역자들이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부분이기에 이 문장에 비춰 우리는 번역의 전체적인 수준과 성격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원전에서 본문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Wir werden viel f?r die ?sthetische Wissenschaft gewonnen haben, wenn wir nicht nur zur logischen Einsicht, sondern zur unmittelbaren Sicherheit der Anschauung gekommen sind, daß die Fortentwicklung der Kunst an die Duplizit?t des Appolinischen und des Dionysischen gebunden ist: in ?hnlicher Weise, wie die Generation von der Zweiheit der Geschlechter, bei fortw?hrender Kampfe und nur periodisch eintretender Vers?hnung, abh?ngt.”

이 문장을 이진우는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다. “세대(世代)가 지속적으로 투쟁하면서, 단지 주기적으로 화합하는 남성과 여성의 이중성에 의존하는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예술의 발전이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이중성과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한 논리적 통찰뿐만 아니라 직관의 직접적 확실성에 이른 상태라면, 우리는 미학을 위한 큰 소득을 얻게 될 것이다.”(이진우, 29쪽)

이 번역은 아무리 읽어도 그 의미가 분명히 파악되지 않는다. 그러면 이제 동일한 문장에 대한 박준택 역을 살펴보자. “만일 우리가 다음에 말하는 것을 머리만으로써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구체적으로 확신할 수 있게 된다면 미학(美學)에 크게 기여하는 바가 많으리라고 믿는다. 즉, 예술의 발전이라는 것은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이중성에 결부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생식(生殖)이라는 것이 부단한 싸움 속에서도 단지 주기적으로 화해하는 남녀 양성(男女兩性)에 의존되어 있는 것과 흡사하다.”(박준택, 9쪽)

박준택 역은 일본 암파문고판의 번역을 그대로 옮긴 것이지만, 이진우 역에 비해 정확할 뿐 아니라 읽기에도 훨씬 자연스럽다. 이진우 역은 ‘세대가 지속적으로 투쟁하면서’ 다음에 쉼표를 찍음으로써 ‘지속적으로 투쟁하는’ 주체가 남성과 여성이 아닌 세대인 것으로 잘못 읽도록 오도하고 있다. 아울러 전체적인 문맥상 ‘세대’라는 번역어보다는 박준택이 택한 ‘생식’이라는 번역어가 더 적합하다고 여겨진다. 이진우 역에서 ‘논리적 통찰뿐만 아니라 직관의 확실성에 이른 상태라면’ 부분에서도 주어가 무엇인지 분명치 않다. 이 경우도 사람들은 ‘세대’가 주어인 것처럼 오해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논리적 통찰뿐만 아니라 직관의 직접적 확실성에 이른 상태라면’은 지나친 직역으로 매우 부자연스런 번역이다.

니체 텍스트 본문의 첫 문장에 대한 박준택 역은 큰 문제는 없지만 원문을 굳이 의역하지 않아도 되는 부분에서 의역을 했다. 가령 ‘머리만으로써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구체적으로 확신할 수 있게 된다면’은 원문에 보다 충실하게 ‘논리적으로 통찰할 뿐 아니라 직접적으로 확실하게 직관한다면’으로 해도 충분히 자연스럽다. ‘머리만으로써’라는 표현도 보통 쓰이지 않는 어색한 표현이다. 이 문장에 대한 번역 외에도 박준택 역에서는 전체적으로 부자연스러운 표현들이 눈에 띄는데, 이는 주로 암파문고판에 대한 중역에 가깝다는 데서 비롯된다고 여겨진다.

아울러 박준택은 일일이 지적할 순 없지만 여러 곳에서 심각한 오역을 하고 있다. 하나의 예를 들자면, 200쪽에서 박준택은 “…비극은 비극적 신화를 통해서 비극적 주인공이라는 인물의 모습을 빌어서, 디오니소스적 세계에의 탐욕적인 충동으로부터 우리를 구제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옮겼는데, 여기서 ‘디오니소스적 세계에의 탐욕적인 충동’ 부분은 오역이며 ‘개체적인 삶에 대한 탐욕스런 충동’으로 번역해야 한다. 심지어 박준택은 암파문고판에 크게 의존하면서도 정작 암파문고판에서는 오역을 하지 않은 곳들에서도 오역을 범하고 있다.

