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이번에 새로 출간된 <율리시스>(생각의나무, 2007)을 배송받았다. 출간 소식은 예전에 페이퍼로 다룬 바 있는데 그게 계기가 되어 햇빛비둘기님이 선물로 보내주신 것. 수십 장의 화보를 포함하여 1,320여쪽에 이르는 이 방대한 번역서는 단순히 두툼한 책이 아니라 아주 '무거운' 책이어서 어제 집으로 들고 오자마자 저울에 무게를 달아보았을 정도였다. 디지털저울이 아니어서 정확하진 않지만 2킬로그램, 적어도 세 근 정도는 나가는 것으로 보인다(21그램쯤 나간다는 우리들 '영혼'의 무게를 고려하면 책에는 얼추 100여명의 영혼이 숨쉬고 있는 걸로 계산할 수도 있겠다).

 

 

 

 

이 번역본과 구색을 맞추기 위해서 책장(원래는 신발장)에서 옥스포드판 <율리시스>(1998) 원서를을 꺼내놓았다. 이 페이퍼백 원서 또한 70쪽의 서론(작품해설)까지 포함하면 1,05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다. 페이지당 행수는 원서가 37행이고, 국역본이 30행이다. 거기에 활자 크기 또한 국역본이 훨씬 크다. 그럼에도 분량에서 대차가 나지 않는 것은(무게에선 물론 대차가 난다!) 양장본 국역본의 판형이 원서의 두 배이기 때문이다(요즘 대세를 이루고 있는 듯한 21-2행짜리 허허실실 책들을 나는 혐오하는 편이다. 노안의 독자나 초등학생들을 위한 배려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우화적' 조판은 너무 낭비적이다. 깨알 같은 활자들이 촘촘하게 박힌 책들이 나는 그립다. 이건 자세의 문제이다. 어지간한 영어 원서들은 페이지당 대개 40행 가량이다).

아무려나 만든 품새에 있어서나, 그리고 역자가 40년간 이 작품 번역에 쏟아부은 노고에 있어서나 기념비적인 책이라 아니할 수 없다. 몇 페이지 읽은 소감과 함께 역자인 김종건 교수의 서문(옮긴이의 글)을 조금 음미해보려고 하는 것은 그러한 기념비성에 대한 나의 인사치레이다.

'언어적 주술의 아수라장에 대한 반 세기의 도전'이란 제목이 붙은 '옮긴이의 글'에서 역자가 먼저 고백하고 있는 것은 번역의 경과, 곧 번역사이다. "<율리시스>의 첫 한국어 번역본(정음사 간)은 1968년에 출간되었다. 이는 여러 해에 걸친 번역 작업의 첫 결실이었지만, 결코 완전한 것이 못되었다. 두번째 번역본(범우사 간)은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1988년판으로, 가블러 신판 원서에 기초하여 약 5천여 개의 원문 오류를 교정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이제 또다른 2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세번째로 신판본(3정판)을 출간한다."

하지만, 조이스의 작품이 갖는 '끊임없는 언어유희'를 우리말로 옮기는 것은 지난한 일이어서 "이번 번역 또한 완미(完美)와는 아스라이 먼 존재이며, 앞으로도 계속해야 할 '진행중 작업'임이 틀리없다."는 게 역자의 토로이다. 이어지는 내용은 이 번역상의 난점에 관한 것이다.  

"조이스는 '무엇을' 묘사하느냐에 앞서 '어떻게' 묘사하느냐를 중요시한 작가다. 그는 이러한 미학적 장치를 강조하고 몸소 실험하면서, 현대의 작가는 바다의 항해사처럼 '배의 침몰'과 같은 위험을 각오해야 한다고 했다.(...) 조이스의 다양한 상상력을 건드리려면 다양한 형식을, 그리하여 형식 뒤에 숨겨진 인간 심리와 새로운 조망, 비전과 현현을 탐구해내야 한다. 이는 이번 개역본의 기본정신이기도 하다."

