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저널 담비의 리뷰를 가끔 스크랩해놓는데, 이번에 옮겨오는 것은 영국 비평가 매슈 아놀드의 '교양'론에 관한 것이다. '매슈 아널드'의 <교양과 무질서>(한길사, 2006)는 예전에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다룬 바 있지만 아직까지 손에 들어보지 못했는데 전공에 대한 관심사와도 맞물려서 조만간 훑어보기라도 할 작정이다. 아놀드 비평의 요체를 되짚어본 논문에 대한 리뷰를 워밍업으로 읽어둔다. 

담비(07. 03. 23) 매슈 아놀드의 '교양'을 다시 논하다

매슈 아놀드(Matthew Arnold, 1822~1888)는 영미 신비평(New criticism)이 활개를 쳤던 지난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국내 인문학 담론 전반에서 널리 인용된 학자이다. 비평의 인문주의적 기능을 확립시킨 그는 어떠한 사적 의도도 갖지 말고 작품을 대하라는 '몰이해적 관심'(disinterestedness), 이제까지 존재한 최상의 작품과 비교해보았을 때 손색이 없어야 비로소 뛰어난 작품이라는 '시금석 이론' 등으로 유명하다.

F. R. 리비스와 에즈라 파운드에 의해 정초된 문학 텍스트주의가 미국으로 건너가 남부 귀족 교수들의 보수적 세계관과 맞아 떨어지면서 제도권 평단을 석권했다는 비판이 있듯이, 이들의 사상적 鼻祖(비조)에 해당하는 매슈 아놀드 또한 그간 좌파 비평가들에게는 우파 부르주아 비평관의 원조격으로 비판을 받아왔다. 소위 아놀드 때리기와 이에 맞선 아놀드 구하기가 영미 문학계 내부에서 진행되어온 것이다. 

아놀드는 프랑스 혁명 후 영국사회에 불어닥친 이념의 혼란상을 타개하기 위해 '비평' 기능의 회복을 주장하거나, 대중들의 민주주의적 열망이 대중주의로 흐르는 것을 경계하면서 '교양' 개념을 통해 대중의 문화적 수준향상을 꾀하려했던 인문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현 시기 비평의 기능'(The Function of Criticism at the Present Time, 1864)과 '교양과 무질서'(Clture and Anarchy, 1869) 등의 저작을 통해 새로운 비평을 제안하고 그 핵심으로 교양 개념을 제시했다.

이런 아놀드의 기획에 대해 전형적인 맑스주의적 비평을 가한 이는 테리 이글턴이다. 그는 아놀드가 당대 계급세력의 급진적인 재편을 지배블럭 안에서 효과적으로 달성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기존체제로 포섭하는 데 그 목적을 두었다고 비판했다. 귀족계급이 급속도로 정치적 헤게모니를 잃어가고 있는 시점에서 부르주아의 정치적 헤게모니 장악을 위한 문화적 패권 확보가 아놀드의 주된 관심사였다고 본 것이다. '문학에서 문화연구로'의 저자 앤서니 이스트호프 또한 "아놀드의 교양이념에서 문학이 계급갈등을 희석시키고 국가적인 조화를 긍정함으로써 직접적으로 정치적 역할을 수행했다"고 본다.

이글턴과 이스트호프는 당연히 문학의 정치적 읽기로 나아간다. 이들의 단골메뉴는 대중문학(문화)과 고급문학(문화)의 위계철폐다. 그러나 요즘 이런 주장의 효력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오늘날의 대중문화는 대중들의 민주주의적 열망을 담아내기보다는 자본의 확장에 동원되는 측면이 훨씬 강하기 때문이다.

