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신문에서 두 가지 기사를 옮겨놓는다. 역사가 어떻게 '구성'되는가를 공통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듯해서 제목은 '우리가 상상하는 한국사'라고 붙였다.  

경향신문(07. 03. 27) 박노자교수 “논개는 조작된 영웅…정치적 미화”

최근 경남 진주 의기사(義妓祠)에 있는 논개(論介) 영정의 복사본을 강제로 떼어낸 진주시민단체 회원 4명이 대법원으로부터 유죄를 선고 받았다. 이들은 친일 화가 이당 김은호가 영정을 그렸다는 이유로 영정을 떼어냈다. 논개를 국난 극복의 대표적인 여성 영웅, 민족의 영웅으로 인식하는 일반인의 시선을 감지할 수 있는 대목이다.



과연 논개는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에 왜장을 껴안고 죽은 것일까. 박노자 노르웨이 국립오슬로대 교수는 아니라고 단언한다. 그는 논개가 왜장 게야무라 로구스케를 껴안고 투신한 것도, 전남 장수가 고향으로 본관은 신안 주씨라는 인적 사항도 모두 후대에 조작된 것들이라고 주장한다. 박교수는 오는 31일 연세대 위당관에서 열릴 열상고전연구회 춘계학술대회에서 ‘임진왜란과 의기(義妓)전승-전쟁, 도덕, 여성’이란 논문을 통해 논개의 죽음에 수많은 정치적 미화가 곁들여졌다고 발표한다.



논개와 관련된 최고(最古)의 자료인 유몽인의 ‘어우야담(1621)’에는 논개가 ‘욕을 보지 않으려고 죽은’ 것으로 쓰여있다. 유몽인은 임진왜란때 광해군을 따라 진주에 갔을 당시 들은 목격담을 기록하고, 자신의 해석을 덧붙여 논개의 죽음을 ‘유교 군주의 교화를 입어 차마 나라를 버리고 적을 따르지 못하는’ 관기의 가상한 충성심으로 파악했다.

논개의 죽음에 대한 본격적인 각색은 18세기 초 진주지역 유생과 지방관료들에 의해 진행된다. 이들은 조정에 논개에 대한 봉작과 사당 건립을 요청하면서 그저 ‘왜군’으로 묘사되던 ‘강간범’을 ‘왜장’으로 승격시키고, 강간범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 했던 논개를 의도적으로 왜장을 유혹해 투신해 전공을 세운 여성 의사(義士)로 그려낸다. 18세기 중반 논개를 기리는 의기사가 세워진 후에는 출신, 신분이 불분명하던 논개에게 고향과 본관이 생긴다. 또 임진왜란 당시 전훈을 세우고 순국한 의병장 최경회(1532~93)의 천첩으로 신분도 승격됐다.

박교수는 논개의 신격화를 당시 진주가 차지하던 사회정치적인 지위와 연결지어 설명한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따르면 진주는 구례, 남원과 더불어 조선 최대의 옥토로 일컬어지던 곳. 이를 바탕으로 진주의 양반은 강력한 세력을 유지했고 조선 초기만해도 중앙으로의 진출 역시 활발했다. 진주가 고향인 남명 조식(1501~72)은 이곳에서 유가의 실천정신을 중시하며 남명학파를 이끌었다. 그러나 남명학을 이념적 지주로 삼던 광해군 정권이 인조반정(1623) 이후 몰락하고 이인좌의 난(1728)의 사상적 뿌리가 남명학에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진주는 역모의 사상적 고향으로 찍혀 차별을 받기 시작했다.