첫째 문장의 김대경의 다음과 같은 번역은 가장 원전에 충실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읽힌다. “예술의 발전은 <아폴로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이중성과 관련이 있다. 이는 마치 생식이라는 것이 부단한 싸움 속에서도 단지 주기적으로 화합하는 남녀 양성에 의존되어 있는 것과 같다. 우리가 이 점을 단지 논리적 통찰로서 뿐만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확실한 직관에 의해 알게 된다면, 이는 미학을 위하여 큰 소득이 될 것이다.”(37쪽)

전체적으로 볼 때도 세 번역본 중 그나마 김대경 역이 원전에 대한 충실성과 가독성면에서 가장 낫다고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경 역은 여러 곳에서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오역을 범하고 있다. 지면 관계상 그 예를 둘만 들겠다. 김대경 역 48쪽, 49쪽 등에서 보이는 ‘근원적인 한사람’이란 표현의 원문은 ‘der Ureine’로서 원래는 디오니소스적인 세계의지를 가리킨다. 따라서 김대경은 ‘근원적인 한사람’이 아니라 ‘근원적 일자’라고 번역했어야만 한다. 또한 120쪽의 ‘그 자체로서 부패하고 타락한 기독교적인 인간들의 사고방식’이라는 번역은 굳이 원문과 대조하지 않아도 오역이라는 게 분명하다. 이 부분은 ‘인간을 그 자체로 부패하고 타락한 것으로 보는 기독교적인 사고방식’이라고 번역해야 한다.  

이 외에도 김대경 역에선 ‘탐욕적 충동’(130쪽)이나 ‘설득적으로 밀어닥치는’(130쪽) 등과 같이 일본역본을 글자 그대로 중역한 투의 문장들이 여러 곳에서 눈에 띈다. 그리고 138쪽이 대표적인 경우지만 원문의 몇 줄을 번역하지 않고 있는 곳들이 있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비극의 탄생’에 대해서는 그동안 8종의 역본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인 번역수준은 상당히 실망스럽다.(박찬국/ 서울대·현상학)

교수신문(06. 02. 01) 이진우 교수 번역, "의미파악 어려워"

‘출판저널’에 이번 2월부터 새롭게 연재되는 강대진 건국대 강사(고전그리스문학)의 번역비판 코너 ‘번역의 허와 실’에서 이진우 계명대 교수의 번역을 ‘문제번역’으로 삼고 나서 전공자들의 오역문제 심각성을 다시 한번 일깨우고 있다. ‘잔혹한 책읽기’(작은이야기 刊, 2004) 등을 통해 국내 고전번역에서 오역의 심각성을 제기해온 강 씨는 연재의 첫 회로 이진우 교수의 ‘니체저집 3: 유고(1870~1873년), 디오니소스적 세계관, 비극적 사유의 탄생 외’(책세상 刊, 2001)을 검토했다.

강 씨가 이 교수 번역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삼는 것은 ‘독일어 직역’이다. 즉, “번역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무슨 말인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것. 가령, ‘소크라테스와 비극’이라는 니체 강연원고에 나오는 문장을 이진우 역은 “사람들은 아리스토파네스가 표현한 것처럼, 위대한 마지막 사자(死者)에 대한 동경을 느꼈습니다.”(33쪽)라고 옮겼다. 그런데 이 문장은 전체적으로 보자면, 희랍비극이 에우리피데스와 소크라테스 때문에 소멸했다고 주장하는 내용 속에 들어있는 것으로서 “시인이라기보다는 기본적으로 비평가인 에우리피데스가 소크라테스의 논리 중심주의를 따라 비극을 재조직한 결과, 원래의 비극은 죽어버리고 신희극만이 남겨졌다”라는 논지라고 강 씨는 덧붙인다. 따라서 “위대한 마지막 사자”는 “위대한 사람들 가운데 최근에 죽은 이” 정도로 번역하는 것이 낫다는 게 강 씨의 지적이다.