이런 시점에서 철지난 '아놀드 때리기'와 '구하기'에서 벗어나 그의 핵심사유를 다시 읽어보려는 시도가 있어 눈길을 끈다. 김재오 영남대 교수(영문학)가 최근 '19세기 영어권 문학' 제10권 2호에 발표한 '아놀드의 사상-민주주의, 비평, 그리고 교양'이 그것이다. 김 교수는 "아놀드가 오늘날 대중문화의 자본종속과 같은 사태를 누구보다 우려하고 그 폐해를 실감했다"는 점에서 볼 때 "아놀드의 비판대상이 되었던 관점으로 아놀드를 비판하는 것은 문제의 핵심을 흐리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대부분의 평자들이 아놀드의 이데올로기적 입장만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아놀드의 주장을 거꾸로 읽어야 올바른 독자가 되는 것처럼 착각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이데올로기 효과'"라며 김 교수는 목소리를 높인다. 아놀드의 현실인식이 '정치적 정답'과 일치하느냐의 여부보다 그의 비평과 교양개념에 담긴 당대적 의의를 살펴보는 것이 인문학의 위기라는 오늘날의 현실을 진단하는 데 유용한 참조틀이 될 것이라며 아놀드 다시 읽기를 시작한다.

우선 김 교수는 아놀드의 첫번째 비평적 주저에 해당하는 '현 시기 비평의 기능'이 프랑스 혁명 후의 영국사회의 변화상에 대한 사상적 대응이라는 점을 환기시킨다. 아놀드가 보기에 당시의 문인들은 소포클레스나 셰익스피어처럼 '창조성'이 중요한 사상의 흐름 속에 있지 않았다. 그것보다 '인간의 힘'과 같은 것이 부족했고 필요했다. 아놀드는 바이런과 괴테가 위대한 창조력을 갖고 있었지만 괴테가 삶과 세계에 대해 폭넓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생명력이 더 오래갔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아놀드는 워즈워드를 비롯한 이전 세대 시인들이 프랑스혁명의 여파를 전 유럽적인 관점에서 파악하지 못했고, 그 이념의 전파가 몰고 올 영국사회의 변화를 넓은 시야에서 바라보지 못한 점이 불만스러웠다.

먼저 프랑스혁명과 영국혁명의 차이를 보자. 아놀드가 보기에 프랑스혁명은 이성에 대한 믿음에 기초한 보편적이고 항구적인 사상에서 그 동력을 발견한 것이었고, 영국의 경우는 법이나 양심 등의 실제적인 감각에 기초한 것이기에 보편적 호소력을 지니지 않았다. 하지만 아놀드는 프랑스 혁명을 두개로 쪼개서 보았다. 사상적 혁명에서는 성공했지만, 정치적 혁명에서는 실패했다고 말이다.

그런 차원에서 그는 에드먼드 버크에 동조했다. 버크는 프랑스의 과격한 혁명문화가 영국에 밀어닥칠 것을 우려한 대표적인 보수파 지식인이다. 주권재민의 원칙은 영국에서 시발되었으나 권리장전에 채택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것이 프랑스로 건너가 형멱의 핵심으로 자리잡았다. 이에 대해 버크는 다음과 같이 비유적으로 정리했다. "주권재민의 원리는 영국 토양에 전적으로 맞지 않으나 영국에서 자란 가공되지 않은 산물로서 어떤 사람이 이중의 사기로 불법적으로 선적해 [프랑스에] 수출한 위조품이다. 이 수출의 목적은 이 위조품을 향상된 자유라는 최신 프랑스식의 유행을 따라 다시 제조해서 영국에 밀수입하려는 데 있다."

대단히 역동적인 정리가 아닐 수 없다. 아무튼 여기서 아놀드가 읽어낸 교훈은 "훌륭한 사상들을 정치적이고 실제적인 부분에 즉각적으로 적용하려는 열광은 치명적"이라는 것이다. 사상은 '그 자체로' 평가해야 하나 자신들의 요구에 따라 사상의 본질을 왜곡하면서까지 세계를 변혁하고자 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보았다. 김 교수는 여기서 "아놀드의 사상은 정치이념으로서의 성격보다는 한 문화를 성장시키는 정신적 토양에 가깝다"라는 점을 지적한다. 이 명제가 김 교수 논문의 핵심이다.