 

 

 

 

 

 

 

 

 

 

 

 

 

동아일보(07. 03. 26) '율리시스’ 세번째 번역판 내놓은 김종건 교수

“사람들은 ‘율리시스’가 난해하고 비극적이라는 선입관을 갖지 실상은 아름다운 ‘사랑의 찬가’이자 배꼽 잡도록 재밌는 코미디라 할 수 있습니다.” 최근 제임스 조이스(1882∼1941)의 ‘율리시스’ 세 번째 번역판(생각의나무)을 내놓은 김종건(73) 전 고려대 교수를 만난 뒤 그 어렵다는 조이스의 작품이 꿀단지처럼 달콤하게 느껴졌다. 비록 그 자신은 서문에서 “지난 근 반세기를 조이스 연구와 그 번역, 특히 ‘율리시스’의 번역을 위해, 마음 밑바닥이 무거운 쇠사슬로 묶인 듯 허우적거리며 살아왔다”며 스스로를 끊임없이 같은 자리를 맴도는 ‘핀에 꽂힌 벌레’에 비유했지만.  

그와 ‘율리시스’의 만남은 196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대 대학원에서 국내 최초로 ‘율리시스’ 원어 강독을 시작한 조지 레이너 교수를 만나면서였다. “조이스는 ‘율리시스 속에 너무나 많은 수수께끼와 퀴즈를 감춰 뒀기에 앞으로 수세기 동안 대학교수들은 내가 뜻하는 바를 거론하기에 분주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죠. 당시 난 학자로서 평생을 바칠 작품을 찾고 있었기 때문에 정말 ‘딱’이었어요.”  

‘겁 없는 마음’으로 도전한 그는 1968년 국내 최초로 ‘율리시스’(정음사)를 번역했다. 그 공로로 이듬해 한국번역문학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제대로 번역했는가 하는 회의가 끊이지 않았다. 1984년 독일 뮌헨대 교수인 헤다 가블러가 조이스 친필 원고를 바탕으로 5000여 개의 오류를 바로잡아 가블러판 ‘율리시스’를 출간했다. 김 전 교수는 이를 토대로 해 1988년 제임스 조이스 전집(범우사)의 하나로 재판을 냈다.  

다시 근 20년이 흘러 4000여 개의 주석과 48쪽의 희귀 화보, 외설 시비 때문에 금서령이 내려졌던 이 책의 미국 내 출간을 허용한 존 M 울지 판사의 판결문 등까지 합쳐 1323쪽에 이르는 세 번째 번역판이 출간된 것이다. “1988년 전집에는 사실 한 권이 빠져 있었어요. 조이스가 17년에 걸쳐 집필한 ‘피네간의 경야(經夜)’였죠. 무려 65개국의 언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번역 불가’라는 낙인이 찍힌 작품이었는데 2002년 세계에서 네 번째로 번역에 성공했어요. 그때 조이스의 언어유희에 새롭게 눈을 뜬 부분이 있어서 ‘율리시스’의 번역에 다시 도전했습니다.”  

‘율리시스’는 고대 그리스 영웅 오디세우스가 트로이전쟁을 마친 뒤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기까지의 10년에 걸친 모험을 그린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의 내용을 토대로 현대인의 내면적 방황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율리시스란 오디세이의 라틴어 이름이다.  

“조이스는 엄청난 독서광이라 말년엔 밀턴처럼 눈이 멀 정도였습니다. 그런 그가 가장 좋아한 문학작품이 오디세이였어요. 그는 오디세우스를 3가지 면에서 가장 이상적 인물로 봤거든요. 인격적으로 가장 원만한 인간이자 집에선 가장 성실한 가장, 밖에선 가장 훌륭한 군인이라는 점에서였죠.”  

‘율리시스’의 독창성 중 하나는 10년에 걸친 오디세우스의 모험을 단 하루로 압축해 냈다는 점이다. 조이스는 아일랜드 더블린을 무대로 1904년 6월 16일 단 하루 동안 벌어진 평범한 광고회사 외판원이자 한 집안의 가장인 리오드 블룸의 일상 속 의식의 방황을 장편소설로 엮어 냈다.  

“오늘날 ‘블룸스데이’라고 축하받는 이날에는 아내 노라에 대한 조이스의 깊은 애정이 담겨 있습니다. 6월 16일은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노라와의 첫 데이트에 성공한 날이었거든요. 당시 노라는 가방 끈 짧은 호텔 여직원에 불과했지만 조이스는 ‘내가 사랑하는 것은 오직 그녀의 영혼’이라며 평생 아내 곁에 머물렀죠.”  