“에우리피데스가 아리스토파네스의 <개구리들>에서 물 치료법으로 비극예술을 쇠진하게 만들고 또 비극예술의 중압감을 약화시켰다는 공로를 자신에게 돌렸는데”(35쪽)라는 번역도 이해하기 어렵다. 강 씨는 이에 대해 “물 치료법으로 쇠진하게”는 “설사제를 먹여 체중을 줄인 것”이라는 뜻이라고 풀어놓는다. 이 외에도 “우리는 왜 그가 생시에 알량하게도 비극적 승리의 영광만을 얻었는지 이해하게 됩니다”(38쪽)도 고전문학 전공자가 보기에는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이해가 가지 않는 구절들이 많다는 것. 

사실 번역자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외국에 실력에 준하는 모국어 실력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자들은 흔히 번역평가의 기준으로 ‘자연스러운 한국어 구사’를 문제 삼는다. 물론 직역의 원칙을 따를 경우 ‘번역어의 자연스러움’을 희생해야 할 경우들이 생기지만, 그런 경우라도 모국어로서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라면 번역의 의의는 퇴색할 수박에 없다.

이 교수의 번역이 이러한 문제점을 갖게 된 것은 사실 국내 번역자들의 공부하는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다. 강 씨는 “왜 천병희 교수의 좋은 번역들이 나와 있는데 참고하지 않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하는데, 고전전공자의 번역을 현대독일철학 전공자가 참고하지 않는 것은 학자로서 그리 성실한 태도라 볼 수 없으며, 국내 학자의 번역성과를 무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진우 역 중 “에우리피데스는 아리스토파네스의 개구리의 입을 빌려 아이스킬로스를 비난합니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강 씨는 “개구리의 입을 빌려”라는 부분은 틀린 것으로 천 교수 역을 참조했더라면 오류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나타낸다.

그 외에도 이 교수의 번역에는 중요한 구절이 누락되거나 중요 단어들이 잘못 표기되고 있음이 지적되고 있다. 가령 복수의 여신인 에리뉘에스를 “에리스”(75쪽), “에레니메스”(110쪽)로, 아이스퀼로스도 “아르킬루스”(29쪽)로 잘못 옮겼다는 지적이다. “에폭푸테스”(137쪽)의 경우도 ‘추종자들’로 고치는 것이 낫다는 게 강 씨의 제안이다. 

사실 이진우 교수는 그동안 끊임없이 번역서를 내놓아 부지런함을 보여왔다. 하지만 최근 교수신문 ‘고전번역비평-최고 번역본을 찾아서 23: 니체의 ‘비극의 탄생’’편(제384호, 2005년 12월 26일자)에서 박찬국 서울대 교수(철학)에 의해 번역상의 오역과 부자연스러움 등이 제기되면서 문제가 된 바 있다. 그의 ‘니체전집 2: 비극의 탄생, 반시대적 고찰’(책세상 刊, 2005)는 총 18종이나 되는 ‘비극의 탄생’ 번역 중 가장 최근 것임에도 불구하고 같은 전공자로부터 후한 점수를 받지 못했던 것이다. 오히려 20여년도 더 앞서 번역된 김대경의 ‘비극의 탄생’(청하 刊, 1982) 이 “원문에 가장 충실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읽힌다”라는 평가를 두고 학계에서는 “뜻밖이다”라는 반응들을 보였던 것. 박찬국 교수 역시 이진우 역에 대해 “아무리 읽어도 그 의미가 분명히 파악되지 않는다”라고 평가했는데, 그만큼 한국어 구사에 문제는 이진우 번역의 가장 큰 약점으로 꼽히고 있다.