아놀드는 프랑스 혁명사상이 과연 보편적인가를 심각하게 질문했던 것이다. 그 방식은 바로 그것을 영국사회의 특수성 속을 통과시키는 것이었다. 거기서 그것은 '추상적'이라는 판단을 받게 된 것이고.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지 현실세계에 작용하는 '사상'에 대한 필요성이 아놀드에게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그의 '교양' 개념은 이런 필요성에 따라 등장한 개념이라고 김 교수는 말한다.

이 '교양'이 '프랑사(*프랑스)의 사상'과 다르게 하기 위해 그는 독일에 눈을 돌렸던 듯하다. 쉴러 같은 독일 관념론자들에서 잘 나타난 '인격도야(Bildung)의 개념이 그것이다. 리딩스(Bill Reading) 등의 지적에 따르면 독일 관념론자들의 기획은 지식과 역사적 전통을 미학적 이데올로기를 통해 매개하여 변증법적 통일을 이루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교양(문화)의 이상을 드러내는 일과 개인의 발전을 하나의 과정을 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독일과 영국의 국민적 기질은 거의 상반됐다. 민족적 정체성보다는 개인주의가 강력하게 뿌리내리고 있었다. 따라서 아놀드는 개인적 도야를 역으로 틀어 당시 영국에 퍼지던 물질적 문명에 대한 맹신, 강한 개인주의, 융통성의 부족(똘레랑스의 실종?) 등의 문화적 에토스에 대한 대응으로서 '교양'을 설정했다.

교양이 개인적인 관점에서는 학문적 열정으로, 이웃에 대한 사랑과 선행에의 충동, 인간적 오류를 개선하려는 사회적 동기와 결합한다. 무엇보다 아놀드는 교양의 이념을 국가 개념과 결합시키려고 노력한다. 노동계급이 오랜 봉건적 습속에서 벗어나 자유 그 자체를 숭배하는 무질서한 경향이 뚜렷해지는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볼 때 아놀드의 노동계급에 대한 시각은 일방적인 면이 있음을 김 교수는 인정한다.

계속 지적하자면 아놀드에게는 계급의 현실이 부차적이거나 항상 생략됐다. 교양의 작용이 계급을 없애려면 계급간의 정치적, 경제적 불평등의 해소는 우선적 고려사항이 되어야 하는데 말이다. 이런 측면에서 레이먼드 윌리엄즈가 "아놀드 교양이념의 재료를 발견할 수 없다"고 비판한 것은 설득력을 지닌다. 우리의 탁월한 윌리엄즈는 "교양개념은 올바른 실천과 앎이 결합된 '하나의 과정'으로 이해되지 않고 '앎'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일종의 '물신'이 되어버렸다"라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결론에서 아놀드의 교양개념이 현실을 수용하지 못한 측면이 많지만,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로 나가는 길목에 '교양'의 이념이 있음을 강조했고, 그 이념을 당성하는 데 '문학'의 역할이 있음을 알렸다는 측면을 높이 평가한다. 김 교수의 논문은 아놀드 사상의 역사적 배경과 전개, 그 장단점을 잘 정리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 주변의 교양이라고 일컬어지는 가벼운 것들과 아놀드의 교양을 비교해볼 필요는 충분히 있을 듯하다.(리뷰팀)

07. 0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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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7-03-24 17:16   좋아요 0 | URL
예전에 문학권력 논쟁하던 무렵에 강준만 교수가 덕성여대 영문과 윤지관 교수를 비판하면서 매슈 아놀드를 언급했던 게 기억이 나네요. 윤지관 교수가 스스로 진보적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철지난 보수적 이론가인 아놀드를 가지고 얘기하고 있다고 비판한 것 같은데^^ 그 이상은 아는 바가 없네요. 그때의 논쟁은 어떻게 정리가 됐었나요?

로쟈 2007-03-24 23:01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기억은 나는데, 결말은 모르겠습니다(결말이 따로 지어졌는지도 모르겠구요).^^; 백낙청 교수의 경우도 그렇지만 '보수적 비평가'를 준거로 삼는 건 창비의 기본 포지션입니다. 그 자체가 비난받을 만하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징후적이란 생각은 합니다...