박교수는 이 때문에 진주의 유생과 사대부들이 진주를 충절의 고향으로 승격시키기 위해 논개의 신격화에 매달렸다고 설명한다. 이후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민족주의적 요소까지 덧씌워지면서 논개가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기에 이르렀다는 것. 박교수는 논개의 행동을 민족주의, 국가주의적 시각에서 바라보는 데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논개가 설령 국가와 임금 혹은 민족을 생각하지 않았다하더라도 자신을 지킨 행동이 폄훼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윤민용기자)

담비(07. 03. 26) 상상적인 국가이야기는 어떻게 시작되었나

현재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는 "신라가 당을 축출함으로써 삼국통일이 완수되며, 이를 통해 우리 민족은 하나가 되어 단일한 민족문화와 사회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고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통일신라론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가. 이런 묘사는 손진태의 '조선민족사개론'(1948)이나 '국사대요'(1949)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그 시원은 1892년에 출판된 하야시 다이스케(林泰輔, 1858~1922)의 '朝鮮史'에서 최초로 확인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윤선태 동국대 교수는 최근 나온 '신라문화' 제29집에 발표한 논문에서 "통일신라론이 왜 등장했고, 한국의 현행 국사체계 속에 어떤 과정을 거쳐 뿌리내리게 되었는가를 추적"했다.

논문에 따르면 갑오개혁 이후 역사를 소비하는 주체에 거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기존에는 유교 지식인의 經學을 보조하는 수단으로서 기능했던 역사가 갑오개혁 후에는 국민을 지속적으로 창출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모하였다. 그 일환으로 등장한 역사교과서가 바로 1902년 金澤榮의 '동사집략'(1902)과 玄采의 '동국사략'(1906), '중등교과 동국사략'(1908) 등이다. 이들은 직접 지은 것이 아니라 하야시의 '조선사'를 거의 그대로 역술한 것들로서, 기존 연구들은 이들을 식민사관의 수용으로만 평가하였을뿐, 근대역사학의 성립과정 속에서 세밀하게 검토하지 않았다.

하야시의 '조선사'에는 '신라의 통일'이라는 항목이 별도로 설정돼 있는데, 그 서술이 현재 통용되는 통일신라론의 선구적 면모를 갖추고 있다. 전통시대의 신라정통론과 하야시의 그것은 질적으로 달랐다. 가령 조선 전기에 찬술된 '동국통감'에는 신라기를 독립시켜 다루고 있지만, 통일의 시점이 고구려가 멸망한 문무왕 8년으로 설정돼 있다. 신라기 독립의 명분도 신라가 箕子의 유풍을 간직, 계승하였고, 오륜이 돈독하다는 등 유교적 가치를 기준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하야시는 당세력의 축출을 삼국통일의 시점으로 새롭게 설정했다. 바로 나당의 대립을 강조한 새로운 담론이었던 것이다. 이런 하야시의 입론은 청일전쟁 직전 일본의 대한반도 정책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고 윤 교수는 추적해 들어간다. 당시 분위기는 강화도사건을 계기로 체결된 1876년 '한일수호조규'의 "조선국은 自主之邦으로 일본국과 平等之權을 보유한다"는 부분에서 살펴볼 수 있다. 여기에서의 자주와 평등은 기본적으로 전근대 동아시아세계의 계서적 국제질서관념 속에서 청국에 대한 조선의 종속관계를 단절시켜, 조선을 전통적인 화이관 밖으로 끌어내려는 일본의 의도가 담겨있다고 윤 교수는 분석한다. 게다가 하야시가 '통일신라론'을 만들어낸 시기인 1885년부터 1893년은 일본이 조선을 둘러싼 청국과의 쟁탈전에서 패배한 시점이기도 하다.

한편, 조선의 경우를 보자. 광무개혁을 주도한 고종정권은 종래의 지역적 단위의 공동체를 넘어 국가단위의 통합이 필요했다. 이 때 하야시가 만들어놓은, 중국을 타자로 한 조선사 체계가 아주 요긴한 내러티브로 다가온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역사가들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를 활용했을까. 김택영은 '동사집략'에서 "깜깜한 밤중에 갑자기 이웃집에 불난 듯 역사의 내용이 밝하졌다"라며 하야시의 임나일본부설을 적극 칭송하며 수용하였다. 그에게 근대적 국사체계에 대한 인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김택영에게 과거의 임나일본부는 현재의 조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그저 하나의 사료에 불과했던 것이다.