이진우 교수는 올해에도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 뿐만 아니라 하버마스의 저서 한권도 번역해 내놓을 예정이다. 하지만 몇몇 학자들은 “이 교수의 번역에서 이러저러한 문제가 지적되고 있는 만큼 다른 전공자들의 번역과 더불어 이 교수의 번역도 전면적으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라는 의견을 조심스럽게 내놓고 있다(*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같은 게 아닐까?).(이은혜 기자)

교수신문(06. 02. 07) 어느 번역비평 기사에 대한 반론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그 대상이 무엇이든 간에 이처럼 간단명료하고 잔혹한 평가는 없을 것이다. 글이든 대화이든 무엇을 말하는지가 분명하지 않다면, 그 의미를 파악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이러한 의미파악의 어려움은 그 주제가 너무 어렵기 때문일 수도 있고, 글을 읽고 듣는 사람이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무튼, 부인할 수 없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비평은 그것이 아무리 생산적이고 호의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글을 쓰는 사람에겐 정말 감내하기 힘든 혹평임에 틀림없다.

이 말은 종종 비평자의 권력의지를 표현하기도 한다. 우리는 진리를 논하는 학계에서도 이 말을 얼마나 자주 듣고 말하는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충돌하는 곳에서 어김없이 들리고, 자신의 영역을 조금이라도 벗어난 이론과 담론을 들을 때면 서슴없이 사용하는 말, 그것이 바로 이 간단한 한마디이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이 말에는 종종, 설령 제압의 심리학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이해의 거부’가 묻어 나온다.

최근 내 자신이 이런 비평의 대상이 되었다. 그 시발점은 <니체전집 2: 비극의 탄생>에 대한 박찬국 서울대 교수의 비평이었다. 그는 첫 문장의 번역이 번역문 전체의 수준과 성격을 가늠케 할 수 있다는 전제 아래 <비극의 탄생>의 첫 문장을 박준택 역 그리고 김대경 역과 비교하면서 이렇게 간단히 평가한다. “이 번역은 아무리 읽어도 그 의미가 분명히 파악되지 않는다.” 첫 문장에 대한 나의 번역문이 다른 두 번역보다 명료하게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은 부인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번역과정에서 다른 번역본을 참조하였던 내가 왜 이렇게 번역하였을까. 번역할 때마다 그렇기는 하지만, 특히 이 부분에서 많은 고민을 하였던 것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서 의역을 해야 할까. 아니면 원전에 충실하게 직역을 해야 할까. 이 문장은 8행이나 되는 긴 가설법 문장이다. “예술의 발전이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이중성과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한 논리적 통찰에... 이른 상태라면, 우리는 미학을 위한 큰 소득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평자는 “예술의 발전은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이중성과 관련이 있다.”는 직설법의 번역문장을 선호한다. 나는 니체처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경우에는 원문에 충실한 것이 좋다고 생각하였다. 물론 원전에 충실하고 동시에 자연스럽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비판은 이중적이다. 생산적이고 동시에 파괴적이다. 첫 문장에 대한 박찬국 교수의 비평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도 부당하게 느끼는 까닭은 무엇일까? 우선, 부분을 전체로 일반화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가 정말 나의 번역 전체가 이해하기 힘들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면,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해야 마땅할 것이다. 우리는 흔히 번역문을 원전에 대한 충실설과 가독성의 두 가지 척도로 평가한다. 원전에 충실하다보면 가독성이 떨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김대경 역이 몇몇 오역에도 불구하고 “원전에 대한 충실성과 가독성 면에서 가장 낫다”고 판단함으로써 나의 번역이 마치 원전에도 충실하지 않은 것처럼 교묘하게 말하고 있다. 오역과 원전에 충실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구체적으로 지적해야 마땅할 것이다.