그러나 ‘율리시스’는 뭇 여성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오디세우스, 정숙한 아내 페넬로페, 아버지를 우상시하는 아들 텔레마코스라는 오디세이의 행복한 삼위일체 구조를 철저히 무너뜨린다. 블룸의 아내 몰리는 남편이 가장 경멸하는 남자와 달콤한 불륜에 빠져 있다. 블룸은 이를 눈치 채고도 한마디 말도 못한 채 마사라는 여성과 익명의 연애편지를 교환하고 해변을 산책하다 만난 소녀를 훔쳐보며 수음을 통해 울분을 해소하는 소심한 남자다. 블룸의 정신적 아들이라 할 만한 스티븐 데덜러스는 블룸의 ‘부성애’를 뿌리치고 ‘가출’을 감행한다.  

“‘율리시스’에 대해선 ‘현대인의 분열된 영혼과 가족의 붕괴를 그린 비극적 세계관이 담겼다’는 부정적 해석이 지배적인 게 사실이죠. 하지만 몰리의 독백으로 이뤄진 마지막 18장이 ‘Yes’로 시작해서 ‘Yes’로 끝난다는 점을 상기해야 됩니다. 블룸은 숱한 상처를 받으면서도 끝내 가정을 버리지 않습니다. 데덜러스도 언젠가 돌아오리라는 암시를 남기죠. 조이스에겐 ‘결혼의 축가’와 다름없는 이 작품은 비극이 아니라 부정을 뛰어넘는 긍정의 미학이 담긴 코미디입니다.”  

그는 ‘율리시스’의 이런 긍정적 세계관을 작품의 고향인 더블린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블룸스데이엔 공영방송이 일기예보도 접고 아침부터 30시간에 걸쳐 율리시스를 낭독하는데 더블린 사람들은 이 방송을 듣다가 폭소를 터뜨리기 일쑤라는 것이다. 100여 명에 이르는 등장인물의 모델이 더블린에 살던 실존인물이기 때문이다. 또 조이스 동상을 더블린 시내의 시장 바닥이라는 ‘저 낮은 곳’에 세움으로써 그가 학자들의 작가이기에 앞서 대중소설가임을 상기시키고 있다고 한다.  

“흔히 ‘율리시스’를 모더니즘 예술의 절정으로 꼽지만 가장 포스트모던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수많은 언어유희뿐 아니라 공상과학과 판타지, 스릴러, 코미디가 함께 담겨 있거든요. 그래서 조이스 연구자들에게 포스트모던은 탈(脫)모던이 아니라 속(續)모던이라고 할 수도 있죠.”  

“조이스 작품은 처음 들어가기도 어렵지만 빠져나오기는 더 힘들다”고 털어놓는 노학자의 경기 용인시 자택 서재에는 여백마다 빽빽한 글귀를 적어 놓고 다시 번역 중인 ‘피네간의 경야’ 원서가 펼쳐져 있었다.(권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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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denuit99 2007-04-05 21:45   좋아요 0 | URL
로쟈님의 좋은 리뷰 항상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저도 옥스포드 판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 김종건 선생님께서 번역하신 판은 Vintage Books에서 나온 가블러 판이더군요.(영문학계에서는 이 책을 주로 사용하더군요. 저도 이 책으로 공부했습니다) 일전에 딱 한 번 율리시스 강독회에 간 적이 있어서 선생님 옆에 앉을 기회가 있었서 슬쩍 보았더니 책이 정말 새까많고 너덜거릴 정도였습니다.

첫번째 에피소드를 보니 가독성이 훨씬 좋아졌더군요. 다만 사소한 오자들과 누락이 좀 있었습니다. 시간을 들여 천천히 올려볼까 합니다.

로쟈 2007-04-05 22:39   좋아요 0 | URL
전공하신 분이 댓글을 달아주셔서 반갑네요.^^ 저야 관견을 몇 자 늘어놓을 따름이고 보다 진득한 리뷰는 따로 기대해 보겠습니다. '천천히' 올려주신다니까 '천천히' 기다려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