반면, 현채의 '동국사략'은 하야시의 '조선사'를 역술하면서도 자신의 입장에서 비판적으로 변용했다. 하야시와는 달리 단군의 개국을 확실시 하였고, 위만과 四郡은 목록에서 빼버렸다. 임나는 목차엔 그냥 두었지만, 설명은 통째로 들어냈다. 이는 그가 독자적인 조선의 민족사를 고민하였음을 말해준다. 그의 '동국사략'은 1909년 일제에 의해 판금조치가 되는 등 수난을 겪었지만, 이후 역사서들의 기준이 되었다. 현채의 이런 주체적 사관은 그가 역관 출신의 일본통으로서 일본의 근대적 변화를 몸소 겪었기 때문이라는 게 윤 교수의 분석이다. 그리고 1903년 무렵의 시간대에 양계초의 '응빙실문집'이 들어오고, 사회진화론 및 근대역사학 방법론이 널리 보급되었던 때였다는 것도 고려해 볼만하다.

이렇게 하야시의 통일신라론은 조선의 역사 속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그의 통일신라론이 명실상부한 보편적 역사진리로 각인되는 과정에는 또 다른 작용이 있었다. 바로 1902년 이래 미술사학자 세키노 타다시 등이 경주지역 발굴이 그것이다. 그 유명한 석굴암이 이 시기 발굴된 것이다. 산기슭에 묻혀있던 하나의 토굴에 불과했던 석굴암은 타다시를 비롯해 야나기 무네요시 등에 의해 "동양의 종교와 예술의 귀결"이라는 평을 받았다. 나카무라 료헤이는 "석굴암이야말로 신라 예술의 정수를 모은 것이다. 아니, 조선만이 아니라 地上美의 전당이다"라고까지 말했다. 

석굴암과 불국사 등 신라의 예술은 일본을 넘어 세계적인 인정을 받았다. 독일의 미론가 안드레아 에카르트는 "경주의 석굴암이 동양문화의 가장 중요한 기념비임은 지나친 과장이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당연히 이런 언설들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들은 일본의 관변학자 세키노와 민예의 창시자 야나기가 건립해놓은 '신라'라는 박물관에 매혹된 관람객이자 학도로서 그 박물관 견학의 결과를 제출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당 세력을 몰아낸 이후 신라사가 황금문명을 이룬다고 기술한 황의돈의 '신편조선역사'(1923), 감상적이고 慕古主義적인 단재사학을 배격함과 동시에 식민사관도 아울러 비판한 안확이 신라의 외세 이용과 삼국통일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조선문명사'(1923), 신라의 정신과 문화를 바탕으로 이른바 '朝鮮心'을 이끌어내는 문일평의 '掌篇新羅史'(1935, '조광'), "광대한 영토와 인민을 상실하긴 했지만, 신라통일로 그나마 민족 모체의 결정을 보게 되었으며 빈번했던 종족 내부의 상투적 비극이 정지되었다"고 말한 손진태의 '조선민족사개론'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윤 교수는 "신라를 지나 고려 이후 미술의 쇠퇴, 조선문화의 쇠퇴 등은 현실적인 제국과 식민구조를 정당화하는 기조로 작용했다. 신라문화는 일본 고대문화의 아류로서 존재한 것이지, 별도의 독립된 학문영역은 아니었다"라고 지적한다.

아무튼 식민지시기를 통틀어 역사, 문학, 종교, 미술 등 통일신라론의 개진은 다방면에 걸쳐 이뤄졌다. 그것은 한국인의 지적, 상상적 능력이 전면적으로 동원된 작업이었고, 후대 한국의 정치실험과 문화 건설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윤 교수는 결론에서 "통일신라의 발명과 확립은 문화와 민족의 지위가 사라져버렸던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이 기획할 수 있었던 상상적인 국가이야기의 시작으로서, 간과할 수 없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라고 평한다.(리뷰팀)

07. 0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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