전체의 맥락으로부터 분리된 부분을 마치 전체인 것처럼 만든다면, 그것은 왜곡의 폭력이다. 교수신문은 박찬국 서울대 교수의 비평문에 “이진우 譯 의미파악 어려워”라는 표제어를 붙였다. 이렇게 뒤틀린 왜곡은 출판저널 2월호에 게재된 번역비평에 관한 기사에서 다시 한번 이루어졌다. 강대진의 “니체전집 완간의 기쁨과 몇 가지 아쉬움”이라는 글은 번역비평이 어떠해야하는가를 보여주는 모범적인 글쓰기이다. 그는 그리스 비극에 관한 니체의 글을 올바로 번역하기 위해서는 서양의 고전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고 전제한다. 맞는 말이다. 그는 몇몇 군데 잘못 표기된 인명을 예리하게 집어낼 뿐만 아니라 그가 “더 좋은 번역, 더 나은 책 꾸밈새를 위해” 제안하고 있는 지적들은 실제로 주석으로도 손색이 없다.

그는 니체가 다루고 인용하는 그리스 고전에 대한 이해가 있다면 그의 글과 사상이 더욱 잘 이해될 수 있다고 전제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번역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가 제기된다. 당시에 고전 문헌학자들을 경악시켰던 그의 글들을 문헌학의 기준에 맞춰 번역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예를 들어 그는 “durch Wasserkur abgemergelt”를 “물 치료법으로 쇠진하게 만들고” 대신에 “설사제를 먹여 체중을 줄이고”로 풀이한다.

이와 관련된 아리스토파네스 <개구리>의 구절은 이렇다. “‘흰 무우’로 그것의 체중부터 줄이고 나서, 책에서 짜낸 잡담의 액즙을 주었지요.” 이 희극의 전체맥락을 알지 못한다면, 이 문장 자체의 뜻을 파악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흰 무우”가 당시 설사제로 사용되었다고 해서 뜻이 명확한 “Wasserkur”를 “흰 무우” 또는 “설사제”로 번역해야 할까. 당시의 문헌학자들이 평한 것처럼 몽상적이고, 과장되고,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변화가 심한 그의 문체를 있는 그대로 옮기는 것이 옳지 않을까? 아무튼, 번역을 “조금이라도 더 낫게 손질할” 수 있도록 지적해준 데 대해 감사할 뿐이다.

그런데 교수신문은 이 비평에 대한 기사에서 비평자의 선의를 악의로 왜곡시킨다. 교수신문은 여기서 비평의 전체적 맥락을 무시한 채 나의 번역을 “문제번역”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매우 선정적인 표제어을 사용한다. “이진우 교수 번역,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이처럼 분명한 말로 교수신문이 두 번씩이나 한 인격을 짓밟는 이유가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비평에는 호의적 비평도 있고 악의적 비평도 있다. 이들의 비평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직역의 문제점을 조금 더 치열하게 고민하라는 주문일 것이다.

번역을 하면 할수록 번역이 어려워진다. 원문이 어려워도 번역은 쉬워야 되는가. 원문이 만연체라도 번역은 간결체여야 하는가. 난해한 하이데거를 이해하기 쉬운 야스퍼스로 만들고, 하버마스를 호르크하이머로 만들어야 하는가. 니체가 말한 것처럼 번역에는 뜻도 중요하지만 리듬, 호흡, 문체도 중요한 것인가. 간단히 말해, 번역은 반역인가? 교수신문의 기사가 아무리 부당하고 잔혹할지라도 이런 문제점을 일깨워준 데 대해 감사할 뿐이다.(이진우/ 계명대 철학과)

07. 04. 09.

Рождение трагедии/Die Geburt der Tragodie

P.S. 러시아에서는 최근 들어서 13권짜리 니체 전집이 새로 출간되는 등 '니체붐'이 일고 있다(실제 상황은 모르겠지만 옆에서 보기에 그렇다). 내가 갖고 있는 러시아본 니체는 과거에 나온 2권짜리 전집과 함께 <비극의 탄생>(2001) 대역본 등인데, 이 대역본은 (당연한 말이지만) 독어-러시아어 텍스트가 나란히 배열돼 있다. 상세한 주석을 포함하고 있어서 분량이 736쪽이나 된다. 한국어로도 이만한 수준의 책을 읽어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물론 그 전에 전공자들도 찬탄할 만한 멋진 번역서가 먼저 출간되면 더 좋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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